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양고기 곰탕과 아잔타 석굴

2020. 1. 18.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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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아잔타 석굴. 사진 작은미미 제공

두 달간 한국 출장을 마치고 인도로 복귀했다. 비행기에서 인도식 영어를 듣고 있노라니 고향 사투리를 듣는 것처럼 마음이 푸근해졌다. 그러나 그 푸근함은 9시간 뒤 델리 공항에 도착하는 즉시 온갖 짜증과 스트레스로 바뀌었다. 코를 찌르는 맵고 퀴퀴한 냄새와 시야가 채 50m도 안 되도록 자욱한 스모그, 지구 최악의 공기 질을 자랑하는 이곳에서 나는 마치 잠수하는 것처럼 숨을 참았다.

올해는 유독 더 심하다. 거기다가 춥기까지 하다. 120년 만에 한파란다. 대부분의 인도 집들은 40도를 웃도는 날씨 때문에 돌 바닥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겨울에는 더 쥐약이다. 수면 양말 위에 슬리퍼를 신어도 발가락이 시려서 오그라든다.

나 대신 두 달 동안 8살 어린이를 봐 준 부모님이 두툼한 파카를 입은 채 반겨주었다. 수족냉증 걸릴 거 같다고 징징대는 내 앞에 부모님은 양다리를 5시간 끓여 푹 익힌 양고기 곰탕을 내놓았다. 인도 정착 초기에 딱 한 번 양 갈비 요리에 도전한 적 있는데, 특유의 잡내를 잡지 못해서 주로 남이 해주는 양고기만 먹어온 터였다. 그래서 조금 겁이 났다. 홈 메이드 양고기 곰탕, 괜찮을까?

아이가 바이킹이 먹었을 법한 기세로 어른 팔뚝만 한 양다리를 하나 들고 뜯기 시작했다. 질세라 소금과 후추와 파를 왕창 뿌린 뒤 국물을 떠먹었다. 오? 이상하다. 입에 짝짝 붙는다. 소 곰탕과는 다른 감칠맛이 났다. 고기도 쫀득쫀득 흐물흐물 입안에서 녹았다. 어머니는 ‘봐라, 내가 하면 다 된다’는 듯한 뿌듯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뒤로 나는 끼니마다 양고기 곰탕을 퍼먹었다. 소 곰탕은 한 끼만 먹어도 물렸는데, 이건 질리지도 않았다.

양고기 곰탕과 함께할 때면 잠시 냉기를 잊을 수가 있었지만, 더욱 추워진 날씨 때문에 식구들의 기침이 심해졌다. 결국 따스한 곳으로 잠시 피난 가기로 했다. 아우랑가바드. 아잔타 석굴이 있는 인도의 중부 지방이었다. 아잔타 석굴은 우리나라 교과서에도 소개된 세계적인 유적지다. 앙코르와트가 돌을 하나씩 쌓아서 만든 거라면, 이곳은 거대한 돌산을 깎아 만든 것이다. 사람들은 돌이라는 단단한 것에 무한한 의미를 부여한다.

나는 석굴암의 인도 버전을 상상하며 비행기로 2시간, 차로 4시간 걸려 도착했다. 보자마자 압도당했다. 규모와 시간의 스케일 때문이었다. 기원전 2세기부터 7세기까지 무려 천년에 걸쳐 지어진 석굴 앞에 서니 당시 이곳을 누빈 승려들, 석공들, 화가들이 보이는 듯했다. 이후 이곳은 인도의 불교 탄압 때문에 또다시 천년 동안 잠들었다가 1819년 사자 사냥을 하러 숲 속 깊숙이 들어온 영국인 존 스미스에 의해 재발견이 되었다. 존 스미스는 기둥 하나에 자신의 사인을 아주 작게 새겨 넣었다. 관람객은 전등을 비춰보며 숨은 사인 찾기에 여념이 없다. 존 스미스는 역사 속의 또 다른 역사가 된 셈이다.

내가 두 번째로 압도당한 건 훼손의 스케일이었다. 아잔타 석굴은 우리나라의 석굴암보다 수십배 더 크지만, 보존 상태로만 보면 석굴암이 월등히 앞선다. 카메라 플래시가 금지되어 있지만, 인도 사람들은 개의치 않는다. 벽화에 예사로 손을 댄다. 심지어 사진 촬영을 막아놓은 불상 앞에서 가이드는 1달러를 내면 몰래 사진을 찍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높은 습도와 온도 때문에 색이 점점 바래가는 이천년 전의 벽화와 사람들이 자주 만져서 뭉툭해진 부조들이 안타깝기만 하다. 한데, 어머니는 지나가는 말로 말한다. “이렇게 그냥 흘러가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훼손되면 훼손되는 대로. 후손들이 만지면 만지는 대로.”

2019년의 마지막 날, 부모님은 귀국했다. 그날 아침, 아버지는 마트에서 양다리 2㎏을 사 왔다. 그동안 매일 아침 출근하다시피 해 정이 든 동네 마트 직원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오겠다고 했다. 부모님이 떠난 뒤 양고기 곰탕을 끓이기 시작했다. 끓이고 또 끓여서 골수가 하나도 남지 않은 양 뼈. 참으로 하얗고 매끈하다. 아이는 양 뼈들을 모아 공룡을 완성하겠다고 했다. 뼈를 보자 다시 아잔타 석굴이 떠올랐다. 뼈도 돌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영원한 건 없다. 결국엔 손안에서 사라져버린다. 욕심도 용심도 없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작은미미(미미 시스터즈 멤버·뮤지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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