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쉰들러' 현봉학 박사의 자유·민족애 계승해야" [나의 삶 나의 길]
2014년 개봉해 14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국제시장’ 도입부에는 미 10군단 청년 통역관이 흥남부두에 모인 피란민 철수를 미군 장군에게 간청하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이 영화 속 실제 인물이 현봉학 박사(1922∼2007)다. 1950년 12월 23일 중공군에 쫓기는 피란민 10만명을 자유의 품에 안긴 이른바 ‘한국판 쉰들러’로 불리는 전쟁영웅이다. 미국 유학 시절 우연히 현 박사를 만난 후 그의 삶에 매료돼 인생 후반을 그를 선양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는 이가 (사)현봉학박사기념사업회 한승경(65) 이사장이다. 피부과 의사, 특히 백반증 권위자인 그가 현 박사의 삶에 푹 빠져 활동하는 것이 이채롭다. 주변에선 그를 “시도 때도 없이 현 박사의 업적과 정신을 자랑하는 ‘현봉학 마니아’”라고 한다. 한 이사장은 “젊은 시절 알게 된 박사님의 삶을 통해 국가와 민족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됐다”며 “박사님의 삶이 내 인생의 나침반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요즘 젊은이들이 박사님의 삶을 배워 제2, 제3의 현봉학을 나오게 하는 것이 기념사업회의 목적”이라고 강조한다.
“현 박사님을 선양하는 기념사업회 일도 하면서 피부과 의사이니 환자를 본다. 요즘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해 환자들에게 약을 충분히 지어주고 자주 오지 말라고 당부한다. 코로나19 사태가 빨리 종식돼야 할 텐데 걱정이다. 모교 연세대 의대 총동창회장을 맡고 있어 동문 의사들이 대구 현지 의료지원을 나가는데, 이를 뒤에서 돕는 일을 하며 지낸다. 수많은 의사들이 대구로 향하는 것을 보면 감동적이다. 제 눈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6·25전쟁 당시의 현 선생 같아 보인다.”
―현 박사는 어떤 분이고, 기념사업회는 무슨 일을 하나.
“1994년 미국 토머스 제퍼슨 의대 피부과에서 연수했다. 그곳에서 박사님을 처음 만났다. 당시 이 대학에서 공부하던 숙모 소개로 만났다. 처음엔 박사님이 어떤 분인지 몰랐다. 이후 여러 차례 뵈면서 흥남철수작전 얘기를 듣고 감동했다. 제 부모님도 흥남철수작전 때 북에서 피란을 왔기 때문에 박사님에 대한 각별한 존경심을 갖게 됐다. 많은 얘기를 해주셨다. 배에서 거제로 탈출하는 사흘간 피란민들은 선박 구석뿐 아니라 차량 밑 장갑차 위를 가득 메웠다고 한다. 공간이 협소해 앉는 것은 고사하고 선 채 사흘간 버틴 이가 많았다. 먹거리도 부족한 데다 기본적인 생리도 해결하지 못한 채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견뎌냈다. 거제에 도착하기까지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다. 그중 1만여명이 탄 빅토리아호에선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다, 미군은 그들에게도 김치 1, 2, 3, 4, 5호로 명명했다. 극한 환경에서도 태어난 새 생명들은 피란민에게 새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게 했다. 이들은 24일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피란민으로 가득해 부산에 내리지 못하고 25일 거제에 도착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린다.”
―박사님은 자신의 얘기를 잘 하지 않았다고 저서에 밝혔는데.
“박사님은 자신의 공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당신을 ‘한국의 쉰들러’라 부르는 이들에게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것도 아니다”라며 늘 손사래를 쳤다. 파란민들의 자유를 찾는 데 도움을 준 것이 결과적으로 이들을 이산가족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셨다. 피란민 중에는 월남 후에 낯선 땅에서 어려움을 겪은 이들도 많았다. 심지어 배를 탄 것을 후회하는 사람도 있었다. 많은 사람을 원치 않게 이산가족을 만들었다는 생각을 주변에 가끔 말씀하셨다.”
―철수작전 공로뿐 아니라 업적이 많다. 병리학자로서 유명했는데.
“2016년 12월 서울 중구 연세대 세브란스 빌딩 앞에 박사님 동상 제막식을 했다. 영화 ‘국제시장’이 흥행하면서 박사님의 활약이 대중에 알려지고 동상 건립 여론이 조성됐다. 건립추진위 사무총장을 맡아 연세대 재단이사회, 서울시, 중구청 등과 오랜 기간 협의해 지금의 자리에 동상을 세웠다. 연세대 동문을 상대로 모금해 2억원을 만든 뒤 국가보훈처에서 5000만원을 지원받았다. 오광섭 작가의 제작으로 청년 모습의 동상을 건립했다. 동상에는 ‘자유와 인류애의 표상, 영원히 기억합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박사님에 대한 존경을 실천하는 증표다. 어려운 숙제를 끝낸 것 같아 보람이 작지 않다.”
― 흥남철수작전에 기여한 에드워드 포니 대령도 발굴 소개해 알리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6·25 당시 흥남철수작전에서 에드워드 포니((1909∼1965) 미 해병대 대령은 박사님을 도와 피란민을 구출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미군이다. 그 역시 당시 활약에 비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의 주 설계자였던 그는 포항 상륙 사전 당시 제1 기병사단의 하역과 상륙에 관한 계획을 준비하고 1만명이 넘는 병력과 2000대 넘는 차량을 포항에 상륙시켜 부산지역 방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사업회에서 박사님과 함께 포니 대령도 적극적으로 알리는 일을 해왔다. ‘은혜를 잊지 않는 대한민국’임을 보여 주고 싶었다. 국가보훈처에서 2019년 ‘12월 전쟁영웅’으로 선정하는 데 기여했다. 사업회 차원에서 그의 자녀 등 후손들과 자주 교류하며 기념사업회 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현봉학 마니아’ 이전에 피부과 의사, 특히 백반증 권위자로 유명한데.
“올해 12월 세 번째 주 화요일을 ‘현봉학의 날’로 지정·선포할 예정이다. 이날 국가보훈처와 연세대 등 관계 단체 등과 협의해 박사님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를 열 계획이다. ‘현봉학 봉사상’도 제정해 1회 수상자를 낼 계획이다. 요즘은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는 수많은 이들이 있다. 특히 감염자가 폭증한 대구로 달려가 구슬땀을 흘리며 환자를 돌보는 젊은 의사들이 대견하다. 이들이야말로 자랑스러운 박사님의 후배이자, ‘이 시대의 현봉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가 종료된 후 이들 중의 한 명을 선정해 시상하는 것도 생각 중이다. 당부하고 싶다. 우리 기념사업회는 문이 열려있다. 현 박사님의 정신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 특히 젊은이들은 언제든지 연락을 달라.”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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