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까지 명성을 떨치던 왕국..'창지개명'으로 일본의 일개 현으로 [주강현의 바다, 문명의 서사시]

주강현 2020. 1. 17. 16:3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ㆍ(14)류큐왕국인가, 오키나와인가

2019년 10월31일 화재로 전소된 오키나와 나하의 슈리성 본궁. 당시 화재로 왕궁의 정전, 남전, 북전 등 여섯동이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2006년 촬영한 사진.

지난해 늦 가을 화재로 잿더미가 된 오키나와의 슈리성을 찾았다

14세기 해상왕국 류쿠의 궁궐, 그들은 분명 일본인이 아니었다

독립 화폐도 사용했으나, 1609년 사쓰마번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래도 독립국의 명맥은 유지했고 일본풍속을 금하기도 했다

다만 경제적 착취는 막을 수 없었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슈리성에서 일본이면서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의 역사를 보았다

■잿더미로 변한 궁궐

해양문명사적으로 볼 때 ‘운명의 섬’은 여럿 있다. 극심한 주도권 쟁탈에 늘 휘말렸던 지중해의 시칠리아와 발트해의 고틀란드 그리고 영국의 오랜 식민 지배를 겪은 아일랜드, 미국에 병합된 하와이 등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소수민족의 터전에서 국민국가로 편입된 타이완과 홋카이도 그리고 독립 왕국 류큐에서 일본에 속하게 된 오늘의 오키나와가 그러하다. 이처럼 문명의 바닷길에는 행복과 부의 원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국과 예속의 관계망도 선명하게 놓여 있다.

오키나와 나하의 슈리성(首里城)을 10여년 만에 다시 찾았다. 참혹한 그 현장을 꼭 찾아보고 싶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슈리성 궁궐은 2019년 10월31일 화재로 전소됐다. 왕궁의 정전, 남전, 북전 등 4200㎡를 차지하던 여섯 개 동이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오키나와 사람에게는 우리의 경복궁이나 창덕궁 본궁이 탄 것에 비견되는 큰 비극이었다. 마침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이 12월로 예정돼 있어서 성이 아니라 ‘성터’로 지정되는 참담한 상황을 맞았다.

독립 왕국 류큐의 비운만큼이나 슈리성도 늘 비극에 휩싸였다. 슈리성은 1453, 1660, 1709, 1945년에 대규모 화재로 불길에 휩싸였으니 2019년까지 도합 다섯 차례다. 사라져간 독립 왕국 류큐의 비극과 비운을 암시하는 것일까.

건물은 14세기 말의 것으로 추정되며, 삼산시대 중산(中山) 왕조의 성으로 쓰였다. 삼산시대를 통일하고 류큐왕조를 세운 쇼하시(尙巴志) 왕은 왕국의 중심으로 슈리성을 세웠다. 그 후 류큐의 번영이 지속됐다. 잿더미로 변한 궁궐을 바라보면서, 해상왕국으로 번영을 구가하던 시절 이곳까지 드나들던 중국 배, 일본 배, 인도네시아 배 등 동아시아의 무역선과 사신을 떠올려보았다. 그 모든 것이 허망하게 무위로 돌아갔다.

■미지의 머나먼 섬

동중국해의 동쪽에 위치한 오키나와는 본디 독립 왕국 류큐가 있던 곳이다. 일본에서는 본토의 남서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이곳의 섬들을 난세이(南西)제도라고도 한다. 류큐제도는 규슈 남쪽 끝에서 타이완에 이르는 약 1300㎞ 해상에 활처럼 연결된 200개에 가까운 섬이다. 그중 약 3분의 1만이 사람이 사는 유인도다.

지도를 펼치면 중국 푸젠성에서 규슈 가고시마까지 ‘섬들의 체인’을 확인할 수 있다. 푸젠성과 타이완 사이에는 9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펑후제도가 펼쳐진다. 타이완에서 오키나와 본토까지 이시가키섬 등이 징검다리처럼 이어지고, 본토에서 가고시마까지는 아마미제도 등이 또다시 징검다리인 듯 이어진다.

액운을 쫓는 다는 오키나와의 수호신 ‘시사’.

오키나와 사람은 일본 사람과 그 계보가 다르다. 일부는 분명히 일본 본토에서 넘어왔을 것으로 여겨지나, 섬으로 연결된 타이완과 동남아시아에서도 넘어와 혼혈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문화적으로 중국과 일본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다. 최근 번역·소개된 류큐왕국의 시인들이 한어로 지은 <유구 한시선(琉球 漢詩選)>을 보면 중국, 일본, 조선, 베트남 그리고 류큐왕국이 동일 한자문화권에 속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기후와 토질 등의 환경이 문화를 만드는 면도 강하기 때문에 남방적 요소가 강할 수밖에 없다.

15세기 정화의 대항해시대를 이끈 책으로 평가되는 북송의 조여괄이 편찬한 지리서 <제번지(諸蕃誌)>에 등장하는 류큐국은 오늘날의 오키나와가 아니라 타이완이다. 류큐국은 취안저우(중국 푸젠성 중동부에 있는 도시) 동쪽에 있으며 배로 가면 5~6일 걸린다고 했다. <수서>와 <원서>에 모두 류큐가 등장한다. 명 초에도 타이완과 오늘의 류큐를 구분하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입장에서는 펑후제도를 중국 영토에 편입한 것이 1684년 강희제 때였다. 타이완으로 이른바 객주라는 이주민이 들이닥치기 시작한 것도 청 말이다. 중국의 타이완 경략은 오랜 시간을 두고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류큐는 그야말로 ‘머나먼 섬’이었을 것이다.

류큐가 번영하던 시절을 그린 그림.

15세기 초 류큐왕국은 일본, 중국, 조선, 루손(필리핀), 샴(태국) 등 주변의 아시아 국가와 적극적으로 교류했으며, 이때부터 그 존재가 유럽까지 알려지기 시작한다. 16세기 중반에는 중국, 일본, 남방의 삼각무역으로 이익을 챙기고 이를 바탕으로 문화가 크게 번성했다. 당시 무역선의 활동 범위는 아시아 전역에 걸쳤으며, 인도·아랍·아프리카를 통해 유럽까지 연결되는 말레이시아의 항구도시 믈라카에 이르기까지 교류했다.

류큐 슈리성 정전에 있는 종의 명문에는 ‘일본과 류큐는 순치 관계’라는 구절이 있다. 류큐는 일본에서 철기 같은 물자뿐 아니라 가나문자를 받아들였다. 류큐를 매개로 하여 명과 남방제국에는 일본의 도검·창·갑(甲) 등의 무기류가 수출됐고, 일본에는 남방에서 소목(蘇木)·단목(丹木)·침향·목향·상아 등이 수입됐다. 류큐의 고유 화폐인 하토메전(鳩目錢)이 주조돼 중국, 일본 화폐와 더불어 쓰였음은 그들 중개무역인에게 잉여가 발생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징표다.

전소된 슈리성 본궁. 오키나와 사람에게는 우리의 경복궁이 탄 것에 비견되는 비극이었다.

■일지양속의 시대

1609년 사쓰마번의 침입으로 해상왕국의 황금시대는 종지부를 찍는다. 일본이 류큐를 경제적 식민지로 얽어맨 시점은 임진왜란 직후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귀환한 사쓰마의 군대가 류큐를 들이친 것이다. 사쓰마는 한반도 남해안에 왜성을 쌓고 진군했는데, 임진왜란이 끝나자 가고시마로 귀환했다. 사쓰마는 유난히 사무라이의 비율이 높은 곳으로, 전쟁 귀환병이 많아지자 민심이 흉흉했다. 외부로 눈길을 돌리기 위해 번주는 류큐 출병을 결정한다.

일찍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출병하면서 류큐, 고아(Goa)의 인도 총독, 필리핀·고산국(高山國·타이완)에 서신을 보내 강경한 태도로 복종과 입공(入貢)을 요구했다. 막부가 성립되자 시마즈씨(島津氏)는 막부의 권위를 빌려 류큐에 6000명의 병력을 출병시켜 마침내 1609년 전 류큐제도를 정복한다. 가고시마 바로 밑의 아마미제도 역시 시마즈씨의 직할령으로 빼앗는다.

결국 류큐는 사쓰마번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그러나 류큐는 중국에 조공을 하던 상황이었다. 중국식 기미제도의 국제적 틀 내에서 류큐왕국을 에도막부가 정치적으로 병합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경제적 착취는 가능했다. 사쓰마번은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것으로 지배권을 강화했다. 중국에 대한 조공은 계속 이어졌다. 이로써 류큐왕국은 중국과 일본 모두에게 조공을 하는 신세가 됐다. 푸젠성을 넘어 펑후제도, 타이완 그리고 오키나와제도에서 가고시마까지 이어지는 섬들의 체인은 일본과 중국 두 나라의 약탈 대상이 됐다.

류큐는 실질적으로 시마즈씨의 속령이 된다. 사쓰마번이 침략을 단행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심각한 재정 위기에 처한 사쓰마번이 중개무역의 이익을 장악하려는 시도였다고도 한다. 비슷한 이유로 정벌을 막부가 허가한 가장 큰 이유는 류큐를 이용해 명나라와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으나 류큐 측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은 점에 있었다. 당시 막부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명과 단절됐으며 무역도 금지됐다. 모두 경제적 요인이 가장 큰 이유로 설명된다.

정복에 성공한 시마즈씨는 가고시마현의 요론섬(與論島) 이북을 직할 식민지로 삼고 남쪽의 류큐국은 중국과 조공 관계를 계속하게 하여 무역 이윤까지 흡수하고자 했다. 왕국으로서 명맥만 유지하게 둔 것이다. 시마즈씨는 류큐가 독립국인 양 형식을 강조했다. 류큐인이 일본 풍속을 따르는 것을 금지하고, 중국 사절이 올 때는 사쓰마 관리를 수도 나하에 피난시켰다. 반대로 장군이 바뀌어 경축 사절이 에도에 갈 경우에는 일부러 중국풍 옷을 입게 하고 사절 일행의 이름도 중국어로 부르게 하고 식사 예절까지 중국식을 강요했다. 이런 까닭에 일찍이 이 시대를 일지양속(一支兩屬) 시대라 부른다. 중국에 공물을 바치는 동시에 사쓰마에도 예속됐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책봉 관계는 의례적인 것을 포함했기 때문에 중국은 류큐를 정치적으로 지배하지 않았으며, 경제적으로도 착취하거나 수탈하지 않았다. 반면에 시마즈씨는 조공무역 관리권을 장악해 세금을 뜯어갔으며, 명주·상포(고급 마직물) 등 특산물을 부당 착취했다.

사쓰마가 류큐에서 주목한 특산품은 무엇보다 설탕이었다. 설탕은 중국, 일본, 조선 등 아시아 국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고부가가치 상품이었다. 설탕은 대부분 류큐왕국이 세금으로 거두어들였는데, 이를 사쓰마에 되파는 방법으로 넘겼다. 이러한 설탕 착취로 가장 고통을 받은 곳은 직할 식민지가 된 아마미제도의 농가였다.

설탕 수매는 18세기 초부터 시작됐는데, 18세기 말에는 아예 세금의 전부를 설탕으로 요구했다. 관리의 감시 속에 아예 노예처럼 사탕수수를 재배하게 하고 생산된 설탕의 전량을 헐값에 사들이는 정책을 취했다. 이 때문에 아마미제도에서는 논이 모두 사탕수수밭으로 바뀌게 됐고, 이로 인해 쌀과 기타 필요한 대부분의 생필품은 사쓰마에서 비싼 값에 사올 수밖에 없었다. 사쓰마는 헐값에 설탕을 사들이고 비싸게 생필품을 팔아서 이중으로 부를 축적했다. 사쓰마는 이같이 류큐 민중을 착취해 메이지유신의 중심이 되는 경제력을 갖췄다.

슈리성 안에 자리한 당집. 조선으로부터 고려판 대장경을 전수받은 기념으로 세워졌다.

■일본이면서 일본이 아닌 곳

우리는 일제의 조선 병탄(倂呑)을 좁게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을 병탄하기 이전, 이미 풍부한 식민지 경영 경험을 축적하고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북방의 토박이면서 소수민족인 아이누족의 아이누모시리(아이누어로 자유로운 천지라는 뜻) 홋카이도를 점령했다. 홋카이도는 일본 식민주의의 첫 실험장이었다. ‘식민지’라는 말이 처음으로 홋카이도에 쓰였다. 홋카이도 다음 차례가 류큐였으니, 메이지 정부의 직할인 류큐번왕(藩王)으로 바꾸는 병합 과정을 거친다. 그리하여 19세기 말 오키나와 문화는 전적으로 일제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개편됐다.

이 시기는 일제가 갑오농민전쟁을 와해시킨 지 몇 해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일본의 좀 더 결정적인 제국주의 경영 경험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할양받은 1874년 타이완 침략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류큐가 본디부터 일본 땅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두말할 것도 없이 류큐는 독립 왕국이었다. 또 오키나와는 메이지유신 이후 병합돼 왕국에서 일개 현으로 강등되면서 창지개명(創地改名)이 된 이름이다. 일본이면서 일본이 아닌 또 하나의 ‘내부 식민지’인 셈이다. 문명의 바닷길에서 우리는 하와이왕국 병합에 버금가는 류큐왕국 병합의 슬픈 역사를 마주하게 된다. 그 후 오키나와에서 펼쳐진 제2차 세계대전 격돌, 미군 점령, 일본 환속 이후 계속되는 갈등의 씨앗이 이미 선대에 잉태된 것이다.

『▶필자 주강현

국립해양박물관장, 전 제주대 석좌교수. 해양사, 문화사, 생활사, 민속학, 고고학 등 융·복합적 전방위 연구로 세계를 누벼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식 노마드’이자 비교해양문명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해양문명사가. <등대의 세계사> <독도강치 멸종사>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환동해 문명사>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 등의 저서가 있다. 』

주강현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