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방서 파는 2000원 모닝커피세트 마셔봤나요? '좋았던 시절'로 떠나는 서천 장항 추억여행

서천 | 글·사진 김형규 기자 2020. 1. 8.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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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커다란 바위산 위에 올라간 장항제련소 건물과 굴뚝. 장항은 제련소와 장항선 철도 등 근대 산업을 일군 기반시설이 들어서며 지난 세기에 번성했던 도시다. 여전히 남아있는 몇가지 먹거리들은 ‘좋았던 시절’ 시끌벅적한 한때를 연상시켜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 너와 나의 화양연화

물어물어 찾아갔다. 아주 특별한 커피를 파는 곳이 있다는 얘길 들어서였다. 아침 일찍 도착해야 한다고 해서 새벽같이 서울 집을 나섰다. 충남 서천군 장항 읍내에 있는 ‘왕자다방’에 도착한 게 아침 8시쯤이었다. 건물은 허름했고 가게 앞엔 자전거 한 대가 덜렁 서 있었다. 썰렁했다. 창문 틈으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불빛을 보고서야 안심했다.

‘땡그랑’ 출입문에 달린 종을 울리며 안으로 들어서자 실내의 눈동자가 일제히 한쪽으로 쏠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다방에 간 것도 처음이지만, 손님이 가득 찬 시골 다방도 처음이었다.

장항 읍내의 왕자다방. 매일 새벽 4시30분이면 문을 열어 아침 9시까지 아침식사 대용의 모닝커피 세트를 판다.

주문을 할 필요도 없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사기잔에 담은 찬물부터 한 잔 내왔다. 냉수를 들이켜자 곧바로 콩물 한 잔, 깨죽 한 그릇, 계란 프라이 두 개, 커피 한 잔이 잇달아 상에 차려졌다. 커피 대신 요구르트를 두 개씩 까서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다 먹고 나니 그럴 듯한 요기가 됐다.

장항 다방의 모닝커피 세트는 장항제련소에서 교대근무를 하던 노동자들과 풍랑 만나 뱃일을 못 나간 어부들의 아침식사로 시작됐다고 한다. 산업도시 장항의 번성을 이끌었던 장항제련소가 1989년 용광로를 폐쇄했으니 못해도 30~40년의 역사를 지닌 셈이다. 열 곳이 넘는 장항 읍내의 다방 중 삶은 계란이나 죽을 내는 곳이 지금도 더러 있지만 왕자다방만큼 실하게 아침상을 차려주는 곳은 없다.

왕자다방의 아침 메뉴. 콩물 한 잔과 깨죽 한 그릇, 계란 프라이 두 개, 커피 한 잔을 내주고 2000원을 받는다.

요즘은 동네 노인들은 물론 출근길의 30대 직장인, 아침운동을 마치고 들른 중년부부 등 손님층이 다양하다. 할머니부터 대학생 딸까지 3대가 아침을 먹으러 온 가족도 있었다. 대부분 구면인 손님들은 들어서면서부터 인사와 안부를 나누고 또 농담을 했다. 뜨내기 관광객도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 묻어가기 좋았다.

식사나 다름없는 모닝커피 세트 가격은 단돈 2000원. 오전 9시까지만 팔고 이후부터 문 닫는 오후 4시까진 모든 차를 1000원에 판다. 가격이 너무 박한 것 아니냐는 물음에 주인 김순아씨(73)는 “손님들이 올려줘야 받지 내 맘대로 비싸게 받을 수 있느냐”고 했다. 찾는 사람들 주머니 사정이 빤한데 어떻게 더 받느냐는 것이다.

김씨는 20여년 전부터 왕자다방을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일 년에 명절 이틀을 제외하곤 매일 콩을 갈고 죽을 쒀서 새벽 4시 반이면 다방 문을 연다. 하루 12시간씩 일을 해도 가겟세 30만원을 못 채워 노령연금 받은 걸 헐어 낼 때가 많다.

아침 손님들이 빠져나간 다방에서 차를 마시는 주인 김순아씨

30년 전만 해도 김씨는 어엿한 선주였다. 어느 날 남편이 배를 타고 나갔다 사고를 당하면서 그도 “실패한 인생”이 됐다. 남편은 시신도 찾지 못했다. 빚만 남았다. 오로지 살기 위해 악착같이 일한 사람의 고된 흔적이 그의 얼굴에 문신처럼 남아 있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도 한참을 이야기 나누다 찻값으로 지갑에 있던 1000원짜리 일고여덟 장을 다 꺼냈더니 김씨는 “판 것만큼만 받아야 한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결국 그 돈으로 다방 앞 노점에서 붕어빵과 어묵을 사와 손님 모두가 나눠먹었다.

다방 소파에 몸을 파묻고 앉아 가만히 사람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왕년의 ‘좋았던 시절’을 추억하면서 노인들은 종종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가 명덕호 기관장을 했었잖아.” “고기를 얼마나 많이 잡았는지 3t짜리 창고를 가득 채웠다니까.” 듣는 사람도 문득 옛 생각에 빠졌다. 나의 화양연화는 언제였을까. 여러 장면이 떠올랐다가 다시 사라졌다. 실감하기엔 너무 흐릿한 장면들이었다. 조금 쓸쓸했지만, 일상을 잊고 잠시 돌아본다는 여행의 목적엔 충분했다.

■ 서천 최초의 콩국수

장항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장항역과 장항항, 장항제련소가 건설되며 근대 산업도시로 성장했다. 전남 광주가 읍으로 승격한 게 1931년인데, 장항이 7년 뒤인 1938년에 읍이 됐으니 당시 얼마나 활기찬 도시였을지 짐작이 간다. 일제시대엔 충남·경기 지역 쌀이 장항항에 모여 일본 오사카로 옮겨졌고, 산업화 시기엔 제련소에서 생산된 납·구리·아연이 장항역을 통해 전국으로 퍼졌다. 일거리가 넘쳤고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장항은 제련소가 문을 닫고 이어 1990년 금강하굿둑이 완공되며 내리 쇠락의 길을 걸었다. 물길이 막히고 둑 위로 기차와 자동차가 군산을 오가게 되면서 장항항과 장항역은 쓸모를 점차 잃었다. 장항역은 2008년 화물역으로 바뀌었고, 2016년엔 화물열차 운행마저 중단됐다.

1958년 장항역 앞에서 시작해 60년 넘게 콩국수와 소머리국밥 장사를 해온 이수월 할머니.

물건은 쓸모가 없어져도 사람은 그렇지가 않다. 서천군 한산면 출신의 이수월 할머니(90)는 1958년 장항역 앞에 ‘보신정’이라는 식당을 열었다. 한복을 차려입고 콩국수를 팔았다. 콩국수는 과수원을 하던 김포의 시댁에서 새참으로 자주 만들어 먹던 음식이었다. 당시만 해도 서천 사람들은 콩국수가 뭔지도 몰랐다고 한다. 서울사람이나 이북 출신 손님들을 주로 받으며 근근이 유지했다. 날이 추워지면 뜨끈한 국물을 찾는 사람이 많아 어릴 때 어머니가 해주던 그대로 만들어 소머리국밥도 메뉴에 추가했다.

그렇게 밥 팔아 번 돈 200만원으로 40년 전 방 딸린 가게를 사 장항 읍내 지금의 자리(신창리 170-122)로 이사했다. 옛이야기 풀어놓는 할머니는 구순의 나이기 믿기지 않을 정도로 꼿꼿하고 또렷했다. 흥성흥성하던 장항은 이제 인구가 한창 때의 절반도 안되게 줄었다. 할머니는 여전히 같은 메뉴를 판다. 몸이 아픈 아들과 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그만둔 손자가 일을 거든다.

보신정은 주문이 들어오면 그 자리에서 밀가루를 반죽하고 제면기로 면을 뽑아 콩국수를 말아낸다.
보신정의 소머리국밥. 끓이면서 수십번 기름을 걷어내며 만든, 정성이 가득 들어간 한 그릇이다.

점심에 맞춰 들른 식당에서 소머리국밥을 먼저 시켰다. 벌건 국물 안에 머릿고기며 채소에 건더기가 가득 씹혔다. 서너 가지 김치와 밑반찬도 모두 직접 만든 것이었다. 콩국수도 한 그릇 맛보고 싶다 하니 다 못 먹을 거라며 손사래를 치던 할머니가 실랑이 끝에 결국 주방으로 들어갔다. 곧 반죽한 밀가루 덩이를 들고 나오더니 제면기에서 바로 면을 뽑아냈다. 서천 최초 콩국수에다 아직껏 직접 면을 뽑는 곳 역시 이 집이 유일할 것이다.

두 그릇 밥값을 넉넉히 챙겨 슬쩍 식탁에 두고 나오는데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자기가 일한 만큼만 돈을 받아야지 안 그럼 죄 받아. 큰일 나.” 도망치듯 가게를 빠져나왔다. 추운 날 밖에까지 따라 나와 고맙다고 연신 고개 숙이는 할머니를 보며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잘못해도 고개 숙일 줄 모르고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고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는, 잘나고 많이 배운 이들을 요즘 너무 많이 봐서일까.

가게 앞까지 나와 기자를 배웅하는 이수월 할머니

식당을 나서 장항 읍내를 산책했다. 1970~1980년대에 지어진 올망졸망한 단독주택들은 천편일률적인 요즘 아파트와 달리 개성이 뚜렷했다. 세모, 네모, 동그라미로 제각각 만들어 박은 창문조차 예뻤다. 읍내 곳곳의 담벼락은 마을미술 프로젝트로 설치미술 작품부터 타일아트, 벽화 등이 꾸며져 있어 눈이 심심하지 않았다.

구 장항역을 개조한 장항도시탐험역
장항도시탐험역 옥상 전망대

구 장항역은 복합문화공간인 ‘장항도시탐험역’으로 바뀌었다. 1층엔 자전거대여소가 있어 무료로 자전거를 빌려 동네를 한 바퀴 돌 수 있고, 2층 이야기뮤지엄에선 장항의 역사와 주요 공간을 설명하고 있었다. 옥상 전망대에 올라가니 폐철로와 철길 옆을 걷는 사람들, 멀리 바위산 위에 우뚝 솟은 제련소 굴뚝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련한 과거의 향수를 느끼고 또 치열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도시 장항이 거기 있었다.

옛 장항역은 2016년 화물열차 운행 중단으로 더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 일부 구간은 사람들이 오갈 수 있게 철길 위로 보행로를 열어뒀다. 현 장항역은 선로를 직선화하며 국립생태원 앞으로 옮겨졌다.
장항 읍내 옛 정미소 자리에 남은 건물. 철원 노동당사처럼 속이 텅 빈 채 껍데기만 우두커니 서 있다. 외벽을 두른 회색 벽돌은 장항제련소에서 나온 슬러그(제련 과정에서 발생하는 찌꺼기)로 만든 벽돌이다.
장항 읍내 주택가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

서천 | 글·사진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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