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내려놓은 '에이스'의 무게, 듀얼 가드의 미래, 광신방송예술고 김재현

손동환 2020. 4. 3.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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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켓코리아 = 김준희 기자] 고등학교 1학년, 열일곱의 청춘. 입학과 동시에 ‘에이스’라는 수식어를 단 소년이 있었다. 묵직한 책임감이 그의 몸을 짓눌렀고, 결국 탈이 났다. 뜻하지 않은 휴식에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 후 2년, 잠시 멈췄던 그의 농구 시계가 다시 달릴 준비를 마쳤다. ‘에이스’가 아닌, 코트 위 5명 중 1명의 선수가 되고 싶다는 김재현. <바스켓코리아>에서 듀얼가드 유망주인 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의 김재현을 만났다.

※ 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월호에 게재됐습니다.

2017년 8월 삼천포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한국중고농구 주말리그 왕중왕전 사천대회.
남자고등부 예선 광신정보산업고등학교(현 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와 무룡고등학교의 경기가 열렸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무룡고는 강팀으로 유력한 4강 후보였다. 예선을 무난히 통과할 것으로 보였다.
광신정산고가 일을 냈다. 맹렬한 기세로 무룡고의 기를 꺾었다. 75-73, 2점 차 신승을 거두고 예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당시 선봉에 섰던 선수는 놀랍게도 신입생 김재현(190cm, G)이었다. 그날 경기에서 김재현은 20점 20리바운드 6어시스트 3스틸로 맹활약했다.
농구 관계자들에게 ‘김재현’이라는 이름 석 자를 아로새기는 순간이었다. 작지 않은 신장에 스피드와 외곽슛까지 갖춘 그는 점차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다.
그렇게 김재현은 1학년임에도 불구, 팀의 에이스로 한 해 동안 활약했다. 한 학년 올라선 2018년 2월엔 U-16 대표팀에 발탁, 태극 마크를 달고 국제 무대를 누비기도 했다.
탄탄대로일 것 같던 그의 농구 인생은 아쉽게도 2018년 초에 멈춰있다. 2018년 연맹회장기 대회를 앞두고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당했기 때문.
김재현은 2년 동안 재활에 매진했다. 원래대로라면 올해 대학 혹은 프로를 가야 했지만, 그는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를 결심했다. 그리고 올해, 다시 시작될 농구 인생을 묵묵히 준비하고 있다.
지난 2020년 1월 28일 저녁, 서울시 관악구에 위치한 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를 찾았다. 김재현은 이날도 어김없이 재활 훈련을 다녀왔다. 저녁 식사까지 마친 뒤, 기자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자기 소개를 해달라’는 말에 김재현은 “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 3학년 김재현입니다”라는 말로 인사를 건넸다.
차근차근 그의 농구 인생을 돌아보기로 했다.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어릴 때, 초등학교 6학년 때쯤? 당시 동부 프로미 유소년 클럽(주니어 프로미)에서 농구를 시작했어요. 그러다 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농구 선수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것 같아요. 당시 서울에 계셨던 하상윤 선생님께서 오셔서 ‘농구 할 생각 없냐’고 하셔서 그때부터 농구를 시작하게 됐죠.”
더 근본적인 계기가 궁금해졌다. 유소년 클럽도 결국 농구에 관심이 있어야 가는 것 아니겠나.
김재현은 “농구 보는 걸 되게 좋아했어요. 지금 DB가 동부였을 때, 윤호영 선수를 비롯해서 표명일 코치님, 이세범 코치님이 선수로 계실 때 경기를 진짜 많이 봤어요. 진짜 팬이었죠. 아기 때부터 봤으니까요. 그 때부터 꿈을 키우게 된 것 같아요. 처음 본 게 7살 정도였던 것 같아요. 집이 원주고, 부모님께서도 농구를 좋아하시다 보니 농구장을 많이 다닌 것 같아요”라고 농구에 ‘입덕’하게 된 계기를 말했다.
그렇게 그는 주니어 프로미 생활 이후 광신중학교로 진학해 본격적으로 ‘농구 선수’의 길을 걷게 됐다.
클럽 농구와 엘리트 농구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운동을 전문적으로 시작하게 되는 순간이다.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김재현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힘들었어요. 중학교 땐 정말 힘들었던 기억 밖에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내 “힘들었지만,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농구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중간에 힘들어서 그만두지 않았을까요?”라며 오로지 농구에 대한 열정 하나로 이겨낸 당시를 돌아봤다.
당시도 작지 않았던 신장을 지닌 김재현은 선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더욱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학년 때 172cm 정도였던 키는 중학교를 마칠 때쯤 184cm까지 커졌다.
신장이 꽤 있었음에도 불구, 그의 농구 인생 시작은 처음부터 가드였다.
“저는 무조건 가드였어요. 초등학교 땐 키가 크니까 포워드도 보고 했지만, 중학교 올라와선 무조건 가드만 봤던 것 같아요”
드문 일이다. 김재현은 “가드가 하고 싶기도 했고, 당시 코치님이셨던 하상윤 선생님과 생각이 맞았던 것 같아요”라고 돌아봤다. 선수 본인의 선택과 스승의 생각이 맞아떨어졌던 것.
이래저래 그의 농구 인생엔 ‘첫 스승’인 하상윤 코치가 많은 영향을 미친 듯했다. 김재현은 “기본기를 많이 배웠어요. 제가 유소년 농구교실에서 농구를 시작했다 보니, 구력이 짧았어요. 기본기를 많이 다졌고, 상황에 따른 플레이를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라고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그렇게 김재현은 광신중에서 3년을 보냈다. 1~2학년 때의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3학년 때는 주말리그 왕중왕전에서 준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등 결실도 맺었다. 당시 함께 했던 선수가 인헌고를 졸업한 이두호, 지난 해까지 같은 학교였던 민기남이었다.

광신중학교를 졸업한 후, 광신정보산업고등학교(현 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김재현은 “중학교랑 고등학교는 정말 많이 달랐던 것 같아요. 중학교 땐 기본기 운동을 많이 했다면, 고등학교 땐 체계적인 수비나 팀 운동을 많이 했죠”라고 ‘뽀시래기’였던 자신을 돌아봤다.
특히 ‘파워’의 차이를 많이 느꼈다고. “중학교 땐 왜소하고, 힘이 없었어요. 고등학교 땐 피지컬적으로 보완을 많이 했어요. 개인적으로 트레이닝도 하고, 몸 좋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운동도 많이 했죠. ‘뭐가 좋다’ 그러면 따라하기도 했고요” 김재현의 말이다.
고등학생이 쉽게 떠올리기 힘든 생각이다. 그렇게 그는 점차 몸을 키웠다. 수업에 참여한 뒤, 오후에 팀 운동을 마치면 바로 개인 운동을 했다. 따로 트레이닝도 받았다. 듣기만 해도 힘든 스케줄이다.
힘들게 운동한 덕을 본 걸까. 김재현은 신입생으로는 드물게 주전 자리를 바로 꿰찼다. 그는 “저는 아직도 ‘농구’ 하면 그 때 기억밖에 없어요. 그게 마지막이에요. 2년째 거기 머물러있죠”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 “운 좋게 주전으로 뛸 수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그땐 1학년이니까 매 경기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뿐이었어요. 근데 경기 끝나고 나면, 기록이 좋게 나와있더라고요(웃음). 그 때 같이 뛰었던 선수가 김종호(동국대) 형, 이준호(서울대) 형 등이에요. 주로 (김)종호 형이랑 쌍포로 활약했던 것 같아요. 1학년이랑 하다 보니, (김)종호 형이 많이 힘들었을 거에요. 저한테 많이 맞춰줬죠”라며 웃었다.
그렇게 브레이크 없이 쾌속 질주하던 그의 농구 인생에 위기가 닥쳤다. U-16 대표팀에 다녀온 이후 경기 도중 부상을 입은 것. 그것도 작은 부상이 아닌,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이었다. 김재현은 당시 상황에 대해 “다치는 순간, 딱 느낌이 왔죠. 크게 다쳤구나…”라고 표현했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무엇보다 힘든 건 정신적인 부분이다. 앞으로의 선수 생활이 걱정될 수밖에 없는 순간.
“힘들었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다른 친구들이 활약하는 걸 보면서 ‘나도 잘할 수 있는데, 저만큼 할 수 있는데…’라는 생각에 괴로웠죠. 경기를 보고, 친구들을 지켜보는 게 너무 힘들었던 것 같아요.”
말로만 들어도 그가 느꼈던 괴로움을 상상할 수 있었다. ‘어떻게 극복했느냐’는 말에 그는 “한 3~4개월 지나면서 괜찮아졌던 것 같아요. 처음엔 우울했는데, 점점 회복하면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많이 놀았죠. 재활할 땐 열심히 하고요. 그래서 잘 극복했던 것 같아요”라고 했다.
맛있는 걸 먹고, 놀고…. 어찌 보면 평범한 학생들의 일상이지만, 그에게는 그게 더할 나위 없는 ‘힐링 캠프’였던 것 같다.
그렇게 그는 재활에 몰두했다. 기왕 쉬는 것, 완벽하게 몸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흘렀다. 김재현은 “지금은 한 7~80% 정도 된 것 같아요. 앞으로 조금씩 팀 훈련 소화하면서 몸을 끌어올릴 계획이에요. 3개월 정도면 정상 컨디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라고 재활 경과를 설명했다.
그는 얼마 전, 또 하나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했다. 대학 진학 혹은 프로 진출을 포기하고, 1년 유급하기로 한 것. 2~3학년에 걸쳐 보여준 것이 없기에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분명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김재현은 “부모님께서 신중하시기도 하지만, 제게 내색을 안 하시는 편이에요. 항상 그랬듯이 웃으면서 ‘그게(유급하는 게) 더 좋은 것 같으니까 그렇게 하자’고 하셨고, 저도 알겠다고 했죠”라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이제 그는 2018년에 멈췄던 농구 시계를 다시 돌릴 준비를 마쳐가고 있다.
“농구를 오래 한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오면서 혼자 힘을 많이 썼던 것 같아요. ‘에이스’라는 수식어 때문에 조급함과 과부하가 왔고, 그러면서 부상을 겪은 것 같아요. 이제는 마음을 내려놓고, 천천히 다시 끌어올리려고요. 혼자 하는 농구가 아니라, 5명 다 같이 하는 재밌는 농구를 하고 싶어요. 팀이 이기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제 자신보다는, 팀이 이기는 농구를 배우고 싶어요.”

인터뷰가 슬슬 마무리돼갈 때쯤, 슬쩍 자기 자랑을 부탁했다. 그는 ‘김민구’를 롤 모델로 꼽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는 1, 2번을 같이 보는 듀얼 가드에요. 개인적으로는 DB 김민구 선수가 롤 모델이에요. 그런 스타일의 농구를 구사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슛 터치나, 상대를 속이는 페이크, 유연성이 좋은 것 같아요. 대학 때 플레이도 그렇고, 항상 닮고 싶은 선수에요. 특히 큰 부상을 겪고도 그런 플레이를 하는 걸 보고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김재현은 빠르면 오는 5월부터 정상적으로 경기에 투입될 예정이다. 그는 “말이 아닌 코트에서 플레이로 보여드리고 싶어요. 최선을 다하고, 제 목표와 역할이 있으니까 거기에 충실하면 빛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조급해하지 않고, 인내심 가지고 재활 잘 마쳐서 코트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각오를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그는 힘들고 지칠 때 자신을 뒷바라지해준 가족들과 친구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항상 뒷바라지해주시는 부모님께 정말 감사해요. 그리고 힘들 때나, 슬플 때나 같이 웃어주고 옆에서 위로해주는 친구들에게 고마워요. 지금은 서로 다른 무대에 있지만, 그 친구들이 위로도 많이 해주고 얘기를 들어주다 보니까 덕분에 이렇게 열심히 재활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조만간 따라갈 테니, 다들 다치지 말고 성장한 모습으로 만났으면 좋겠어요.”
어린 선수였지만, 그의 말에는 자신만의 확고한 가치관이 존재했다. 시원시원한 답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인터뷰를 마친 뒤, 체육관을 나오면서 왠지 모를 흐뭇함과 든든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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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김준희 기자

손동환 sdh2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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