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北 고려왕릉] ⑮5개 왕릉은 누구 무덤인지 '감감'
2016년 새로 정비된 모습 첫 공개
왕비 무덤인 가릉(嘉陵)은 강화도에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15. 몽골에 항복하러 갔다 온 원종(元宗)의 무덤 소릉(韶陵)
개성 고려궁궐(만월대)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고려 성균관에서 동북쪽에 있는 개성성 탄현문터를 지나면 송도 저수지가 나온다. 여기서 송악산 동쪽 능선을 끼고 3~4km 정도 올라가면 서쪽으로 매봉산(매봉, 442m) 능선이 나오고 그 남쪽에 ‘소릉군’이라고 부르는 5기의 왕릉급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소릉군의 동쪽에는 ‘냉정동무덤군’이라고 부르는 3개의 왕릉급 무덤이 남아 있고, 서쪽에도 왕릉급 무덤으로 추정되는 ‘월로동 제1릉’과 ‘월로동 제2릉’이 자리 잡고 있다.
소릉군 5개 무덤 중 제일 서쪽에, 가장 높이 있는 무덤이 제1릉이고, 동쪽으로 2, 3, 4, 5릉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무덤이 주인공이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기 때문에 능 호 대신 번호로 구분한다.
조선 고종(高宗) 4년(1867년)에 각 능 앞에 표석을 세울 때 소릉을 제외한 4개의 능 앞에 각각 ‘고려 제2릉’, ‘고려 제3릉’, ‘고려 제4릉’, ‘고려 제5릉’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이후 <대정5년도고적조사보고(大正五年度古蹟調査報告)>에서 소릉군(韶陵群)이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북한학계에서는 소릉군 또는 소릉떼라고 부른다.
소릉으로 추정되는 ‘소릉군 제1릉’은 현재 행정구역상 개성시 용흥동(일본강점기 때는 경기도 개성군 영남면 소릉리 내동)에 위치하며, 북한의 보존급유적 제562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1274년(원종 15) 6월에 재위 15년만에 제상궁(堤上宮)에서 승하하여 그 해 9월에 소릉에 장례 지냈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들어와 소릉의 위치는 소실됐다.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소릉이 개성부 북쪽 15리에 있다고만 기록돼 있다. 북한학계에서는 ‘소릉군 1릉’을 원종의 무덤으로 유력하게 보고 있지만, 표지석에는 ‘소릉’이 아니라 ‘소릉군 제1릉’이라고 표기해 단정 짓지는 않았다.
남쪽의 일부 학자는 ‘소릉군 4릉’이 가장 늦게 조성된 특징이 있다는 점을 들어 이를 원종의 무덤이라고 보기도 한다. 현재로서는 시책(諡冊)이나 표지석이 발굴되지 않아 5릉 중 어느 것이 소릉인지는 명확하지 않은 상태다.
북한은 2013년 개성지역 역사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지 3년 뒤인 2016년 무너져 내린 병풍석과 석축을 보완하는 등 소릉군의 무덤들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소릉으로 추정되는 ‘소릉군 1릉’은 매봉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기슭을 깎아 경사면에 4층 단으로 축조됐다.
제1단 중앙의 봉분은 정남향이며 지면 위에 기단석(基壇石)을 12각으로 깔아놓고 그 위에 병풍석(屛風石)을 둘렀다. 1954년과 1963년의 조사 당시 봉분의 높이는 3.3m, 직경은 10m였는데, 2000년대 조사 결과 봉분의 높이가 2.1m로 낮아졌다. 병풍석의 면석에는 12지신상(支神像)이 조각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모두 마모되어 현재 확인이 불가능하다. 봉분 뒤로 돌담(曲墻)을 돌렸는데, 그때 쌓았던 돌들이 남아 있다.
병풍석으로부터 50㎝ 밖으로 난간석(欄干石)을 12각으로 둘러세웠다. 난간 기둥은 10여 개가 남아 있다. 무덤 앞에 조선 후기에 세운 능비는 사라졌다. 봉분의 네 모서리에 석수(石獸)가 한 쌍씩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는 6개의 석수만 확인된다.
봉분 앞쪽에 장대석(長臺石)을 3단으로 축석하여 제2단과 구분하였는데 높이는 1.30m 정도다. 제1단 석축 가운데에 2열로 계단을 배열하였다. 3단에서 2단으로 올라오게 계단도 설치돼 있다.
제2단에는 동서 양쪽 9.8m를 사이에 두고 문인석(文人石) 한 쌍이 마주 보고 서 있다. 문인석은 양관(梁冠)을 쓰고 조복(朝服)을 입고 양손을 앞으로 모아 홀을 쥐고 있으며 대체로 두루뭉술한 편이다. 높이는 1.8m 정도다.
제3단의 동서 양쪽에는 제2단의 문인석과 일직선 위에 한 쌍의 문인석이 마주 보고 서 있다. 동쪽의 문인석은 머리 부분이 파손돼 있다. 이들 문인석 또한 2단의 문인석과 마찬가지 형태이며, 조각 수법은 정교하지 않은 편이다.
제3단에는 원래 장명등(長明燈, 능묘 앞에 설치한 석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2단으로 옮겨 놓은 지붕돌(옥개석)만 확인되고, 하부는 땅속에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제4단에는 정자각(丁字閣) 터가 확인된다.
2019년 가을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소릉군 1릉은 외관상 3년 전에 재정비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학계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무덤 칸(묘실)의 길이는 3.42m, 동서의 너비 2.86m, 높이는 2.37m이다. 남쪽으로 너비 1.7m의 문을 냈는데, 한 장의 큰 판석으로 막았다. 무덤 칸의 중심에는 관대가 있는데, 길이는 2.7m, 너비 1.3m이다.
무덤 칸의 북벽에는 벽화를 그린 것이 확인됐다. 벽화는 바닥에서 약 1m 높이에 12지신상을 그렸는데, 조복을 입고 홀을 쥐었으며, 머리에 쓴 관 모습이다. 천정에 붉은색으로 별자리를 표시해 놓은 것도 확인됐다고 한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무덤 칸 안에 말안장 같은 것이 있었다고 하는데,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발굴했을 때 무덤 안에는 아무런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무덤 칸에 2개의 도굴 구멍이 나 있었고, 도굴 때 들어간 구멍이 남쪽 문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모두 도굴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일제강점기 때 세 차례 도굴이 이뤄졌다고 판단한다.
‘소릉군 제2릉’(보존유적 제563호)은 제1릉에서 1km 남동쪽으로 떨어져 있고, 봉분 앞에 서 있는 2개의 망주석(높이 2.3m)이 인상적이고, 4개의 문인석이 남아 있다. ‘소릉군 제3릉’(보존유적 제564호)은 제2릉에서 북동쪽으로 20m 정도 떨어져 있는데, 5개의 무덤 중 가장 훼손이 심한 상태다. 봉분 네 모서리에 2개씩 있던 석수는 현재 3개밖에 남아 있지 않고, 문인석은 2개가 남아 있다.
‘소릉군 제4릉’(보존유적 제565호)은 제3릉에서 동쪽으로 약 200m 떨어져 있으며, 병풍석은 묻혀 보이지 않고 문인석이 4개 남아 있다. ‘소릉군 제5릉’(보존유적 제566호)은 제4릉에서 북동쪽으로 500m 정도 위쪽에 있으며, 병풍석, 망주석, 석축 등이 잘 남아 있다.
북한에서는 소릉군 제2릉-5릉을 무덤 주인공을 알 수 없지만 고려 시기 왕이나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고려 제24대 임금인 원종(1219~1274년)은 고종의 맏아들로 이름은 왕식(王植)이다. 1235년(고종 22) 태자에 책봉되고, 1259년 강화를 청하기 위해 표(表)를 가지고 몽골에 갔다. 고종이 죽자 1260년 귀국해 즉위했다. 그는 태자를 몽골에 보내는 등 몽골에 성의를 표명해 원활하게 국교를 수립하고자 했다.
배중손(裵仲孫)을 중심으로 삼별초(三別抄)가 항전을 선포하고, 3년간 대몽 항전을 벌인 것도 원종 때의 일이다. 삼별초의 대몽항쟁이 진압된 뒤 1274년 원나라의 매빙사(媒聘使)가 남편이 없는 부녀자 140명을 요구하자 결혼도감(結婚都監)을 설치하고 민간의 독녀(獨女)와 역적의 처, 종의 딸 등을 보내니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고 한다.
원나라의 간섭과 무신정권 사이에 끼어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한 원종이지만 그가 묻힌 소릉은 송악산과 매봉산 사이에 높은 지대에 만들어져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았던 탓에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종의 조부인 고려 22대 강종(康宗, 재위:1211~1213)의 무덤인 후릉(厚陵)은 개풍군 현화리(현재 개성시 용흥동)에 있는 것으로 전해지지만 현재 위치를 알 수 없다. 부왕(父王)인 23대 고종(高宗, 재위 1213∼1259)의 무덤인 홍릉(洪陵)은 현재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에 남아 있다.
원종의 왕비 순경태후((順敬太后)의 무덤인 가릉(嘉陵)도 현재 강화도(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남아 있다. 그는 태자 시절 원종과 결혼했고, 고종 31년(1244)경 원종보다 먼저 사망한 뒤 이곳에 장례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부서져 없어졌고, 봉분도 무너진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보수했다.
몽골 침입으로 강화도에 천도했던 고려의 시련이 사후에도 개성과 강화에 따로 능이 조성돼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것이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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