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젖은 '性범죄 반성문' 알고보니.. 대필은 5만원, 샘플은 2000원

김우영 기자 2020. 4. 13.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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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님 전상서’… 반성문 쓰는 성범죄자들
온라인서 몇천원에 거래, 시나리오 별로 준비
반성문 대필 5만원… 전문 작가는 수고비 3배
법조계 "반성문 제출해도 양형에 영향 거의 없어"

‘존경하는 재판장님께. 이번 사건에 대해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피의자 ○○○입니다.’

미성년자 등 여성들의 성(性)착취물을 제작·유포한 텔레그램 ‘n번방’ 운영자들이 잇따라 재판부에 반성문을 제출했다. 형사 사건 가해자들이 경찰과 검찰 조사 때부터 재판까지 감형(減刑)을 위해 반성문을 여러 차례 내는 것은 흔한 일이다. 문제는 진심으로 반성을 하고 있는지다.

13일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는 재판과정에 제출할 반성문 ‘양식’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단돈 몇천원이면 자신의 혐의와 맞는 반성문 양식을 구매할 수 있다. 아예 반성문을 대신 써주는 업체들도 성업 중이다. 법조계에선 "재판부도 반성문을 워낙 많이 받아봐서 틀에 박힌 반성문은 안 써내니만 못하다"라고 했다.

◇불우한 가정환경은 반성문 단골 소재
성폭행, 불법촬영, 온라인 사이버 성범죄 등에 연루된 피의자들이 ‘감경’ 지식을 공유하는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다양한 반성문을 소개하고 있었다. 반성문 양식 소개 업체는 "여러분들의 선배, 즉 회원님들처럼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은 분들이 작성, 제출했던 반성문"이라고 안내했다.

반성문은 ‘성매수 남성이 선처를 바라는 내용’ ‘공중밀집장소 추행사건 가해자가 피해자에게는 용서를 검사님께 선처를 구하는 내용’ ‘카메라촬영죄를 범한 가해자가 반성하는 내용’ 등 사건의 내용과 수사 단계별로 세분화돼 있었다. 가격은 한 부에 2000원. 3~6쪽 분량이다. 10여개 반성문이 모아진 300쪽 분량의 모음집은 5만원에 판매됐다. 각각 조회수는 수천 건이 넘었다.

실제 6쪽 분량의 한 ‘아동·청소년 성매수사건’ 피의자가 검찰에 제출한 반성문에는 절반 가까이 피의자의 불우한 가정사가 써있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다" "제 자신이 살아있다는 게 추악하다" 등의 문장도 여러 차례 등장했다. 특히 "법무사를 준비 중인데 이번 사건으로 전과자가 되면 오랫동안 준비해온 자격시험에 다시는 응시하지 못할 수도 있다"며 선처를 바라는 내용도 담겼다.

‘지하철추행사건’ 피의자의 반성문도 내용은 비슷했다. "피해자분과 남편분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며 "용서만 된다면 뭐든지 시켜주시면 다 하겠다"고 했다. 3쪽 분량의 반성문에서 ‘용서’라는 단어만 8번 썼다. "이번 사건으로 부모님이 이혼할 지경에 이르렀다" "집이 풍비박산 났다" 등 이미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반성문뿐만이 아니라 피의자 주변인이 작성할 수 있는 탄원서 양식도 준비돼 있었다. 가격은 1000원 수준이었다. 피의자의 아내, 모친, 부친, 예비신부, 친구 등 작성자에 따라 탄원서 양식이 세분화 돼 있었다. "아직 젊으니 사회에 나가 반성하며 살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 "원래 심성은 착한데 실수로 그랬다"는 식이다.

◇"단 돈 몇만원이면 반성문도 대신 써줘요"
반성문 대행업체도 쉽게 찾을 수 있다. 포털사이트에 ‘반성문 대필’을 검색하면 업체 링크가 수십개 나왔다. 수고비 5만원이면 전문행정사가 쓴 반성문을 받을 수 있다고 소개돼 있다. 다만 반성문 전문 작가나 변호사가 직접 작성할 경우 가격은 1장당 15만원까지 치솟았다.

한 반성문 전문 대필 사이트는 "반성문 대행은 86.5%정도의 효과가 있다"며 "형량 또는 재판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20% 정도이지만, 이 20%가 결정적으로 나머지 80% 결과를 좌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오랜 대필경력과 케이스별 작성노하우에 의한 경험, 법률적 지식을 통해서만 형 감량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반성문 대행 업체 측은 ‘박사방’ 사회복무요원 강모(24)씨의 반성문 사례를 언급하기도 했다. 강씨가 제출한 반성문을 두고 지난 10일 재판부는 "이런 반성문은 내지 않는 것이 낫겠다"라고 했다. 강씨는 반성문에 ‘범죄와 무관한 가족과 지인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와 같은 취지의 입장을 썼다.

한 반성문 대행 업체는 "반드시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며 "(강씨처럼) 가해자이면서 피해자 탓을 하거나 피해자보다 본인이 더 안타깝다는 식의 동정하는 문장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이런 반성문으로 형량이 좌우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고려대 인권센터 자문위원인 박찬성 변호사는 "많은 피고인들이 재판부 등에 반성문을 제출하는 경우가 실제로도 있긴 하지만, 양형은 처벌의 필요성에 따라 결정된다"면서 "반성문 제출 여부 또는 제출 횟수에 따라 양형이 좌우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3일 국회 입법청원 게시판에는 ‘디지털 성범죄를 포함한 성범죄의 형량 감경 요소 중 반성 항목 제외 촉구’라는 제목의 청원글이 올라왔다. 청원자는 "글 몇 자로 이루어진 반성보다, 피의자들이 자신의 죄에 대한 처벌을 받아들이고 뉘우치는 반성을 하길 바란다"고 썼다. 이날 오후 1시 기준 7800여명이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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