[사진으로 보는 北 고려왕릉] ⑯'명릉군(明陵群)' 3개 왕릉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충렬왕과 충선왕의 무덤일 가능성
표석 없어 확증 어려움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16. 고려 29대 충목왕의 무덤 명릉(明陵)과 두 개의 왕릉
고려 23대 고종(高宗)은 1218년(고종 5) 고려에 침입한 거란족을 몽골군과 연합해 물리친 후 이듬해 몽골과 형제맹약을 맺었다.
그러나 1231년(고종 18)부터 1259년까지 고려는 몽골과 ‘30년 전쟁’을 치른다. 전쟁을 끝내고 화친을 주도한 원종(元宗)이 즉위했지만 무신 권력자들에게 한때 왕위를 찬탈당한 정도로 왕권은 미약했다. 원종은 원나라(1260년 몽골에서 원으로 국호 변경)의 도움으로 왕위를 회복했지만 이후 원나라의 간섭과 지배를 받게 된다.
원종 사후 왕위를 승계한 맏아들 왕거(王昛)가 사망하자 아들인 충선왕은 고려에서 시호를 붙이던 관례를 깨고 죽은 부왕(父王)의 시호를 원나라에 요청했고, 그렇게 받은 시호가 ‘충렬왕’이다.
이때부터 고려 국왕은 ‘종’이 아니라 ‘왕’이라는 제후국 시호를 받게 됐고, 모두 ‘원나라에 충성하라’는 뜻이 담긴 ‘충(忠)’자가 붙었다. 25대 충렬왕부터 시작해 충선왕(忠宣王), 충숙왕(忠肅王), 충혜왕(忠惠王), 충목왕(忠穆王), 충정왕(忠定王) 등 6명의 국왕이다. 당시 고려 지배층은 원나라와 천자-제후국 관계로 정립함으로써 고려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원 간섭기 고려 국왕들은 재위 중 원나라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는 양국의 정치 상황에 따라 왕위를 빼앗기거나 회복하는 등 즉위와 복위를 반복했다. 또한 국왕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을 했으며, 그 소생 자만이 국왕에 오를 수 있었다.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이 된 것이다.
‘충’자가 들어가 6명의 왕 중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의 무덤은 현재 위치를 알 수 없다. 15세기 문신인 유호인(兪好仁)은 개성을 둘러보고 쓴 유송도록(遊松都錄)에서 “(태조 현릉) 북쪽 골짝에 두어 능(陵)이 있어 수백 보 사이에서 서로 바라보는데 거주하는 사람들이 충정왕, 충혜왕의 능이라 이른다. 그러나 인식할 만한 비석이나 푯말이 없다”라고 기록했다.
그런데 충정왕의 총릉(聰陵)은 개성 도성 남쪽 용수산 밑에 있으니 태조 현릉(顯陵) 북쪽에 있을 수 없다. 충정왕이 아니라 충숙왕의 무덤일 가능성도 있다. 기록에 따르면 충숙왕의 의릉(毅陵)도 도성 서쪽에 있었다.
충혜왕의 무덤인 영릉(永陵)은 1916년 촬영된 사진이 남아 있어 이때까지는 위치가 확인됐지만, 그 뒤에 소실됐다. 대체로 진봉산 동쪽(현재 개성공업지구의 서쪽) 능선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태조 현릉에서 북쪽이 아니라 서남쪽으로 언덕을 넘어가면 명릉군(明陵群) 또는 명릉떼라고 부르는 세 개의 왕릉이 나온다. 만수산 줄기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데, 서쪽부터 제1릉, 제2릉, 제3릉의 순서로 약 40m~70m의 거리를 두고 평지보다 10m 정도 높은 위치에 나란히 있다.
그중 통상 ‘제1릉’을 고려 29대 충목왕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고려사>에는 1348년(충목왕 4) 12월 정묘 일에 나이 12세로 김영돈(金永旽)의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다음 해 3월 정유 일에 명릉에 장례 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명릉이 “개성부 서쪽 12리에 있다“고돼 있다. 12리(里)는 대략 5.5km 정도이다. 개성에서 명릉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북한은 제1릉을 충목왕의 무덤이라고 확정했지만, 표석이 없어 명릉으로 100% 확증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남한 학계에서는 제1릉의 묘실구조가 10세기 형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14세기에 조성된 충목왕의 무덤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나와 있다.
조선 고종(高宗)실록에는 ”고려 충목왕(忠穆王) 명릉(明陵)의 산직소(山直所)가 보고하기를, 지난밤에 알지 못할 어떤 놈이 능의 북쪽 봉토(封土)를 몰래 파헤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달려가 봉심하니, 길이와 너비가 3, 4자가량 되고 깊이도 4자가량 되었습니다“란 기록이 보인다.
조선 시대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현재로서는 제1릉을 충목왕의 명릉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충목왕 외에도 25대 충렬왕(忠烈王)의 경릉(慶陵), 26대 충선왕(忠宣王) 의 덕릉(德陵)도 ”개성부 서쪽 12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따라서 명릉군의 세 무덤은 충목왕, 충렬왕, 충선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는 그렇게 파악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 고종(高宗) 4년(1867년)에 능 앞에 표석을 세울 때 명릉을 제외한 2개의 능 앞에 각각 ‘고려왕 제2릉’, ‘고려왕 제3릉’으로 표기했다. 충렬왕과 총선왕의 무덤이 어느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충렬왕이 창건해 원찰(願刹)로 창건한 묘련사(妙蓮寺)에 충렬왕과 충선왕·충렬왕의 왕비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영정을 모신 영당(影堂)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 3개의 왕릉이 모두 인근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무덤인 고릉(高陵)은 명릉군 제2릉에서 동쪽으로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주목되는 점은 명릉군 제2릉의 문인석과 고릉의 문인석이 조각수법상 대단히 유사하다는 것이다. 두 능이 비슷한 시기에 조성됐고, 상호 연관성이 있다는 측면에서 검토해볼 여지가 있다.
충렬왕은 34년간 왕위에 있었기 때문에 왕비의 무덤 인근에 비교적 화려하게(?) 왕릉이 조성되고, 충선왕은 아들 충숙왕에게 선위한 뒤 원나라에서 사망해 고려에 온 후 부왕의 묘 아래 나란히 묻힌 것은 아닐까? 아직은 섣부른 추론에 불과해 학계의 진전된 연구를 기다려볼 수밖에 없을 듯하다.
충렬왕은 1308년(충렬왕 34) 7월 기사 일에 73세의 나이로 신효사(神孝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빈전은 숙비(淑妃, 숙창원비 김 씨)의 저택에 마련되었다. 충선왕이 즉위하여 같은 해 10월 정유 일에 왕실 법도에 따라 장례를 마쳤으며 능호는 경릉이다.
<고려사>에는 “영구가 처음 떠나자, 충선왕이 직접 거친 베로 만든 상복을 입고 손수 향로를 들고 걸어서 십천교(十川橋)에 이르러서야 견여(肩輿)를 타고 산릉(山陵)에 이르렀다. 장례를 마치자, 크게 곡(哭)을 하고 돌아와서 상복을 벗었는데, 이는 이전에 일찍이 없던 효행이라고 여겼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 기록을 참고로 충선왕 장례행렬의 노정을 추론해 보면 황궁의 광화문을 나와 남대가(南大街)를 따라 내려오다 내성의 남대문을 통과한 뒤 서쪽으로 난 대로를 따라가다 십천교를 건너 국왕과 사신(使臣)의 행차에 이용된 외성의 선의문(오정문)을 통과했을 것이다.
선의문 밖은 서교(西郊)라고 불렸고, 이곳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길과 서쪽으로 예성강에 이르는 길로 나뉜다. 충선왕은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서쪽에 있는 태조 현릉을 지나 현재 명릉군이 있는 곳에 도착해 장례를 치렀을 것이다.
<고려사절요>에 충선왕이 “죽책(竹冊)·옥책(玉冊)이 또한 예에 맞는가 하니, ‘순성수정상승대왕(純誠守正上昇大王)’이라는 호만을 올렸다”는 기록으로 볼 때 경릉에는 인종(仁宗)의 장릉(長陵)이나 신종(神宗)의 양릉(陽陵)에서 출토된 것 같은 시책(諡冊)을 만들어 매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명릉군은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개성시 해선리(일본강점기 때 경기도 개성군 중서면 연릉리 명릉동)에 속한다. 북한은 이 무덤군을 보존유적 제549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2013년 개성역사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때 명릉군도 포함됐다.
일제가 작성한 <대정5년도고적조사보고 (大正五年度古蹟調査報告)>에서 명릉군(明陵群)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됐다. 북한에서는 명릉군을 ‘명릉떼 1릉’으로 함께 적어 표기하기도 한다.
1910년대 일제의 조사보고에 따르면 총목왕의 무덤인 ‘명릉군 제1릉’은 3개의 무덤 중 능역(陵域)이 가장 협소하고 병풍석은 원래 12각형이었으나 파괴되어 잔 석을 모아 보수했다. 석난간(石欄干)의 잔 석이 원형으로 되어 있으며, 능 앞에 능비(陵碑)가 서 있었다.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의 석수(石獸) 4구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명릉군 제1릉은 1910년대에 촬영된 사진과 최근 촬영된 사진을 비교해 보면 거의 비슷한 외경을 보여준다.
명릉의 외부는 과거 여러 구역으로 구분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현재는 제1구획만 남아있다. 병풍석(屛風石)이 설치된 봉분(封墳)과 난간석(欄干石)이 남아 있고, 석수(石獸)는 보이지 않는다.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고종 4년에 세운 능비가 세 도막으로 깨진 채 아직 남아 있는 게 확인된다.
1983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는 이 능을 발굴해 무덤 칸(묘실)은 남향으로 반지하에 설치되었고, 단실(單室)의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이라고 발표했다. 관대(棺臺)는 묘실의 중심에 남북으로 길게 놓였다.
곱게 다듬은 화강석으로 길이 2.3m, 너비 87cm, 두께 31cm로 조사됐다. 회벽은 거의 떨어져 벽화의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북벽에 연꽃과 꽃에 날아드는 나비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천장에는 별 그림이 약간 남아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일제강점기에 두 번이나 도굴되었다고 하며, 출토유물에 관한 기록은 없다.
충목왕(1337~1348)은 충혜왕의 아들로 이름은 왕흔(王昕)이다. 원나라에 볼모로 가 있다가, 1344년(충혜왕 복위 5) 선왕이 죽자 원나라에서 귀국해 즉위했다. 충목왕은 재위 4년 만에 죽었다.
명릉군 제2릉은 제1릉에서 동남쪽으로 40m 정도 떨어져 있다. 능 구역은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뉜다. 1910년대에 촬영된 명릉군 제2릉의 사진을 보면 석축은 무너져 있었고, 봉분 앞에 석주와 난간석, 석수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모습이다. 현재 1층 단에는 12각형의 병풍석이 설치된 봉분과 난간석, 석수, 망주석(望柱石) 등이 남아 있다.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으며, 말상을 비롯해 2개가 뚜렷하게 확인된다. 석수의 경우 모두 4기가 있었다고 전해지지는 최근 촬영한 사진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북한의 조사자료에 따르면 봉분의 직경은 9.6m, 높이는 2.35m이다.
난간석은 기둥만 남아있고, 망주석은 봉분 정면 좌우에 한 개씩 2기가 세워져 있다. 2단과 3단에는 문인석(文人石) 한 쌍이 좌우로 마주 보고 있다. 3단 석축에서 6m 앞에는 정자각 주춧돌이 남아 있어 이곳에 정자각(丁字閣)이 세워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명릉군 제3릉은 2릉에서 동남쪽으로 약 70m 떨어져 있다.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남향이다. 제2릉과 같이 외부는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뉜다. 상단인 제1구획에는 12각형의 병풍석이 설치된 봉분과 난간석, 석수 등이 있다. 봉분은 직경이 8.4m이고, 높이는 2.7m이다.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고, 난간석은 기둥만 남아있으며, 2개의 석수가 확인된다. 2단과 3단에는 좌우로 문인석 1쌍씩이 서 있다. 4단에는 정자각 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1910년대 촬영된 사진과 비교해 보면 현재 명릉군 왕릉의 경우 1980년대에 북한이 고려 왕릉 양식에 따라 보수해 정비한 것으로 보인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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