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환의 은빛철학]고달픈 사회 "이익 아닌, 인의가 앞서야.."

2020. 3. 10.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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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환 헤럴드에듀 논설위원


올해는 이 땅의 삼천리 방방곡곡에 새벽종이 울려 퍼진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이후, 1950년대 어려운 시기에 인구 2000만 명, 국민소득 60달러이던 세계 최빈국의 대한민국이 지금은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3,346.3달러로 세계경제규모는 12위 OECD 회원국으로 우뚝 섰다.

그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궤변과 이설이 분분하지만 어쨌든 참으로 놀라운 발전이다. 그런데 더욱 괄목할 통계 수치가 두 가지 더 있다. OECD 국가 가운데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정상을 달리고 출산율은 밑바닥을 기고 있다.

노골적으로 풀이하면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고, 자식을 낳아 살아가게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들만큼’ 살아가기가 너무나 힘겹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남들처럼’ 2세를 키울 자신이 없어 아이를 가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한 국가의 인구 수가 국력 평가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정부는 ‘타국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런 두 가지 통계 수치에 ‘깊은 우려’를 표하며 자살 예방교육을 권장하고 각종 출산 장려책을 내놓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운영하는 지금의 행정과 교육 시스템 저변에 깔린 이데올로기가 그 방향을 선회하지 않는 한,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가치관에 일대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 모두 ‘언 발에 오줌 누기’와 같은 미봉책이 될 뿐이다. 국가의 부는 늘어나는데, 살기는 더욱 고달파진다.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기가 힘든 이유는 과거와 같은 보릿고개의 가난 때문도 아니고, 무기 소지가 자유로운 다른 어느 나라와 같이 폭력이 난무하기 때문도 아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줄 세우기, 무한경쟁, 적자생존, 우승열패’라는 밀림의 법칙이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는 이념의 탈을 쓰고 이 사회 전반에 무차별하게 파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공산권 붕괴 이후 국제적 금융질서를 서구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해 우리에게 강요된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운용 방식을, 우리 사회의 리더(Leader)들은 ‘만사형통의 여의주’로 착각하였는지, 교육과 행정 등 경제 외적인 분야까지 파급시키고 있다.

일제고사의 부활, 대학의 강의 평가, 학교별 수능 성적의 공개, 경찰 수사의 성과주의 등 온종일 긴장 속에서 ‘자신의 껍데기’를 ‘남들의 껍데기’와 비교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쉴 곳’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쉴 곳’이 없는 곳은 ‘살 만한 곳’일 수 없다. 목숨을 끊는 이가 늘어나고 아이를 낳으려고 하지 않는다. ‘남처럼 살 자신’이 없기에 결혼 연령이 늦어진다. 동료와 이웃과 친구조차 ‘이겨야 할 적’으로 변해 간다.

우리나라와 일본, 그리고 과거 서독의 공통점은 거대한 군사력을 주둔시킨 미국의 절대적 보호 아래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른 두 나라와 달리 이념의 대립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입은 독특한 피해는 ‘적색 공포증에 걸린 제도권 교육’으로 인해 사회과학적 통찰력을 키울 수 없었다는 점이다.

각 분야의 리더들은 ‘사회과학적 정신박약’으로 인해, ‘우리가 사는 바로 이곳의 문제’를 직시할 능력이 없고, 분석해 봐도 자신감이 없다. 거금을 들여 소위 ‘외국의 석학’들을 초청하여, ‘자기들이 사는 곳’에 대한 ‘이방인(異邦人)들의 통찰’을 경청한다. 우리 아이들을 우리 대학에서 선발하는데 외국에서 모셔온 ‘입시사정관’에게 그 모두를 일임한다.

수입한 지식에 의해 온 나라가 운영된다. 결국은, 독학을 통해 현실분석 능력을 터득한 야인(野人) ‘미네르바’가 경제 예언자로 등극하자 이를 구속하는 3류 코미디가 벌어진다. 2008년 말의 금융대란 이후 현재 서구에서는 존폐의 기로에 있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이곳에서는 아직도 기승을 부리며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그 이유는 ‘수입한 지식’을 나라 운영의 지침으로 삼는 우리 사회 리더들의 ‘지식의 항구(港口)’에 ‘서구의 배[船]’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서구에서도 양심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서구 금융계의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경제정책’(Joseph Stiglitz) 또는 ‘국제적 자본주의의 재조직화를 위한 이론적 설계를 실현시키려는 유토피아적 프로젝트, 또는 자본축적의 조건들을 재건하고, 경제 엘리트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 프로젝트’(David Harvey)라고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그 고유 영역을 넘어 ‘명가의 보검’인 양 우리 사회의 온갖 분야에서 칼춤을 추고 있다.

레세페르(Laissez-faire). 자유방임주의를 의미하는 프랑스말로 ‘그냥 하게 해(Let do))’ 또는 ‘그냥 놔둬(let alone, let pass)!’라는 뜻이다. 과거의 역사를 돌이키면서 그 의미를 다시 새기면 “산업혁명과 함께 부상한 상업인의 경제활동에 정치권력이 간섭하지 말라”는 뜻이다.

실제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을 통해 자유방임적 경제운용의 우월성을 주장한 이후 유럽의 제 국가들은 일종의 보호무역정책인 중상주의(Mercantilism)를 버리고 자유방임적 경제운용에 들어간다.

상업 활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국가의 간섭을 최소로 하는 야경국가의 역할을 자임했던 것이다. 애덤 스미스에 의하면, 국부를 늘이는 원동력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해 운영되는 ‘자유시장의 요구’와 그런 요구에 부응하려는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selfishness and greed)’이며, 이로 인해 상품의 가격이 낮아지고 물품의 종류가 다양해짐으로써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에 이득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획일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미국의 시카고학파 경제학자들이 창안한 것이었지만, 그 기원은 이러한 애덤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적 경제이론에 있다.

그런데 애덤 스미스가 상(商)행위의 원동력이라고 간파했던 ‘이기심과 탐욕’은 인간의 동물적 속성일 뿐이다. 인간은 ‘이타심과 초탈(超脫)’이라는 종교적 심성 역시 갖는다. 상업정신과는 상반된 심성이다. 맹자의 양혜왕편 서두의 다음과 같은 일화에 비추어 보면, 지금의 우리 사회가 인간의 본성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양혜왕이 맹자에게 말했다. “어르신께서 천릿길을 마다 않고 오셨으니, 장차 우리나라를 이롭게 하실 방도가 있으시겠지요?”
그러자 맹자가 대답했다. “왕께서는 하필이면 이롭게 한다는 말씀을 하십니까? 오직 어짊과 의로움이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할까를 말씀하시면, 이 사회의 리더들은 어떻게 하면 내 집을 이롭게 할까 말하며, 일반 백성들은 어떻게 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까 말할 것이니 위와 아래가 서로 이익을 취하려고 하면 나라는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만승(萬乘)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천승의 가문이요, 천승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백승의 가문입니다. 만승에서 천승을 취하고, 천승에서 백승을 취한 것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건만, 만약 의로움을 뒤로 하고 이익을 앞세우면 모두 빼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어짊(仁)이나 의로움(義)이 아니라 이익(利)만을 중시할 경우, 결국 그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는, 이천삼백 년 전 맹자의 경고였다. 그러나 이익을 위한 무한 경쟁 속으로 교육과 행정의 모든 시스템을 개량(?)하고자 하는 우리 사회의 리더들에게는 이런 경고가 생뚱맞게 들릴지도 모른다.

 ‘국가 이익의 길’을 논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출간 이후, 제국주의 시대를 거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근 170년간, 맹자가 경고했던 그대로 서구 사회는 ‘이익을 위한 무한투쟁’의 격랑에 빠지면서 그 구성원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냉전이 시작되자 ‘자유방임적 자본주의’는, ‘사회주의권’을 의식하여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내걸고 잠시나마 비교적 선량한 행보를 보이게 된다.

그러나 지난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사회주의권이 몰락하면서 이념적 경쟁자가 사라지자 ‘상업지상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다시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였다. 현대판 레세페르인 신자유주의의 등장이다. 이기심과 탐욕, 그리고 이를 충족하기 위한 경쟁과, 그 결과로써 매겨지는 서열 등 ‘힘이 곧 진리’인 짐승의 사회가 운영되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종착지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적 밀림이다.

불가에서는 세상을 통찰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 연기법(緣起法)이란 것이 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다. 요샛말로 ‘의존성’이라고 풀이된다. 우리가 체험하는 세상만사는 원래 그러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존하여 발생한 것들이라는 가르침이다. 정서의 경우도 이는 마찬가지다.

절대빈곤의 상태나 극심한 질병을 앓는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가 느끼는 행복감과 불행감은 대부분 남과의 비교를 통해 발생한다. 연기(緣起)하는 것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에서 보듯이 잘난 남과 비교할 때 나의 불행감은 더욱 커진다. 절대빈곤에서 벗어난 지 오래인 우리 사회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기 힘겨워 하는 이유는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껍데기를 남들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경쟁하는 방식이 삶의 모든 영역을 오염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남과 비교한 후 질투하는 것이 인간의 못된 동물적 속성인데, 지금 우리 사회의 리더들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교육과 행정의 전 영역에까지, ‘신자유주의’ 방식을 획일적으로 도입하여 모든 국민을 지치게 만들고 있다. 서열을 만들 만한 것이라면 그를 모두 노출시켜 경쟁을 부추긴다. 인간이 살아가는 곳을 약육강식, 우승열패, 적자생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밀림과 같이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살 만한 곳이 되기 위해서는, 맹자가 권했듯이 물질적 이익이 아니라 어짊과 의로움과 같은 정신적 가치를 중하게 여기도록 제도와 가치관에 일대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권력과 금력의 대소에 의해 서열이 매겨지는 사회는 힘에 의해 서열이 매겨지는 짐승의 사회와 다를 게 없다. 최정상의 하나 이외에는 모두들 자신보다 상위에 있는 존재의 위세에 눌려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어짊과 의로움과 같은 반(反)동물적 가치에 의해 서열이 매겨지는 사회에서는 그 구성원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작금의 시대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전통적 신분 질서가 상공농사로 뒤바뀐 지 이미 오래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남용으로 우리 사회 곳곳이 밀림과 같이 변모하고 있는 지금, 경쟁과 비교의 채찍질에 지치고 힘겨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가 늘어만 가는 지금, 이런 고달픈 사회 속에 아이를 낳아 기르고자 하는 이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지금의 이 시대, 이 나라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분명하다. 지친 사람들을 보듬는 일, 그리고 가치관을 바로 세우는 일이 우선되어야 함을 명심하자.

rea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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