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가시관을 프랑스가 품은 까닭은

2020. 4. 18.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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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주명철의 프랑스 역사산책
⑦ 시테 궁전과 생트 샤펠
루이 9세, 파리를 기독교 중심 만들려
당대 최고 보물인 가시관 등 성유물
거액 들여 비잔틴제국에서 사들여
시테섬에 '경건한 예배당' 신축
프랑스혁명 뒤 탈기독교운동 때
생트 샤펠도 약탈 등 불운 겪자
생드니 수도원이 성유물 보관 뒤
국립도서관 거쳐 노트르담 성당에
신심이 두터웠던 루이 9세(1226~1270 재위)가 거액의 돈을 주고 비잔틴 제국에서 사온 예수의 가시관 등 성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시테섬에 새로 지은 생트 샤펠(경건한 예배당)의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파리의 발상지인 센강 한가운데의시테(Cite)섬은 골족의 일파인 파리시(Parisii)라는 부족의 땅이었다. 기원전 53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시테섬을 정복하고 루테티아(Lutetia, 프랑스말로 뤼테스 Lutèce)라고 불렀다. 미슐랭 여행안내서(1981)에서는 “물 가운데 주거지”, 역사가 피에로(A. Fierro)는 “진흙”, “늪지”를 뜻한다고 했다. 풍자작가인 라블레는 소설 <가르강튀아>(1534)에서 시테섬에 사는 여성들의 “흰 엉덩이”를 뜻한다고 넉살을 피웠다. 강가에서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았을까? 아는 것은 속이는 힘도 준다. 역사가 파비에(J. Favier)는 3세기부터 “파리시족의 도시”라는 뜻의 파리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센강을 끼고 발전한 파리에서 수운업자들(Marchands d’eau)은 일찍부터 중요한 세력이었다. 파리의 문장(紋章)은 그러한 역사를 반영해서 물결 위에 뜬 돛배를 담고 있다. 14세기에 제정한 “물결에 흔들려도 가라앉지 않는다”(Fluctuat nec mergitur)라는 라틴어 명구는 역경에 굴하지 않고 나아가는 각오를 표현했다. 방패 모양 문장의 위에는 쪽빛 바탕에 왕을 상징하는 황금색 백합꽃을 뿌렸고, 그 아래에 붉은색 바탕에 은색 돛배가 강물에 뜬 모양을 담았다. 파리의 색깔이 청색과 적색이며, 왕의 신하임을 스스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생드니 대성전을 얘기할 때, 두 색이 각각 성모와 순교자와 관련됐으며 백합꽃도 성모의 꽃이라고 설명했음을 상기하자.(‘성인의 무덤서 고딕 양식 열고, 프랑스 국기 색을 이루다’ 참조)

콩시에르주리는 시테섬에 있는 왕궁으로 프랑스 대혁명 때 감옥으로 쓰였다. 게티이미지뱅크

반란군 지도자의 두건 쓴 왕세자​

파리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세기 나폴레옹 3세가 파리 도지사로 임명한 오스만(G. E. Haussmann) 남작 덕택이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생긴 도시가 아니듯이, 파리도 오랜 세월을 두고 모습을 갖추었다. 19세기 이전에도 복잡한 골목길을 없애고 대로를 뚫어 바람이 시원하게 통하고 마차가 빨리 달릴 여건을 마련했다. 오늘날 여행자가 거니는 장소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역사산책의 재미다.

오늘날 팔레 대로의 왼편에 파기원(破棄院) 같은 최고법원이 쓰는 팔레 드 쥐스티스(Palais de Justice)가 있다. 시테섬의 5분의 1에 가까운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유서 깊은 장소다. 10세기부터 14세기까지 카페 왕조의 왕들은 그것을 ‘새 궁전’(Nouveau Palais)이라 불렀다. 로마 황제들과 프랑크 왕국의 왕들은 좌안에 있는 ‘테름궁’(Palais des Thermes)에 살았기 때문이다.

루이 9세(1226~1270 재위)는 시테 왕궁에 생트 샤펠(경건한 예배당)을 지었고, 필리프 4세는 궁전을 증축했다. 발루아 가문이 왕위를 계승한 직후에 백년전쟁이 일어났고, 1356년 장 2세(Jean Ⅱ le bon)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영국에 붙잡혔다. 왕세자 샤를(샤를 5세, 1364~1380 재위)은 신분회를 소집해서 몸값과 전비를 강요했다. 생필품 값이 올라 생활이 피폐해진 도시민에 이어 농민들도 봉기했다.

1358년 2월22일 파리의 상인대표(구체제의 시장)였던 에티엔 마르셀은 시위대 3천명을 이끌고 왕궁에 침입해서 왕세자 샤를의 측근 두 명을 살해했다. 그들의 피로 옷을 적신 샤를은 두려움에 떨며 마르셀의 두건을 머리에 쓰고 반란자들과 화해했다. 샤를은 4주 뒤에 파리에서 도망쳤다가 8월4일에 되돌아왔다. 그사이 마르셀이 살해당했고 적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생폴 교회 근처에 생폴궁을 마련하고시테궁을 떠났다.

왕국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조정(朝廷)이 분화하면서 고등법원이 탄생했는데, 13세기에 파리 고등법원은 전국을 관할하다가 다른 곳에 고등법원이 잇따라 생기면서 3분의 1 정도만 지배했다. 파리 고등법원은 왕이 거처를 옮긴 뒤에도 시테 왕궁에 남았다. 그곳에서는 책도 재판하고, 형을 집행했다. 사형집행인이 사슬에 묶인 금서를 끌고 층계 앞마당에 나타나, 판결문을 읽은 뒤 책을 갈기갈기 찢고 불을 붙였다. 구경꾼들은 계몽사상가들을 저주했다.

1793년 4월6일 혁명법원이 3년 전에 폐지된 고등법원 자리를 차지할 때부터 1794년 테르미도르 9일(7월27일)에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하는 날까지 모두 4021명을 재판해서 2585명을 단두대에 세웠다. 1795년 5월7일에 혁명법원의 악명 높은 검사 푸키에 탱빌도 그레브 광장에 설치한 단두대에 올랐다. 그리고 5월31일에 혁명법원은 폐지되었다.

팔레 드 쥐스티스의 일부인콩시에르주리 감옥에 들어서면 여름날의 온갖 악취와 함께 떠들썩한 소리에 섞여 절망의 신음과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짚을 깔고 자야 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던 홀을 지나 층계를 오르면 정치범들의 감방을 볼 수 있다. 지하로 내려가 예배당과 마리 앙투아네트가 마지막 길을 가기 전에 고뇌의 밤을 보내던 감방도 구경할 수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혁명 때 처형되기 전까지 수감됐던 콩시에르주리의 방. 위키피디아(André Lage Freitas 작)

맨발로 성유물 모신 루이 9세​

이제부터 다시 중세로 돌아가서 생트 샤펠이 생기는 과정을 살펴보자. 중세 기독교 세계의 최고 보물은 예수가 흘린 ‘성혈’(聖血)과 그의 몸에 직접 닿았던 가시관, 성의와 수의, 십자가 조각, 십자가에 손과 발을 고정시켰던 못, 로마 병사 롱기누스가 예수를 찌른 창날이었다. 창날은 오른쪽 옆구리에서 비스듬히 올라가 성심(聖心, Sacrė Coeur)에 닿았기 때문에 보물이었다.

그다음의 성유물은 성모나 성인들과 관련한 물건이었다. 비교적 흔한 성유물은 유품이나 성인의 신체 일부였다. 종교인들은 성인의 무덤을 파헤치고 신체를 조각내서 나누어 가지기도 했다. 손가락뼈를 담으려고 손가락 모양의 함을 제작했다. 교회는 매년 종교축일에 신도들에게 성유물을 보여주고 신심을 북돋워 교회의 부흥을 꾀했다.

루이 9세는 열두 살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어머니 블랑슈 드 카스티유가 섭정으로 귀족들을 제압하여 왕권을 확립해주었다. 블랑슈는 프랑스 왕비였다가 영국 왕비가 되었던 알리에노르 다키텐의 외손녀였다. 그는 1234년에 교황의 추천을 받아 프로방스 백작의 열두 살짜리 딸 마르그리트를 스무 살의 아들과 맺어주었다. 경건한 루이는 신부 나이를 고려해서 금욕한 뒤 7년째부터 자녀를 열두 명이나 낳았다. 루이는 이단과 이교도를 직접 벌하러 다닐 정도로 신심이 깊었고, 사후에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파리를 로마와 예루살렘 다음으로 기독교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고 싶었다.

성인의 무덤을 껴안기만 해도 복을 받는다고 믿은 시대에 예수의 성유물을 보유하는 나라는 기독교 세계의 중심임을 자처할 만했다. 그렇게 볼 때 루이 9세 시대에 제2의 로마는 비잔티움(오늘날 이스탄불)이었고,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인 보두앵 2세(Baudoin Ⅱ de Courtenay)는 빚에 쪼들렸다. 루이 9세는 황제에게 13만5천리브르를 치르고 예수의 가시관을 포함한 성유물 22점을 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썼던 것으로 알려진 가시관. 프랑스의 루이 9세는 1239년 이 가시관 등 성유물 상당수를 거액을 들여 비잔틴 제국에서 사왔다. 생트 샤펠에 보관되다가 프랑스 혁명을 거친 뒤 지금은 노트르담 대성당에 보관돼 있다. AP 연합뉴스

루이 9세는 1239년 8월 초에 센강의 배를 타고 동남쪽 100㎞의 상스(Sens)까지 갔다. 그곳 대성당에서 성유물을 받아서 다시 파리까지 돌아간 그는 19일에 검소한 옷에 맨발로 성유물을 모시고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들어갔다. 1163년부터 짓기 시작한 이 대성당은 완공하기 전이었지만, 성유물을 보관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왕은 1241년부터 1248년까지 4만리브르를 들여 최고 보물을 모실 생트 샤펠을 지었다. 루이 9세 시대에 1리브르는 황금 8.271g이었다. 생트 샤펠의 건축비는 황금 330.84t이며, 성유물의 가치는 황금 1116.585t이다. 제아무리 화려한 성궤라도 거기 담을 성유물에 비하긴 어렵지만, 보물의 가치와 비교해서 거의 4분의 1이라니 그 자체로 보물인 성궤다.

생트 샤펠은 원래 위그 카페의 아들 로베르가 1022년에 에투알(Etoile) 교단을 설립하고 ‘노트르담 드 레투알’ 예배당을 세웠던 자리에 지은 걸작품이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만큼 웅장하지 않지만 장엄하고 아름답다. 가로 10m에 세로 33m의 이 예배당은 유리창 사이의 벽 두께를 보강해서 날렵하게 하늘로 솟았다. ‘프랑스 양식’의 새로운 기술이라 할 만하다. 지상 75m의 뾰족탑을 지붕에 인 예배당 내부는 복층의 구조이지만, 대성당의 내부보다 훨씬 단출하다. 아래층은 궁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며, 궁전 예배당답게 울긋불긋한 채색기둥과 천장에 백합꽃을 수없이 박아 넣었다. 더욱이 위층의 무게를 견뎌야 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단층의 건물처럼 ‘끊어진 아치’(arc brisé)로 천장을 떠받치게 했다.

왕을 위한 예배공간인 2층으로 올라가는 순간 탁 트인 느낌이 든다. ‘끊어진 아치’가 건물을 더 높이는 효과를 십분 발휘하기 때문이다. 아래층의 높이는 7m인데, 위층의 높이는 20.5m다. 특히 13~15m 높이의 유리창 15장에는 구약과 신약 성경의 주요 장면부터 예수의 성유물이 파리에 도착하기까지의 역사를 1113장면으로 나눠 표현했다. 채색유리가 울긋불긋하고 투박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방문객에게는 실내가 어둡다. 그럼에도 어둠에 익숙한 중세인은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햇빛을 안으로 들이면서 온갖 이야기를 들려주는 채색유리창과 성인들의 상을 보면서 황홀했으리라. 더욱이 정면에 3m 높이에 모신 가시관을 보면서 옷깃을 여미었으리라.

생트 샤펠의 스테인드글라스. <한겨레> 자료사진

노트르담 성당 화재를 피해간 성유물​

생트 샤펠이 겪은 불행을 짚어보고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1793년 말에 프랑스 중부에서 시작한 탈기독교운동(déchristianisation)의 여파가 파리에도 밀어닥쳤다. 이 시기에 생트 샤펠도 불운을 겪었다. 사람들이 회랑과 성직자석과 집기류를 가져가고, 지붕의 뾰족탑을 파괴하고, 건물 바깥의 조각, 특히 출입문 위의 박공에 새긴 조각을 부숴버렸다. 여느 고딕성당처럼 생트 샤펠의 바깥에는 성서의 장면을 새겨서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교회가 전하고 싶은 내용을 이해하도록 했는데, 기독교를 지우려는 사람들이 그 물증을 없애버렸다. 그들은 전국에서 교회의 십자가·제기(祭器)를 포함한 소장품을 파리의 국민공회로 가져다 바쳤다. 얼마 후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은 신앙의 자유를 옹호하면서 탈기독교운동에 제동을 걸었다.

그사이 생드니 수도원에서 생트 샤펠의 성유물을 잘 보관하다가 국립도서관으로 이관했다. 1802년에 나폴레옹과 교황 비오 7세가 정교협약(Concordat)을 맺은 결과, 파리 대주교는 가시관(Sainte Couronne)을 비롯한 유물을 돌려받았고, 1806년 8월10일에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보물로 지정했다. 2019년 4월15일에 세계인은 대성당의 지붕에 치솟는 불길을 보면서 발을 굴렀다. 불은 지붕 아래의 “노트르담의 숲”을 태우고 뾰족탑을 무너뜨렸지만, 소방당국은 가장 먼저 성유물을 구하였고 신속히 진화했다. 그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우리나라는 코로나19의 위기 상황에서도 촛불혁명의 미래가 걸린 총선 투표를 무사히 실시했고, 프랑스 대통령은 2024년까지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을 복원하겠다고 약속했다.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 ▶국민의 선택, 2020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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