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같은 시궁창, 모니터 뒤 무감각을 겨누다

2020. 4. 10.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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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건즈 아킴보>
키보드 앞에서만 '센 척' 댓글러
양손에 권총 이식당한 채 던져진
안 죽이면 내가 죽는 살상게임
뷔페 같은 액션 시각효과 대잔치
"인간성의 최악, 인터넷의 열광"
초연결에 갇힌 애처로운 자화상
가위손이 아닌 권총손이 된 주인공 마일스(대니얼 래드클리프)는 초정밀 타격술을 가진 게임 최고의 플레이어이자 대량 살상 킬러와 맞대결을 벌여야 하는 처지에 졸지에 몰린다.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아이엠디비(IMDb)

<건즈 아킴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단연, 서른 줄에 접어든 대니얼 래드클리프의 주연작인데다 <해리 포터> 시리즈 이후 그의 가장 본격적인 액션 영화라는 점이겠다. 또한 같은 오스트레일리아 태생인 마고 로비와 종종 혼동되곤 하는 서마라 위빙이, 다크서클 짙게 드리운 분장으로 자동소총을 곡괭이 자루인 듯 어깨에 걸쳐 멘 대량 살상 킬러의 형국으로 등장함으로써 마고 로비의 ‘할리퀸’을 다분히 떠올리게 하여, 혼동을 그녀 스스로 조장하는 건 설마 아니겠고, 뭐지 이건, 싶어 다시 한번 눈을 돌리게 되는 <건즈 아킴보>.

아무튼 쌍권총을 앞세운 채 사자후를 토하는 래드클리프의 모습을 원색과 형광색으로 강조한 포스터 이미지만 보더라도 영화가 뭔가 똘기 가미된 코미디 영화의 형국일 것임은 충분히 짐작 가능한바, 이런 밀폐용기스러운 시기에 속 시원한 액션물 하나 보는 것도 기분전환에 도움이 되겠다 싶은 생각 품으실 독자 여러분을 위한 감별을 시행한다.

일단 영화의 기초 설정을 소개해 올리면 다음과 같다. 주인공 마일스(대니얼 래드클리프)는 게임회사의 프로그래머로서 매사에 웬만하면 접고 들어가는 순하고 바른 생활을 지향하는 인물이다. 에프(f) 단어들을 좀 자주 쓰는 것 빼고는 그다지 화려액션할 일 없을 것 같은 그는, 그러나, 키보드 앞에만 앉으면 뼈와 살과 피가 튀는 댓글 능력을 보이는 키보드 앞 거인이다. 우리 현실 속 수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_________ 댓글 사냥의 구린내

그런데 그 이름부터 참으로 직설적인 ‘슈래프널 시티’(산탄총알파편 도시)라는 이름의 가상도시에서는 그 지명에 걸맞게도 ‘스키즘’이라는 이름의 실제 살상게임이 한창 창궐 중이다. 죽이면 승, 죽으면 패,라는 구구단 1단스러운 규칙을 두고 벌어지는 이 게임을 지켜보던 마일스는 술김에 분기탱천하여 갑자기 이 게임에 열광하는 자들을 향해 독기 어린 댓글을 살포하고, 이 게임을 기획·제작·중계해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던 릭터(네드 데니히)라는 이 영화의 수석 나쁜 놈은 이에 격분, 마일스를 스키즘 게임의 다음 주인공으로 모시기로 결정한다. 어떻게? 그의 집에 난입하여 납치 후, 그의 양손에 권총을 외과 수술적으로 고정시킴으로써.

하여 가위손 아닌 권총손이 된 마일스는, 혈혈단신으로 십수명의 상대들을 일거에 살상하는 초정밀 타격술을 보유한 게임 최고의 플레이어이자 스타인 닉스(서마라 위빙)와 맞대결을 벌여야 하는 처지에 졸지에 몰리게 된다.

자, 이 정도의 기초 설정이 가장 먼저 기대하게 하는 흥미 포인트는 ①게임과 현실이 짬뽕져 어우러지는 상황 설정을 통해 엿보는, 이른바 ‘사이버펑크’라 하는 인간 의식의 작동 방식에 대한 일 고찰(더 바란다면 통찰)일 것이다. 익히 잘 아시다시피 이는 50년이 넘도록 지금까지 수많은 소설과 영화들이 파고들어온 테마인데, 이 영화에서 그런 걸 기대하시면 가장 먼저 탈락.

뭐, 꼭 이 영화가 시각효과 분야에 몸담아온 인물(제이슨 레이 하우든. 그의 경력은 <호빗> 시리즈 등 많은 부분 영화 후반작업 회사 ‘파크 로드 포스트’와 웨타 디지털에서의 작업이 차지하고 있다)이 각본과 감독을 맡은 영화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시각효과 전문가가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을 보이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그의 전작이자 장편 데뷔작인 <데스가즘>(그렇다. 이 제목에서 ‘가즘’은 ‘오르가즘’의 그 ‘가즘’이다)이 헤비메탈 또는 데스메탈이라는 나름 흥미로운 소재로 출발하여 회전초밥마냥 그칠 새 없이 사지절단 정육점형 공포물의 전통을 충실히 따랐던 것을 떠올려본다면, 엄청난 이변이 있지 않은 한 이런 기대가 충족되기 어려울 것임을 짐작하시긴 어렵지 않겠다.

영화는 살상게임 장면이 등장할 때마다 이를 관람하는 관객들을 보여준다. 물론 그 화면 양쪽으로는 그들이 올리는 비릿하고도 구릿한 댓글도 함께 곁들여져 있다. 영화 데이터베이스 누리집 아이엠디비(IMDb)

하지만 현실의 속도가 상상력을 우습게 앞질러가곤 하는 요즘, 그런 본격 사이버펑크적 접근보다는 오히려 ②에스엔에스(SNS)가 인간 존재를 지배하다 못해 아예 대체해가려는 듯 보이는 작금의 과잉 연결 상황에 대한 뼈 있는 풍자와 비판을 기대할 수 있겠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는 “(스키즘 게임은) 인간성의 최악을 보여줬고, 당연히 인터넷은 열광했다”는 대사로도 엿볼 수 있듯, 이러한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영화는 마일스와 닉스의 대결(이라기보다는 닉스의 마일스 사냥)을 비롯, 스키즘 게임 장면이 등장할 때마다 이를 관람하는 관객들을 보여준다. 물론 그 화면 양쪽으로는 그들이 올리는 비릿하고도 구릿한 댓글도 함께 곁들여져 있다.

하지만 ‘모니터 뒤 구경꾼들에게 사람은 생명체가 아닌 하나의 캐릭터에 불과하고, 하여 그들은 남의 고통이나 죽음 같은 것에는 전혀 무감각하다’라는 이 영화의 비판 포인트는 조금도 새롭지 않은 관찰이다. 특히 요즘 n번방 성착취 사건 같은 일들을 영화도 아닌 현실로 겪고 있는 우리에게 이 풍자 포인트와 관련된 조크들은 오히려 순진해 보이기까지 한다.

______________ 역대급 영상 기교, 그런데 감흥은…

더구나 이 영화의 현실 풍자는 일종의 누워서 침 뱉기 형국으로까지 흐르고 있다. 초반, 닉스가 ‘무적의 살상머신’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차량 총격 액션을 필두로, 영화는 각종 슈팅 아크로바틱과 킬링 아트를 쉼 없이 제공한다. 행여 총알로 튀는 피(와 걸쭉한 피 색깔의 무언가)만으로는 따분하지 않으실까 하는 듯 후반에서는 칼, 망치 등으로 무기를 다양화하고, 그로 인한 부상·사망 방식의 다변화를 꾀한다. 그 ‘하드고어 액션’을 얹은 접시가, 이 영화가 풍자하고 비판하는 바로 그것인 ‘무감각’임은 물론이다.(이 영화의 미국 개봉 직전에 감독은, 한 인터넷 영화 매체의 편집자를 ‘자살 암시’ 상태까지 몰고 간 에스엔에스 댓글 폭력을 비난하며, 그 댓글 폭력을 가했다고 여긴 사람들을 역으로 댓글 폭행(에 준하는 비난)해 논란을 불렀는데, 그 사건과 이 영화의 풍자가 보여주는 ‘자기 꼬리를 먹는 뱀’스러운 형국은 묘하게 겹쳐진다)

아, 됐고.

이런 ‘카인드 오브’ 영화에 깊은 통찰이니 예리한 현실 비판 같은 걸 논하는 것 자체가 반칙이다, 이 영화에 그런 거 바라는 사람 없다, 그냥 ③재밌고 시원시원한 액션이면 됐지,라는 반론도 충분히 가능하다. 맞다. 관객들은 대개 이 영화에서, 예컨대 <킥 애스>나 <데드풀> 풍의 기발하고도 코믹한 액션히어로 카툰무비를 기대할 것이고 그러한 기대는 지극히 정당하다.

일단 시각적인 면에서 이 영화는 상하좌우 ‘요롤피치’(yaw, roll, pitch) 모두 섭렵하며 거의 모란봉곡예단과 자웅을 겨루는 카메라 아크로바틱, 그리고 초당 프레임 세 자리 단위로까지 육박하지 않나 싶은 고속촬영(슬로모션)과 마이크로 세컨드 단위로까지 넘어가는 빠른 편집 등등으로, 과연 시각효과 전문가 감독의 영화다운 면모를 1000% 이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래드클리프가 인터뷰에서 ‘가슴에 자이로스코프 발신장치를 단 뒤, 자신이 구르는 그대로 똑같이 구르던 공 모양 케이지에 장착된 카메라’를 본 희한한 경험에 대해 언급했을 만큼, 이 영화가 선보이는 ‘어디 맛 좀 봐라’ 풍의 카메라워크는 화려함과 자유도 면에서 확실히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시각효과·카메라워크 진열장은 아닌 마당에, 이러한 시각적 화려함이 적절한 이야기와 상황과 리듬 위에 얹히지 못한다면 그것은 소기의 폭발력을 확보하지 못한 채 그저 카메라 체조선수권 대회에 그치기 마련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감독은 전작에서의 실수, 즉 자신의 가장 큰 특장점인 시각효과 전문가로서 능력 및 덕후적 취향 및 애정을 상영시간 내내 무제한 뷔페마냥 쏟아부음으로써, 영화적 리듬을 뭉개버리는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좀 더 증폭된 형태로 말이다.

기타 연주적 비유로 말하자면, 이것은 누가누가 더 희한한 양손 태핑 테크닉을 개발하고 누가누가 더 빠른 광속 속주를 할 수 있는가 하는 기교기교 대잔치에 골몰한 나머지, 자신이 모든 것에 앞서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해버린 헤비메탈 말기의 속주 기타리스트들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래. 신기하고 놀랍긴 한데,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뭐, 이는 업계 관계자들(혹시 마블 관계자들?)을 향해 목청 다해 외치는 감독의 메시지일지도 모르겠으나, 관객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남기지 못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_____________ 스턴트가 돼버린 일상이여

하여 이 영화에서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 만한 것은 결국, 돌연 양손에 권총을 이식당한 상황으로 발생하는 ④대니얼 래드클리프의 온몸 날린 몸개그 정도겠다. 속세에 내려와서 콩알 하나 입에 넣고 침대에 몸을 누이는 데도 진땀을 빼던 <가위손>의 에드워드마냥, 옷 갈아입기, 폰 집어들고 걸기, 문고리 돌리기, 소변 보기 등등의 일상생활 모든 일이 스턴트가 되어버린 마일스의 모습은, 어딘지 애틋함 섞인 래드클리프의 연기 덕분에 공허한 슬랩스틱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애틋함은 어쩌면, 평소 자신을 액션히어로 풍의 배우라고 생각하기 어려웠지만, ‘싸우기보단 도망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되는 액션히어로’라는 이 영화의 설정에 끌려서 출연을 결정했다는 그의 언급 때문에 더 절절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르는 사이에 시작되어버린 도배질이니 악플이니 에스엔에스 중독이니 왕따니 하는 것들을 거쳐 어느덧 엔(n)번방이니 하는 시궁창까지 와버린,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초연결’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 같은, 그 애처로운 슬랩스틱 때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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