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로당 군책이 누구요?".."박정희가 있소"

이계홍 작가, 언론인 2020. 1. 3.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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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33>

[이계홍 작가, 언론인]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5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바로가기 :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처음부터 보기

제33장 영원한 친일·친미

오민균이 박정희에게 다시 물었다.
“최남근 연대장과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몰렸어.”
무엇무엇이, 또는 무엇무엇에 따위 주격과 처소격이 빠져있어서 무엇을 말하는지 대중할 수 없었다.  
“뭐라구요?”
그는 고개를 젓는 듯 마는 듯 여전히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조금은 답답했다. 어떤 구심점 없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막연한 불만의 덩어리만 보퉁이에 싸들고 나다니는 것으로 보였다. 무언가 도모한다면 종적ᐧ횡적 계선과 축선, 종심 따위를 구축해야 한다. 운동은 감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굳센 의지와 강고한 조직으로 한다. 감시 때문이라지만 너무나 비조직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굳게 다문 입은 어떤 신비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작지만 단단한 체구에 꽉 다문 입. 그 안에 어떤 깊은 심연의 비밀이 간직되어 있는 것같다. 그것이 엄정한 시기, 상호 안전을 지키자는 사인으로 비치니, 주변 사람을 배려하는 것으로도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그를 신뢰하고 후배들이 따르는지 모르겠다. 세상을 보는 분석력과 사색적 태도, 그리고 비밀을 지킨다는 무거운 침묵...    
“미국의 졸개가 되어있는 것 보면 참으로 민망하다.”
그제서야 오민균은 그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알았다. 그는 상황을 살피고, 정보에 목마른 청년장교들에게 지적 호기심을 촉발시키며 자극한다.    
박정희는 휴가차 내려온 듯했으나, 사실은 송호성 총사령관을 수행해 광주에 갔다가 백선진 전략팀에서 밀려나 광양-순천-여수를 거쳐 배를 타고 목포로 들어왔다. 
박정희가 ‘10.19 여수 병란‘ 토벌사령부에 합류한 것은 송호성 육군총사령관의 긴급 호출 때문이었다. 10월 20일 오후 이범석 국방장관이 송 총사령관을 불러 여순 토벌을 지시하자, 그는 대번에 박정희 소령과 한신 소령을 불렀다. 
박정희는 춘천 8연대 작전 참모로 재임 중 군사작전 계획을 잘 짰다는 평판을 들었다. 실제로 그는 일본 군대의 지휘관용 ‘전술교범’을 옆에 끼고 살았다. 이 책을 통해 작전 상황에 대한 준거 틀을 만들었는데, 실행 수칙이 치밀했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 날에도 전술교범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송호성 총사령관이 이를 알고 여순 토벌 전투작전을 전개할 적임자로 박정희를 불러냈던 것이다. 박정희는 국방경비대사관학교 생도대장으로 근무 중 정부 수립과 함께 새로 들어선 육군 정보국 발령을 받아놓고 있는 상태였다. 말하자면 어정쩡한 시기였다.   
송호성 총사령관이 굳이 박정희·한신을 호출한 것은 세 사람 모두 국방경비대사관학교 2기 동기생이라는 인연도 작용했다. 송호성은 나이 60이 다 되어서 사관학교 2기로 입교했지만 형식상일 뿐, 실제는 중국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군대 연대장, 중국 국부군의 기병사단장을 역임하고, 충칭 임정의 김구 주석 측근 무장으로서 광복군 5지대장을 지낸 신분이었다. 
송호성은 자신과 함께 나이들어 뒤늦게 경비대사관학교에 입교한 박정희와 이심전심으로 통했다. 민족의식 또한 새로워 보여서 재학시절부터 박정희를 눈여겨 보았다. 일본군 중위 출신이었지만 박정희는 해방이 되자 일본군 장교라는 과거를 씻고 충칭 광복군에 합류하더니 민족 사회주의 대오에 섰다. 송호성은 그런 그를 분신처럼 여겼다. 다른 장교들에 비해 자기 신분을 깨끗하게 세탁한 뒤 옷을 갈아입었다고 평가했다. 근래 그의 활동상이 그것을 그대로 웅변해주고 있었다.
송호성은 인생의 대부분을 중국에서 보내고, 중국인 부인을 얻어 살면서 중국 국적을 획득했기 때문인지 사상적으로 좌우 이념을 초월한 사람이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체제가 반공정권을 표방해나가도 그 자신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넓었다. 그래서 제주 4.3이나 ‘여순 병란’도 미 군정과는 다른 시선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박정희가 지향하는 지점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코드가 맞았고, 이심전심으로 의기투합한 바가 많았다.
송호성은 제주 4.3과 10.19 여순사건은 외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현지 주민의 목소리가 정당하다고 보았다. 실제로 송호성은 여수·순천 반군 토벌 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진압작전을 진두지휘했지만, 여수 근교에서 반군의 기습을 받을 때 토벌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저울질했다. 사상이 의심되는 행동이었다. 지휘관은 전투에서 지면 두 말할 필요없이 패장이다. 군대에서 피아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 설정은 ‘둥근 사각형’, ‘유리 철기’ ‘뜨거운 냉수’ 같은 형용 모순이다. 이런 모호한 태도는 결국 피아 더큰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그 길을 택했다
송호성은 해방이 되어 귀국한 뒤 김구 세력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김구는 지금 이승만 세력의 청년 테러단에게 쫓기고, 여운형에 이어 그의 목숨도 경각에 달려있는 상황이었다. 송호성은 육군 최초(1947년)의 장성이 되고, 정부 수립 후 육군총사령관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구 계열이란 신분 때문에 갑자기 신설 예비군 조직인 호국군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가 5사단장으로 밀려났다. 비유하자면 참모총장이 시시한 신설 사단장으로 강등된 셈이다. 
이런 인사 조치는 김구와 가깝다는 이유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1950년 6.25가 터지기 전인 6월 초 그는 예비군 조직인 청년방위대의 고문단장으로 좌천되었다. 부하가 없는 군 수뇌는 수족이 잘린 몸이나 같다. 그로부터 보름 후 6·25가 터지고 한강 철교가 폭파되어 남하가 시작되자, 그는 규사 김규식 박사의 집에 머물렀다가 9·28 서울 수복 직전 김 박사와 함께 북한군에게 납북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에는 그가 북한 인민군복을 입고 공식 석상에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그는 1953년 북한 인민군 해방전사여단장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인민군해방전사여단장으로서 휴전 후 이미 납북된 조소앙·안재홍 등과 함께 '자주적 통일방침'이라는 6인 공동성명을 발표했으며,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회 상무위원을 지냈다. 
다른 자료에는 1954년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1958년 평남 양덕으로 유배되었고, 1959년 뇌출혈로 사망한 것으로 나와 있다. 분단과 심화된 냉전 상황에서 그는 양 진영의 군복을 번갈아 착용한 독특한 인물이었다(이상 위키백과, 두산백과 인용). 그의 이념적 좌표는 분단 상황에서 양쪽을 선택한 인물. 이런 상황이었으니 여순 사건을 보는 시각도 달랐을 것이다.  

박정희와 송호성 총사령관은 광주 4연대 작전상황실에서 여순사건 진압 작전회의를 열었다. 지도를 펴놓고, 주요 거점 지역을 차단해 반군을 저지할 길목을 찾았으나 진압 방법은 분명치 않았다. 
“살상은 억제하라.”
송호성의 지시에 따라 박정희는 반군의 도주 루트를 하나하나 짚었다. 광양의 백운산-지리산 루트로 반군을 몰아붙이면 되었다. 일망타진이 아니라 숨으라는 뜻이었다. 이때 마산 15연대가 진압 작전에 투입되었다. 15연대장은 최남근이었다.
이범석 국방부 장관은 송호성 총사령관의 여순 투입이 마땅치 않아서 채병덕 육해공군 총참모장을 불러 특명을 내렸다.
“송호성 총사령관 선발대와 별도로 채병덕 총참모장이 선견대(先遣隊)를 편성해 현지로 내려가서 사태를 진압하라.”
이 회의에는 채병덕 국방부 총참모장, 정일권 육군참모부장(현 육군참모차장)과 백선진 정보국장이 참가했다. 
“송호성 총사령관이 미심쩍으니 진압부대를 이원화하는 것이 낫다고 미군 고문단의 권고가 있었다. 이를 이행하라는 것이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정일권 육군참모부장, 백선진 정보국장과 이니셜이 H로 통하는 미군 정보장교 짐 하우스만 대위, 그리고 존 리드 대위와 정보국 통역관으로 있던 고정훈(후일 민주사회당 총재) 중위 등으로 선견대를 꾸렸다. 
그들은 곧바로 김포비행장으로 가서 C-47 수송기를 타고 광주 송정리 비행장에 내렸다. 두시 간 뒤에는 미 임시군사고문단(PMAG) 단장 윌리엄 로버트 준장이 별도의 군용기를 타고 4연대 작전에 가세했다(이하 ‘6·25 전쟁 60년-지리산의 숨은 적들 (136) 피로 물든 여수,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일부 인용).
송호성 총사령관과 박정희·한신 소령은 테이블에 지도를 펴놓고 작대기로 교전 지역을 지목하며 작전 계획을 논의하던 중에 채병덕 총참모장 일행을 맞았다. 채병덕 일행은 들이닥치자마자 박정희의 진압작전 계획을 접수했다. 하우스만 대위가 박정희의 작전지도를 한동안 살피더니 빼앗다시피 지휘봉을 건네받았다. 미 군사고문단을 움직이는 인물은 그였다. 
“우리가 살피는 한 이것이 아니오. 격돌을 피하고, 쌍방 피해를 줄이는 작전 전개는 진압작전이 아니오.”
이 말을 듣고 박정희가 발끈했다. 
“화공작전으로 나설 사안이 아닙니다.”
“격퇴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그의 말을 묵살하고 하우스만이 지휘봉을 빼앗다시피 하여 백선진에게 넘겼다. 박정희는 한동안 멍청하게 서있다가 우지끈 어금니를 물며 뒤로 물러섰다. 어떤 거대한 힘 앞에서는 고집이 있는 그로서도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우스만은 중국 광복군 출신 송호성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를 좋아하지 않는 날벼락이 박정희에게 떨어진 셈이었다. 군사 조직의 이원화와 독단적 운영은 그의 작품이었다. 그것은 군심의 균열을 가져오기에 충분했다. 하우스만은 광복군을 몹시 싫어했다. 광복군 출신들이 일본군 출신에 비해 공산주의자를 덜 적대시한다는 점이 첫째 이유였다. 하우스만은 송호성이 공산주의에 대해 나쁘다는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 늘 유의했다. 
송호성은 대구 10.1 사건이나 제주 4.3, 10.19 여순 사건을 좌익 대 우익의 대결로 보는 인식이 아니었다. 정부 정책에 대한 반발로 보았다. 미국은 적군이냐 아군이냐로 단순히 이분법적 관점으로 사태를 보고 전략을 짜지만, 상황은 그렇게 녹록하게 단순하게 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문제 요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일제 식민지 체제와 분단체제라는 외부적 요인과, 친일체제라는 내부적 요인을 간과할 수 없으며, 이에따라 복잡하게 민심이 작동하고 있으며, 그래서 당장 민심과 이반되는 작전 전개가 적절하지 않다고 보는 관점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자신도 뚜렷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다만 이런 적대적 상황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반면 하우스만이 국방경비대에 배치 받아 처음 느낀 것은 군대와 경찰간의 충돌이 빈발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지방 좌익의 영향으로 미 군정 중앙에서 내리는 지침이나 통제가 제대로 먹혀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런 때 하우스만은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반사회주의적인 일본군 출신들을 우대했다. 광복군 등 중국에서 온 군인들은 늙었거나 제대로 군사훈련을 받지 못한 허접한 군인들이었다. 민족의식은 강하나 병정놀이하다 온 사람들처럼 작전 개념이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광복군 등 중국에서 온 군인들이 맹탕 장개석의 ‘부속품’ 같은 존재에다, 저속한 말로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존재들이라고 여겼다. 미국은 애초에 국가주의는 있어도 민족주의라는 개념은 없었다. 민족 운운할 때면 애초에 문맹자 인디안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일본군 출신들은 상대적으로 민족의식이란 뇌관이 머릿 속에서 뽑혀져 나와 있었다. 강한 군인정신과 현대적 군사훈련을 받은 군사라는 점도 차이가 났다. 이러한 평가는 일본군 출신들에게 출세와 영달을 부여하는 보증수표가 되었다. 이들은 국방경비대의 엘리트 군인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확보한 셈이었다.  
백선진은 한쪽에 찌그러져 서있는 박정희의 동태를 살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다부진 작은 키… 여전히 불만이 가득찬 얼굴로 서있는데, 언제 블독처럼 대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게 아니라 박정희는 미 정보고문관 하우스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새끼가 군의 실권자란 말이지? 군사 실권을 쥐고 직접 작전지휘까지 행사한단 말이지?
박정희는 그런 표정이었다. 하우스만이 한국군을 움직이는 힘은 그가 가진 풍부한 물적 토대와 인사권이었다. 어느 부대에 물자가 필요하다고 하면 미국 원조물자와 미군 보급품을 100% 하달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누구누구를 승진시키고, 어느 부대로 전보해야 한다고 보고하면 그대로 이행되었다. 보고한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통고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인사에서 박정희는 늘 배제되었다. 그의 사상을 의심한 하우스만은 박정희를 불신했다. 같은 일본군 출신이라도 군에 불만이 가득찬 태도를 보인 것은 가족사와 연관이 있다고 보았다. 
신원과 비밀을 수집하는 정보통에게 있어 선입견은 그를 단정하는 바탕이 된다. 믿고 싶은 방향대로 퍼즐 맞추듯 맞춰나가면 그는 결국 그런 캐릭터로 굳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시기와 환경에 따라 성격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다층적인 품성을 갖게 되는 것이며, 어느 한 시절 그를 만났을 때 그가 지닌 여러 성격중의 한 단면만을 볼 수 있다. 한 순간의 그가 일생의 일관되고 고정된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보통은 한쪽으로 몰아가면 그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성격을 규정하게 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하우스만의 입장에서 볼 때 박정희는 의혹의 인물이었다. 광주 4연대 작전통제실에 들어서자마자 작전지휘권을 빼앗아버린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정보관으로서의 동물적 촉수지만, 그는 박정희가 정체불명이며 불투명하며, 그래서 언젠가 일을 낼 인물이라고 보았다. 
“개자식, 현실을 도외시한 진압이 실효성이 있나? 한번 해볼 테면 해보라지.”
박정희의 예상대로 진압군은 병력 배치를 끝냈지만, 이상할 정도로 토벌이 진척이 없었다. 백선진은 작전 상황을 광주 지휘본부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으나, 진척된 공격 상황 보고를 받지 못했다. 각급 토벌 부대의 지휘관들은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반란군의 동태를 살피면서 상황을 저울질하는 것이었다. 토벌 공격군이나 반군 사이에 암묵적으로 충돌을 거부하는 묘한 정서가 있었고, 그것은 같은 군인끼리 싸울 수 없다는 어떤 묵계와, 양해가 상호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박정희는 이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호성 총사령관이 상경하자 박정희는 마산의 15연대장 최남근을 만나고 상경할 예정으로 하동 방면으로 진출했다. 최남근은 이미 출동 명령을 받고 이동 중에 있었으므로 만날 수 없었다. 대신 광양-순천-여수를 거쳐 목포로 나와서 제주 기지의 오민균을 불러냈던 것이다.  
박정희는 바가지째 막걸리를 떠서 벌컥벌컥 소리가 나게 마셨다. 배가 불룩해질 때까지 마셨다. 그런 식으로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끄고 있었다. 한참 있다가 박정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병주가 잡혀갔다.”
“이병주라뇨? 
“신경군관학교 동기야.”
“사고가 있었습니까.”
“개자식들...”
말이 엇박자가 되었다. 그는 어지간히 취해 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의 판자 울타리로 가더니 허리끈을 풀고 질퍽하게 소변을 보았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뒤 엉뚱하게 말했다. 
“이 참에 너도 상경하그라. 심상치 않다.”
“탈영하라구요?”
“쓸어버릴 것 같다.”
하긴 그에게도 무겁게 압박해오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오민균은 느끼고 있었다.   
“나로 말하면 친일에서 자유롭지 못하지. 그래서 근래 더욱 민족의식이 강고해졌다. 그게 내가 취할 길이라고 생각한 기라. 특히 죽은 형님을 생각하면 우파의 길을 갈 수가 없어. 오 소령도 그렇지? 하긴 오 소령이야 무슨 상관인가.”
그가 총각김치를 으적으적 씹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자기반성을 통해 민족장교로 서있어야 해. 미제에 분개하고, 분단을 괴로워하고, 대안을 찾는 민족군대라야 돼...”
“반성하지 않는 친일 세력들이 한둘입니까.”
“그자들이 일을 저지를 것 같다.”
“힘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여론을 비틀고 조작하고, 음해하고... 지주·자본가·지식인·경찰·관료·군벌ᐧ언론... 자진해서 친일 대오에 끼었던 자들이 해방이 되니 더 설치고 있지. 못된 짓한 걸 열거하면 악 소리가 나는데 그걸 반성은커녕 오히려 내놓고 자랑으로 여긴단 말이야. 마치 훈장처럼. 잘못가도 한참 잘못 가고 있지 않나?”
그러면서 하나하나 열거하기 시작했다. 국방비 기탁, 비행기 및 금품헌납, 총독열전각(總督列傳閣) 신축... 그러는 한편으로 고관들의 대부분이 조선을 쉽게 지배할 수 있도록 일제를 도왔다. 임전보국단·총력연맹·시국대책조사위원회 등의 단체에 가입하여 착취와 수탈에 앞장섰다. 지성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은 한 수 더 떴다. 지원병·학병·징용으로 보내고, 근로정신대, 간호원으로 취업한다고 속여 어린 소녀들을 일본군의 성노예로 밀어넣었다. 소녀들은 혈기방장한 병사들을 매일 수십 명씩 받아내느라 몸이 젖은 빨래처럼 너덜거렸다. 
“소녀들이 누워있는 눅눅한 다다미방에 정액이 흘러넘쳐있는 걸 보았지. 정액을 치울 힘도 없어서 누워서 까딱하지 않고 병사들을 받아내는 소녀들의 슬픈 눈망울을 나는 잊지 못한다. 작은 풀잎 하나에도 까르르 웃는 순박한 어린 여동생들이 육체가 만신창이가 되어서 우는 모습을 보느라니까 감정이 무딘 나도 눈물이 나더군. 위로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건빵 몇 개 던져주고 나오는 것 뿐이었어. 이런 소녀들을 방직공장에 취직시켜 준다고 속여서 전선에 내보낸 그들을 우리가 어떻게 용서한단 말인가. 그 앞잡이하던 조선인 순사들, 헌병대 놈들을 어떻게 묵인한단 말인가. 그런데 미국이 그들을 세상의 주역으로 등용시키고, 해방을 위해 투쟁해온 투사들을 잡으러 다니도록 독려하고, 잡히면 구금하고, 패고, 고문하고 죽이고... 이렇게 거꾸로 가는 세상이 어디 있노?”
분통을 터뜨리던 그가 다시 바가지째 술을 떠서 마셨다. 
“나는 언론인이나 지식인들을 더 나쁘게 본데이. 강연·방송·좌담회·담화발표 등을 통하여 내선일체·황도정신, 총력체제의 생활화를 강조하는 그들이 논설을 쓰고, 시·소설·수필·논문으로 선동하고... 따지고 보면 이 자들은 지주, 관료·군인의 친일행위보다 성격이 다른 악성들이지. 갈보 하나는 한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지만, 신문이란 것은 수십만, 수백만 독자와 국민의 영혼을 갉아먹는 병균이야. 그들의 충동질에 선량한 소녀들과 소년들이 전선에 투입되어 육신과 영혼이 파괴되어버렸잖아. 지금은 미국에 눌러 붙어서 함께 영화를 누리잖나. 내가 이런 자료들을 모았지. 이것들도 한번 보아버릴 작정이야.”
그가 손가방에서 누더기가 다된 신문 쪼가리들을 꺼냈다. 

-천황폐하께서 조선 출신 범인 이봉창이 폭탄 던졌으나 무사히 환궁하시었다
-광주학생운동은 조선의 불행
-한일합방은 조선의 행복과 동양의 평화 위해 체결한 조약
-데라우찌 총독은 조선의 대근원 기초한 위대한 창업공신
-일제의 30년 조선통치로 문화조선 건설 결실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 잘 운용해야 항일운동 근절 가능
-일본육군지원병 제도는 조선통치사의 신기원이자 성스러운 일 

유력 신문들의 기사들이었다. 우리나라 신문으로는 처음으로 새해 첫날 신문 1면에 일왕 부부의 초상을 크게 실은 신문도 있었다(1936년 1월1일자). 일본군의 침략전쟁에 국방헌금 사고를 냈다(1937년 8월12일자). 조선의 민중을 ‘천황의 신민(臣民)’으로 표기하고(1937년 8월23일자), 일왕의 생일인 명치절이나 천장절(天長節)에 천황 폐하의 은혜로운 칭송 기고문을 실었다.  

-춘풍(春風)이 태탕하고 만화(萬花)가 방창(方暢)한 이 시절에 다시 한번 천장가절(天長佳節)을 맞이함은 억조신서(億兆臣庶)가 경축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바이다. 성상 폐하께옵서 옥체가 유강하시다니 실로 성황성공(誠惶誠恐) 동경동하(同慶同賀)할 바이다. 일년일도 이 반가운 날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홍원(鴻遠)한 은(恩)과 광대 (廣大)한 인(仁)에 새로운 감격과 경행이 깊어짐을 깨달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적성봉공(赤誠奉公) 충(忠)과 의(義)를 다하야 일념보국(一念報國)의 확고한 결심을 금할 수가 없는 것이다(1939년 4월 29일자 조선일보 사설 <봉축 천장절>)

“신문의 사설과 기사가 꼭 교주에게 바치는 신앙 고백 같군요. 이런 자들이 지금은 미국을 빨고 있네요?”
오민균이 말하자 박정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명색 지성들이 만드는 신문인데, 그들의 보도가 식민지 백성을 위해 복무하겠지, 그래서 못따라 가면 세상의 지진아가 된다고 나는 생각했데이. 그 보도대로 ‘천황 지존’에게 황공무지와 같은 감격을 못이기겠다고 늘 생각했어. 그래서 나는 ‘신동아 건설의 성업을 수행하여 황도일본의 위광을 빛내자’고 충성맹세를 하게 된 거야. 신문이 이끄는 대로 나는 ‘신민(臣民)’은 물론 ‘신자(臣子)’로 생각하게 되었어. 그런데 이게 뭔가. 터져버린 만두 속처럼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어. 그동안 그토록 쳐부셔야 할 미제귀축(美帝鬼畜), 귀축영미(鬼畜英美)를 새 주인으로 맞아 숭상하다니. 미영귀축을 박멸하기 위해 최후의 일각까지 남은 피 한방울 남김없이 텐노헤카이의 은전에 바치자고 맹서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유도하고 격려하던 자들이 어느새 변신하여 미제귀축을 상전으로 모셔?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을 적으로 몰아 잡아가두고 고문하면서 미영귀축을 주인으로 모셔? 이것은 내 양심상 용납할 수 없다. 이런 게 명색이 한국의 언론이야. 주인을 바꿔 아부와 충성과 영합을 부추기고, 분열을 획책하고, 파벌적 이익에 종속되고, 그러면서도 엘리트의식, 선민의식에 젖어서 백성을 이래라저래라 훈계한단 말이야. 진실을 말해야 할 때 왜곡하고 조작하고, 진실을 모욕하고 비트는 보도 태도는 바로 사기 행위지. 외세에 충성해서 노예로 살자? 물론 그런 의도들에 순응하는 대중이 있기 때문에 열을 뿜고 보도하겠지만, 지식인이라면 최소한 양심이라는 것이 있지. 무지한 백성의 길잡이가 되어야하는데 더럽게 타락해버렸어. 점령군으로 들어온 외세에 빌붙어 쌍간나 짓을 해! 그러니 미국이 우릴 우습게 보고, 우리 뜻과 상관없이 멋대로 한반도를 쥐어흔들며 농단하지.”
광주 4연대의 작전회의에서 소외된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일까, 그는 거침없이 쏟아냈다.
“진정한 광복과 건국을 가로막는 자들이 그들 두 세력이란 말이군요?”
“그래. 갈보에게 남자를 데려다 주는 자를 펨프라고 하더군. 그들이 지금은 용공조작, 간첩조작, 색깔론으로 미군정의 통치 기반을 닦아주면서 양심 인사를 잡아다 주는 펨프 노릇을 하고 있단 말이야. 점차 반공 독재가 강화되고, 민족 민주 세력을 밟고 있어, 친일 친미를 미화하는 보도를 보면 참을 수 없다. 어제까지만 해도 미영귀축이라고 광분하던 논조가 이젠 미친 듯이 미국을 빨고 있으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어. 미쳐돌아가는 거야. 정말 침을 칵 뱉어주고 싶다.”
그는 그동안 참고 지냈던 것들에 대한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모양이었다.  
“고등계 형사, 사찰계 경찰 따위 일제식민지 체제의 개가 미군정의 개가 된 것이 너무나 야비하지 않나? 추악하지 않나? 여순 사건으로 가보자. 역사적으로 반란의 목적은 정부 전복이고 권력 찬탈이지. 여순 사건이 그런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괄의 한양 진격 등 반란으로 규정한 사례를 보면 분명해지지. 반란이 성립하려면 수도를 점령하고, 권력자를 축출하거나 제거하려는 계획이 서야 하고, 새 권력자가 정해져 있어야 하고, 반란 주체의 군사적 지위가 서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 계획의 구체성과 거사 철학이 세워져야 한단 말이야. 하지만 여ᐧ순에서 그런 것이 있나? 신월리 14연대 하사관들의 목적은 정부 전복도 아니고, 권력 찬탈도 아니고, 오직 제주도 토벌 출병을 거부한 것 뿐이야. 같은 국민을 죽이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고, 동족끼리 싸우지 말자는 것이야. 물론 저의를 의심할 수는 있지. 하지만 국가 전복은 아니잖나. 그런 세력이 결국은 국가전복 세력이 된다고 하겠지. 그러니까 모순을 극복하라는 것이지. 해결점을 찾자는 거야. 복잡한 것이 아니지.” 
“하지만 이 사건은 탄압과 소탕의 빌미만 제공하고 말았습니다.”
박정희가 한동안 멍청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더니 말했다.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만은 아니야. 어떻게 죽창 같은 무기로 최신예 M-1과 박격포의 화기를 이길 수 있나. 다만 나의 존재의 가치를 위해, 나의 존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나의 실존을 확인하기 위해 일어선 행동이야. 이기면 보람찬 일이지만 실패해도 좋은 것이야. 자기를 지키는 싸움에서 비참하지 않기 위해 일어난 것이야. 용기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 침묵하고, 굴복하고 있으면 그 좌절과 허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분명코 개인의 파멸이 있지만 그 이상의 정신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지. 그래서 나는 역사의 유용성을 믿는 것이야. 무엇인가 있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사는 의미가 있지 않는가?”
“선배님 생각에 동의합니다.”
“경험했잖나. 크든 작든 일제에 협력한 부끄러움. 그래서 또다시 부끄러움을 반복할 수 없다는 자기 성찰. 그런데 현실은 그때보다 더 가혹하데이. 새 지배국의 패권 놀음에 놀림을 당하고 있어. 사실 반란자들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나. 무슨 미래 보장이 있겠나. 다만 불의를 묵인하면 내 삶이 비참해진다는 자기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분기한 것이야. 지역사회가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고 살겠다며 따랐을 것이야. 그래서 난 그들을 두려움 없이 존경하는 거야. 두려움 앞에서도 나서는 것을 보면 위대한 사람들이잖나. 나는 그들에게 총구를 들이대고 싶지 않았어.”
“그러나 쌍방 엄청난 희생의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대책없이 일어난다는 것은 너무나 무모하죠. 싸움은 기분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에게나 해당되니까요. 저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라면 운명을 가르는 기로에선 공포감을 갖게 되지. 그러나 선을 지키겠다는 선한 의지 때문에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이야. 보다시피 여수나 제주는 서울과는 거리상으로 먼 곳이야. 기차로 18시간 걸리는 곳이 여수야. 제주는 기차 타고, 배타고, 이틀이나 사흘이 걸리겠지. 이런 상황에서 서울을 점령하고, 수도에 거주하는 최고 통치자를 제거하고, 정부를 세운다?”
그는 같은 말을 반복하고, 두서가 없었다. 그는 웬만큼 취해 있었다. 그런 중에도 무언가 억울함을 말하겠다는 뜻으로 손가방에서 구겨진 손바닥만한 종이쪽지를 꺼냈다. '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 명의의 삐라였다. 그는 마치 폐지수집광처럼 여러 가지 종이들을 갖고 있었다. 
“이걸 광양 읍내에서 주워왔데이.”
삐라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조선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출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되려고 봉기한다!

종이를 구겨넣으며 박정희가 말했다.
“그러면 답을 주어야지, 보이는 족족 사살하는 것이 아니라 잡아들여서 물어야지. 그런 다음 법에 따라 조치하면 되지.”
그들은 술 항아리를 다 비우고 나서 곯아 떨어졌다. 오민균이 잠에서 깼을 때는 새벽이었다. 박정희는 그새 사라지고 없었다.   

제임스 해리 하우스만

“남로당 군책(軍責)이 누구요?”
그가 그렇게 물었으나 김창동은 침묵을 지켰다. 그가 많은 정보를 캐냈다는 자부심을 심어주는 것은 충직한 비밀 첩보원의 생존 방식이다. 김창동이 말이 없자 H로 통하는 제임스 해리 하우스만 미 정보고문관이 건방을 떨면서 말했다. 그러면 그렇지.
“미군 정보망에 따르면 이중업 밑에 이재복이 있고, 이재복 밑에 박정희가 있소. 안그렇소?”
“그렇습니까?”
김창동은 모르는 척 딴청을 부렸다.
“이재복은 경북 영천 출신으로 박정희의 형 박상희와 친구 사이고, 박상희가 경찰 총에 맞아죽자 이재복이 박정희 후견인으로 나서며 삼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다녔소.”
그는 한국 사람 못지 않게 한국어에 능통했다. 
“그렇습니까?”
“그렇지. 어느날 이재복이 춘천 연대 인근에서 장교들과 함께 회식하는 자리에서 박정희 소위가 이재복을 삼촌이라고 소개했소. 그러자 연대장 원용덕 중령이 ‘이런 상놈의 집안이 다 있나. 성이 다른데 어떻게 삼촌이라고 하느냐’고 호통을 쳤지. 그래서 박정희가 ‘이재복씨는 내 외삼촌입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오. 나는 박정희의 외가가 무슨 성씨인지도 알고 있소.”
김창동은 하우스만이 원용덕과 술집에서 나눴던 에피소드까지 꿰고 있는 것에 놀랐다. 미군 정보망의 촘촘함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육군 정보국 수사관실에 마주 앉아 있었다. 하우스만은 백선진을 제치고 종종 김창동을 별도로 찾았다. 공산당 체포 실적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에 격려차 직접 김창동을 찾아 격려하고, 때로 두툼하게 활동비를 제공했다. 김창동 역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하우스만을 무조건 도우라는 당부의 말을 들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형제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박정희, 최남근, 김종석, 이병주, 김학림, 황택림, 조병헌, 오민균, 이성구... 이들의 동태 파악했소?”
“파악 진행 중입니다. 최남근 박정희 김학림 오민균 라인은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들 비선 움직임을 체크했습니다.”
구체적 동태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동선은 이미 확보했다. 미군정의 정책에 불만을 가진 군 장교들을 편의상 리스트에 올리다 보니 그럴 듯한 계보로 보이고, 그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였다고 해도 선후배 관계 이상의 접선이 아니었는데도 도표를 만드니 아주 근사한 조직망이 되었다. 이것을 하나로 병렬시켜 모아 놓으니 커다란 계보로 보이는데, 줄줄이 체포하면 실적이 되는 것이다.
“박정희에 대해 특별히 유의하시오.”
“체크하고 있습네다.”
“그는 빈궁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태생적으로 부르주아지에 대한 반감이 있소. 그가 존경하는 형이 경찰 총에 맞아 죽은 슬픈 가족사가 미 군정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고 있소.”
“걱정 마시라요. 이재복과의 접선 내용도 파악하고 있습네다.”
“그 후의 동선이 중요하오.”
“물론이디요. 박정희가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훈련을 받고 있을 때(1946년) 대구 10.1폭동에 이어 구미에서 대대적인 무력 시위가 있었댔시오. 2000명가량의 군중들이 들고 일어나 경찰서를 습격하고, 경찰관과 관리, 친일파들의 집 86채를 불지르고 박살냈습네다. 이 과정에서 그의 형 박상희가 경찰관 총에 맞아 죽었댔디오. 경비대사관학교에서 훈련 중이던 박정희가 장례식이 끝난 며칠 후 조용히 대구를 다녀갔댔는데, 이때 그의 형 친구 이재복, 황태성을 만났댔디오. 고걸 우리가 첩자를 통해 간파했디오. 박정희는 형을 죽인 경찰과 그 배후인 미군에 대해 복수의 감정을 품게 되었고, 세상을 증오하게 되었댔디오. 아주 고약한 좌익계디오. 이때 오민균이 접선했댔이요.”
“병균은 전염성과 확장성이 높은 속성을 갖고 있소. 공산주의라는 병균이 전염성이 강하므로 군부 내에 가장 약한 고리인 젊은 청년장교들을 먼저 접근할 것이오. 감성 풍부한 자들이니 주의하시오. 그들은 현실에 불만을 품고, 늘 이상주의를 꿈꾸니까 현상을 늘 비판적으로 보고 있소. 알겠소?”
“네네, 알고 있디오. 경비대사관하교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해 나간 그의 첫 배속지가 춘천 8연대였댔디오. 병균을 퍼뜨릴 최적지였댔시오. 춥고 칙칙한 곳으로 배치된 것을 좌천으로 인식한 장교들이 앙심을 품었던 곳이디오. 그곳에서 신경군관학교 2기 동기생인 이상진(8연대 부연대장)을 만나구, 최남근, 김종석도 만났디오. 최남근, 김종석 두 사람은 앞뒤로 대구 연대장을 지냈댔시니 박정희는 고향을 자주 방문하면서 삼자가 서로 접선했을 것은 당연한 추론이디오. 나이두 비슷하구 생각도 같았댔시니 잘 어울렸겠디오. 이때 그의 형의 친구이자 남로당 군사부 총책 이재복을 만나구, 하재팔을 만나구, 황태성을 만나구, 그러면서 미국의 식민 지배를 변화시킬 음모를 꾸몄댔겠디오. 다른 한편으로 일본 육사의 훈련교범을 가지구서리 작전을 전개하면서 무장봉기 계획을 획책했댔을 거야오. 부하들로부터는 작전통이란 평판을 받구, 칭송을 받으니 그는 더욱 치밀하게 봉기의 수순을 밟아가는 것이야요. 청년장교들 멋모르구 따랐댔시오. 군인정신이 투철하구 실력파인데다 민족의식이 분명하여서리 모두들 그를 존경했댔디오.”
“어떻게 그런 정보를 다 파악했소?”
“좀더 들어보시라요. 박정희는 중위를 거치지 않고 대위로 승진해 조선경비사관학교 제1중대장으로 발령(1947년 9월27일)을 받구, 생도대장으로 활동했댔시오. 이 학교에 좌익 성향의 교관과 학생이 많았댔디오. 제1중대 2구대장 황택림 중위, 제2중대장 강창선 대위, 제2중대 2구대장 김학림 대위디오. 이들은 박정희가 교관으루 합류하자 휘발유에 불이 붙듯이 확 엉겨붙어버렸댔시오. 빨갱이 사상이 고렇게 무섭디오. 이때 3기 출신 홍순석과 김지회, 강문영(동해안 일대의 좌익 총책)같은 빨갱이 청년장교들이 나왔댔디오. 아 참, 표무원 강태무도 있었댔구나. 이자들은 모두 경남의 한 고향놈들이디오.”
“잘 헤아렸소. 나도 일부는 파악했소.”
하우스만은 김창동이 공명심이 많아서 조그만 것도 과장해 보고하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보고하자 칭찬했다. 계급이 아래고 나이도 대여섯살 아래지만 하우스만이 상관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박정희 주변에는 좌익 성향의 일본 육사 및 만주군관학교 선후배 장교들이 우굴대고 있대시니 결정적인 시간을 재고 있겠시오.”
“리스트는 완성되었소?”
“하모요. 일본 육사 출신 56기 김종석, 57기 박정희, 58기 박원서, 최주송, 59기 홍태화, 황택림, 60기 조병헌 이성유 김태성, 이정길, 김학림, 정정순, 61기 오민균이 있디오.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는 최남근(봉천 6기), 이상진(신경 2기), 이병주(신경 2기)디요. 이들은 학연과 지연으루 뭉쳐 있대시니 한 놈만 패면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엮어져 나오게 되어 있습네다. 두고 보시라요.”
그는 맞든 안맞든 많은 이름을 거명했다. 자기 실적 과시용이었다.
“여순 사건과 관련이 있는 걸 찾아냈소?”
“확신하는 바입네다. 서로 망을 보아주고 있습네다. 그래서 진압이 어렵습네다.”
“상호 뒤를 보아준다?”
“그렇습네다. 특히 젊은 것들이 설쳐대누마요.”
하우스만은 토벌군이나 반군 모두 의심했다. 한통속이라고 보는 것이었다. 그들은 가능한 한 충돌을 회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므로 작전다운 작전이 전개되지 못하고 있었다. 경찰력에 힘을 쏟을 후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서로 경쟁을 붙이면 성과를 올릴 것이다. 
하우스만은 한편으로 김창동이 일본군에서 미군으로 재빨리 군모를 바꾸어 쓰고도 혼란을 겪지 않고, 충성하는 것이 괴이했다. 가치관의 혼란이 있을 법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일본군 헌병 오장 시절엔 미제귀축(美帝鬼畜)을 섬멸하자고 외쳤을 텐데, 재빨리 변신해 충견처럼 맹종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라가 혹 소련에 먹히면 또 아라사의 졸개가 될 것인가. 그의 일의 숙련도를 높이 사는 한편으로 하우스만은 저도 모르게 그를 속으로 불신하고 경멸했다.  
-쥐새끼...
그러나 이런 자를 부리기는 너무나 쉽다. 작은 돈으로도 그의 영혼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김창동을 떠볼 장난기가 발동했다.
"제주 토벌을 학살이라고 하는데, 따지고 보면 그게 맞지 않는가?“
“네?”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눈알을 굴렸다.
“행태가 유태인 같은 타민족이 아니라 동족을 잔인하게 학살했다면 그것 또한 범죄지. 나치의 히틀러는 타민족을 학살한 것이고, 제주에선 조선인이 조선인을 학살한 것이니 더 야만적이잖소? 일본 제국주의 하에서도 이런 집단 학살은 없었지 않았나?“
“반역을 동족이냐 이민족이냐로 구분할 수 있습네까?”
“그게 반역이라고? 그렇게 보오? 일본도 이민족에 대해선 난징 대학살 같은 짓을 했지만 자국민을 그렇게 쓸어버리진 않았잖소? 일본도 군국주의에 저항하는 세력이 얼마나 많았소?”
“일본을 욕하는 것입네까?”
“욕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네까. 그러면 그렇군요.”
김창동이 비굴하게 웃었다.
“난 미국의 전략적 가치 때문에 조선을 제압하기 위해 전략을 펴나가는 것이지만, 한반도의 지도층은 동족을 동족으로 보는 것 같지가 않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동족을 학살하는 것 같단 말이오. 과하다고 보지 않소? 히틀러나 일제같이 타민족을 침략해서도 학살이 정당화될 수 없는데 그들보다 더 뜬단 말이오.”
“시험하는 겁네까? 나는 복잡하게 사는 인간이 아닙네다.”
어떤 누구도 하우스만을 냉혈 반공주의자라고 비판하지만, 한국의 경찰수뇌나 우익 청년단, 지도층을 보면 그런 의문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무방비 상태의 민간인들을 벌레 취급하며 죽이는 것은 바로 그들이다. 처음엔 미국의 조종을 받았으나 어느 시점부터는 자발적으로 토벌과 학살을 선제적으로 했다. 때로 미군이 가로막을 정도였다. 그래서 한국의 경찰과 군인은   잔악하다는 말이 돌았다. 자기 힘이 모자라면 외국 군사력을 끌어들이지만, 일단 제압하고 나면 미친 듯이 밟는다. 이 통에 미국의 남한 통치는 차도살인을 통해 이백프로 달성되고 있었다. 
-강대국의 이익 앞에서 칼춤을 추며 백성들을 누르고 그들 자신 또한 권력의 단맛을 취한다? 우리와 윈윈하겠다?
하우스만은 나름의 인생관을 갖고 있었지만, 한국 사회에 대해서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더 복잡한 사람이었다. 
하우스만은 한국군 수뇌부의 고문일 뿐이었으나, 그는 한국군의 모든 군사조직 개편과 인사에 개입했다. 사령관을 임명하는 일, 부대를 배치하는 일, 대대, 연대, 사단, 군단 사령부의 역할과 임무를 미 군사고문관의 이름으로 체크했다. 대부분 막후에서 조종했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전면에 나타나서 문제점을 해결했다. 그중 군 고위급이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는지, 여자 관계, 군수품 착취 등 약점이 있는지를 파고들었고, 그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까지 체크되었다. 부패하고 여자 관계가 복잡한 것은 수용하지만, 미군에 대한 비판과 민족주의 성향은 용납되지 않았다. 
게릴라 토벌작전 때에는 빨치산들을 몇 명이나 체포하고 죽였는지, 부상자는 몇 명인지 등을 체크하는 일도 하우스만의 몫이었다. 하우스만은 고문이었지만, 그는 한국군의 총책임자였다. 
이와 같은 활약상을 근거로 김득중(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의 논문 ‘여순사건과 제임스 하우스만’의 여순 사건 관련한 리포트를 인용하는 것도 현대사의 질곡을 이해하는 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1948년 10월 19일 저녁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는 제주도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하였다. 지창수 상사가 지도한 14연대는 이날 저녁 여수로 진입하여 경찰서와 철도경찰, 관공서를 순식간에 점령했고, 다음 날 아침에는 통근 기차를 이용하여 순천으로 북상했다. 광주 4연대가 여수주둔 14연대 반란소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다음날인 20일 오전 8시20분이었고, 이 사실이 서울에 보고된 것은 9시였다. 이날 아침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에게 반란 소식이 보고되었고, 로버츠 고문단장은 즉시 관계자로 구성된 회의를 주최했다. 이 회의에는 미군측에서 하우스만(미 군사고문단 G-3), 존 리드(미 군사고문단 G-2), 트레드 웰 대위(전 5여단 고문), 프라이 대위(현 5여단 고문)가 참석했고, 국군측에서는 채병덕 국방부 총참모장, 정일권 작전참모부장, 백선엽 국방경비대 G-2 책임자, 고정훈 국방경비대 정보장교가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는 여수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기동작전군을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이 회의를 주도한 것은 미 군사고문단이었다. 참모총장과 국방경비대 총참모장도 고문단장의 호출에 불려나왔다. 왜냐하면 비록 이승만 정부가 세워지고 대한민국 정부가 독립을 선언했다 하더라도 군대 지휘권은 1948년 8월24일 이승만-하지 간에 체결된 협정에 따라 여전히 미군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우스만은 미 임시고문단을 대표하는 작전책임자로, 그리고 송호성 총사령관의 고문자격으로 이 기동작전군 사령부에 배속됐다. 국군은 반란군 세력을 진압할만한 교통․통신장비나 작전 경험이 전혀 없었다. 실제로 미 군사고문단은 반란이 터졌을 때 무기, 군수, 훈련이 부족한 한국군이 과연 이를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에 강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미 임시군사고문단은 일단 기동작전군을 구성한 다음에는 장비와 물자를 실어 날랐다. 하우스만이 광주에 파견되는 것과 동시에 화차 2량에는 무기‧화약‧식량 등이 실려 광주로 떠나갔다. 국방경비대는 대부분 일본식 38식, 99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제주도 파병을 위해 14연대 정도에만 M-1이 지급된 형편이었는데, 미군은 사건 진압에 파견된 부대원들에게 모두 미24군 탄약고로부터 지원된 M-1 소총으로 무장시켰다. 제대로 된 비행기 한 대 가지지 못한 국군은 미군에게 수송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의 C-47 수송기는 하루 한 번씩 서울-광주간을 오갔다. 광주에서 서울로 올리는 1일 작전 보고와 서울에서 내려오는 1일 작전 명령이 이 비행기에 실려왔고, 탄약․무기․식량 등을 수없이 실어 날랐다. 어느 하루는 쌀 6톤, 육류 20박스를 싣기도 했다. 쌀은 한국산이었지만 육류는 미국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10대의 L4 경비행기도 지원되었다. 5대는 광주에 배치되었고, 5대는 전주에 두어 부대간의 연락용으로 쓰거나, 여수․순천을 공중 정찰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물자 지원에도 불구하고 여수와 순천은 즉시 진압되지 않은 채, 초기에는 진압군이 반란군에 협조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미군 수뇌부는 “이승만 정부가 곧 전복 당할 처지에 있다. 여수는 어떤 값을 치루더라도 진압해야 한다”고 진압군을 재촉했다.
하우스만은 여수 14연대의 최초 봉기 때 골수 추종자는 불과 40명에 불과하며, 전투에서는 첫 조우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일차공격을 가해 반란군의 자만심을 꺾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지창수를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은 북한과 호응하여 남한에 항상적인 소요를 일으킬 빨치산 유격투쟁을 조직적으로 준비하는 것이라고 파악했다. 하지만 여순사건의 발발은 조직적이거나 계획적인 것은 아니었다. 14연대 반란은 공산당 조직이 사전에 관련되어 있지 않았고, 여수의 공산주의자들조차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하우스만은 여순사건을 북한과 연관지어 사고했고, 그렇기 때문에 지리산 입산을 극구 저지하려 했던 것이다. 하우스만에게 주요한 것은 여수․순천의 신속한 탈환만이 아니라 반란군이 산 게릴라로 침투할 것이 확실해 보이는 백운산, 지리산 등의 퇴로를 우회적으로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한 정부와 무쵸대사, 로버츠 단장 등은 여수․순천을 탈환하는 것에 변함없는 우선 순위를 두고 하우스만의 건의를 채택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하우스만의 판단이 옳았다. 14연대 반란군들은 지리산 등에 입산했고 장기 게릴라 투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우스만이 판단을 내리게 된 근거는 그릇된 것이었다. 여순사건 이후에 본격화되는 게릴라 투쟁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기보다는 상황에 이끌려 벌어진 측면이 강했기 때문이다. 
여순사건 진압은 14연대 반란군과 진압군만에 한정된 전투는 아니었다. 진압군 작전은 정규 14연대 반란 군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전 시민을 반란군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모두 적으로 삼는 무차별적인 공격이었다. 그 결과 여순진압작전은 무수히 많은 민간인 희생을 불러왔다. 10월27일 여수 전 시내를 포위하면서 작전을 시작한 진압군은 기관총을 난사하며 잔여 세력의 저항을 제압하는 동시에 시민을 집밖으로 몰아내고 민가를 샅샅이 수색했다. 반란군으로 의심되는 조금의 저항이라도 보이면 (집에) 기관총을 쏘아댔고, 조금이라도 의심나면 사살되었다. 순천과 여수를 점령한 진압군은 제일 먼저 전 시민을 국민학교 같은 공공장소에 모이도록 명령했다. 나오지 않으면 반란군으로 간주된다는 말을 듣고는 만일 진압군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서 모두 모이라는 장소에 나왔다. 당시 심사의 기준이 된 것은 교전중인 자, 총을 가지고 있는 자,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자, 흰색 지까다비(일할 때 신는 일본식 운동화)를 신은 자, 미군용 팬티를 입은 자, 머리를 짧게 깎은 자였다. 주민들 가운데 흰 고무신을 신고 있는 사람도 반란군으로 간주되어 끌려 나왔다. 의심되는 사람의 변호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압군의 협력자 색출과정은 12월 중순까지 약 한 달 반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이 때문에 시내는 공포분위기로 완전히 뒤덮였다. 위헌적인 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협력자 색출과정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수단이나 방법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진행되었고,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의 기본권리조차 무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혐의 사실을 증명하는 주위 정황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이나 기준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협력자 색출은 단지 믿음직하지 못한 혐의만으로도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에 의해 희생된 인명의 숫자조차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이러한 유혈 과정 속에서 이승만 정권은 소장파 국회의원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반공체제 확립의 법적 지주를 마련한 셈이었다. 학교에서는 학도호국단이 만들어졌고, 좌익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보도연맹에 가입해야만 했다. 보도연맹 가입자들은 한국전쟁 직후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좌익수들과 함께 제1차적인 학살 대상이 되었다.

육군 정보국 정보관 고정훈의 회고록에 따르면, 하우스만은 1946년 7월 26일 남한에 첫발을 딛은 이래 국방경비대 고문관․ 미군사고문단장 고문 자격으로 ‘한국군 창설의 아버지’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한 사람의 덩치 큰 미군 대위에 불과했지만, 해방 직후부터 30여년동안 한국정치의 배후 에서 일국의 대통령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힘이 막강했다. 그 자신의 회고록 제목 또한 그렇게 지었다.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당돌하고 한국인에겐 치욕으로 보이는 이 제목은 그러나 한 점 틀림이 없는 사실이었다. 일개 미군 대위가 한국 대통령과 권부와 군부를 움직일 수 있었다. 그를 통해 한국이 얼마나 미국에 종속적인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하우스만은 남부 기독교도답게 원리주의 종교 담론에 충실한 사람이고, 그 결과 공산당이라면 경기부터 일으키는 사람이었다. 한국의 강경 반공정권이 들어서게 된 배경은 하우스만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승만이 권력 장악을 위해 북을 지렛대 삼아 빨갱이 사냥을 하는데 하우스만은 좋은 동조자였던 것이다. 
사실 해방 직후 북의 위협은 그렇게 크다고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의 위협을 극도로 끌어올려 강권통치를 착근시키는 수단으로 삼았다. 한국의 통치 세력은 국가 폭력에 저항하는 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여 제거하면서 독재권력을 강화시켰던 것이다.    
 
“이봐, 가나?”
늦은 아침 제주로 가는 배를 타려고 부둣가로 나가는데, 저만치에서 누군가 비틀거리며 걷던 사람이 오민균을 불렀다. 돌아보니 박정희였다. 그는 벌써 새벽에 나간 뒤 해장술을 한 모양이었다.
“귀대할까 하다가 해장술부터 마셨지.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 같아서 참담하다. 내가 피해다녀야 후배들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자, 아침 먹자.”
간밤의 숙취에 다시 해장술을 마셨으니 그는 여전히 취해 있었다. 그들은 선창의 해장국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정희는 또다시 병술을 시켰다. 그의 얼굴에 지친 흔적이 역력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사람처럼 그는 처연해있었다. 
오민균은 새삼 그가 궁금했다. 그는 왜 여기 쓸쓸한 거리에서 헤매는가. 야심가진 장교가 막다른 골목에서 허우적거리는 몰골이 무엇인가. 오민균은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교시켜달라고 혈서지원서를 보낸 사실을 알고 있다. 일본 육사 교정의 게시판에 그의 육사 입교 사연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동안 덮어두었지만 오늘은 묻고 싶었다. 변신 치고는 너무도 극적이다. 그때와 지금이 너무도 달라보인다.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에 따르면, 박정희는 "한 명의 만주 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습니다"라는 편지를 만주군 당국에 보냈다.   
박정희는 문경 보통학교 훈도(교사) 재직 중 만주국 군관을 지원했다가 연령 문제로 1차 탈락하자 재차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와 진학을 간절히 소망하는 내용의 편지를 동봉하여 지원 서류를 보냈다. 
당시 <만주신문>은 "29일 치안부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공립소학교 훈도 박정희(23)군의 열렬한 군관 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가 송부되어 계원(係員)들을 감격시켰다"고 보도했다(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인용).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중략) 한 명의 만주 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일본 육사 홍보게시판에서 ‘선배들의 애국충정 사례’의 하나로 게시된 이런 글을 본 기억이 있었던 오민균은 그를 만나면 꼭 한번 물어볼 생각이었으나 기회를 좀체 잡지 못했었다. 
“선배님, 만주 군관학교 입학시험을 위해 학교측에 혈서를 써서 보낸 적이 있지요?”
“어떻게 알았나?”
취중인데도 박정희가 주춤 했다. 그러나 잠시 후 조그맣게 웃으며 대답했다. 
“궁금해? 나는 연령 때문에 힘들다고 보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간절한 소망을 혈서로 써서 보냈지. 그것이 전부야. 어떤 일이건 목표를 세우면 달성하고 보자는 것이 내 신념이었어.”
“수단을 가리지 않고요?”
“당연하지.”
“그때와 지금이 너무도 다릅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본 것 같습니다.”
“날 이중인격자로 보아도 어쩔 수 없어.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나는 이루어야 숨을 쉬니까. 내가 숨을 쉬는 존재가치는 어떤 무엇이든 목표를 설정하면 반드시 이루겠다는 야망이야.”
“지금 선배님이 활동하시는 것과 앞뒤가 안맞는 것 같은데요?”
“모든 진리는 고정 아닌 것이 원칙이야.”
“선배님의 그것이 진리와 동일시되는 사안입니까?”
“이 새끼가 술 처먹다가 뭐하자는 짓이야? 까불래?”
그가 갑자기 화를 냈다. 그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나? 오민균이 잠자코 있자 그가 말을 이었다.
“넌 인생을 덜 살았어. 심각하게, 어렵게 설정할 필요가 없어.”
그답지 않은 발언이다. 박정희에 대한 선망이 조금씩 실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오민균은 박정희의 신념의 체계나 올곧은 인생관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를 존경했고, 따랐다. 뒤늦게 민족의 편에 서고자 하는 태도는 그의 힘겨운 가족사에서 연원하는 것이라고 보았고, 그래서 출신 성분이 다를지라도 오민균은 그의 정신을 흠모했다. 정의감도 그런 환경에서 배태된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불분명하다. 왔다갔다 한다. 술에 취하면 더욱 진실이 오락가락한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 술 취했을 때의 그는 다분히 이중적이다. 정제되지 못한 것이 변절과 변신으로도 갈 수 있다는 뜻인가...
“오 소령, 자기 야망을 달성하려면 수단이 다를 수 있데이. 필요에 따라서는 일관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야.”
화를 낸 것이 미안했던지, 박정희가 변명하듯 이렇게 말했다.
“모순에 의연히 맞서는 선배님을 존경합니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시대를 돌파하려는 모습이 저에게 용기를 줍니다.”
“그래. 잘 말했다. 나 역시 그래. 하지만 나라가 정리가 안되어 있어. 모순 투성이고 혼란 투성이야.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모르겠어. 왜 이렇게 된 줄 아나?”
“나라 관리가 엉망이기 때문이겠지요. 뒤죽박죽입니다. 미국이 일부러 그렇게 몰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이민족이 우리를 알면 얼마나 알겠나. 그렇다면 우리가 잘해야 하는데, 그들 똥구녕빠는 스킬이 있는 놈들만 출세하니 말이야. 그래, 미국적 가치가 뭐라고 보나?”
“자유 정의 평화 헌신을 추구한다는 나라 아닙니까.”
“허튼 말 말아. 미국은 총을 들고 근육질의 몸을 과시하는 깡패들이지. 강철같고 확고부동하고 자신감있고 강하다는 마초 마인드야. 이것으로 흑인과 히스패닉계, 아시아인을 깔보는 전형성을 많여주고 있지. 영화를 보면 라틴 아메리카인들이나 아시아인들은 언제나 하인이고 거렁뱅이고 무식한 자이고, 추잡한 종자들이지. 지금 고문관으로 들어와있는 그 자가 그렇지 않나. 우리를 벌레 취급하며 조선 관리를 하고 있어. 초콜렛으로 우쭐대잖나. 우리의 전통적 가치와 예법을 무시하고, 힘만 믿는 새끼지. 그런데 그런 자의 똥구녕을 핥는 개새끼들이 영달하고 있단 말이다. 나라를 그르치고 있단 말이야!”
흥분하자 그는 계속 큰소리쳤다.
“우리가 미국을 너무 선으로 본다. 오류가 거기서부터 생겨. 친일세력, 친미세력이 선봉에 서서 외치기 때문이지. 환멸을 느낀데이. 경비대사관학교 시절, 사상적으로 혼란을 겪지 않은 생도가 어디 있나. 미국을 적으로 알고 싸웠던 일본군 출신과, 미군을 우군으로 두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일본에 대항해 싸웠던 항일운동 세력의 유격대와 국부군, 팔로군, 광복군 출신, 순수 민간인 출신과 좌우익 세력들을 보라. 누가 진정한 그들의 우군인가. 그런데 지금 그들은 정반대로 국정을 수행하고 있어. 그들과 함께 일제에 저항했던 세력이 몰리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만주국에 혈서 써서 보냈다고 오 소령은 나를 은연중 비판했어. 변명하자면,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어. 헌데 지금 국가 정체성이 뭔지 모르겠다,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헷갈리지 않나? 사상적 자유를 누린다, 그러다가 어느날 좌익 척결이라고 경찰과 우익 청년단을 동원해 기준도 없이 체포하고 고문하는 공포정치를 편단 말이야. 과정에 대한 설명도 없어. 그렇다면 내가 좀 친일했다고 불의하나? 거기에 비하면 거기에 놀아나는 국내 세력들이 더 추하지 않나?”
“미제에 놀아나는 세력이 문제라는 것입니까.”
“당연하지. 국민 다수가 따르는 사회주의적 국가정체성을 뚜렷한 설명도 없이 총독부 말을 듣고 짓뭉개고, 그들이 저지른 통치방식으로 민족주의자나 사회주의자를 처단하잖나. 누가 승복하겠나. 나는 내가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던 과거를 씻기 위해 민족군대가 되는 데 노력하고 있다. 나는 그렇다 그 말이야. 나라고 고민이 없겠나. 그들보다는 내가 훨씬 순결해.”
“선배님도 좋은 자리가 주어지면 그들의 하수인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자리를 얻을 수 없으니까 안티로 돌아선 것 아닙니까?”
“이런 나쁜 새끼!”
점잖다는 그에게서 험한 욕이 튀어나왔다. 그의 콤플렉스를 자극하니 그도 참지 못하는 모양인가...
“그냥 해본 소립니다.”
오민균이 금방 사과했다. 너무 나갔다 싶은 것이다. 
“사과하나?”
“그렇습니다.”
“받아주겠어. 대신 똑똑히 살라우.”
“알겠습니다,”
“내 다시 길게 얘기하겠다. 우린 역사의 낙관을 믿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 오늘날 세계의 지성적 흐름은 비관주의 역사관에 매몰되어 있지. 왜 그러는 줄 아나?”
“왜 그렇습니까.”
“지금 비관주의적 역사관은 미국이 주도해오고 있지. 석유 메이저, 군산 복합체, 월가와 주류 언론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앵글로섹슨과 유대계들이지. 이들이 비관주의 역사관을 유포하며 장사를 하고, 세계 관리를 해오고 있어. 우리도 그런 역사의 비관주의와 허무주의, 패배주의 속에서 살게 되었지. 비관주의적 역사관에서 출발한 해방지대라는 어두운 터널을 관통하고 있지.”
“그렇다면 왜 비관주의가 대세일까요?” 
“빤하지않나. 낙관으로 희망을 주는 정치보다 비관으로 공포를 만들어서 이익을 취하는 정치가 더 쉽기 때문이지.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비관에 의한 공포 바이러스’에 세계인들이 알게 모르게 겁먹고, 그에 대비하느라 과도한 안전 비용, 국방 비용, 갈등 비용 등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는 거야. 우리가 지금 그 덫에 걸려들었어. 체제 전복 세력이 북과 결합해 국가 기반을 흔들고, 사회를 무너뜨린다는 비관주의를 기반으로 한 겁박에 순치되어 살게 된 거야. 일제때 국기를 흔드는 대상은 좌익으로 몰아 사찰계가 집중적으로 잡아들인 것과 똑같은 상황이야. 국민은 일본 제국주의에 순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체제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으며 생각없이 그 속에서 열심히 살았지. 일제 치하에서 어찌어찌 일본놈 마름으로 선택되어 권력을 쥐고, 또는 부자가 된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의 ‘기적의 부적’으로 달고 다니며 다시 세상의 중심이 되었고 말이다. 지금은 그들이 기득권이 되어서 세상의 진화를 거부하고, 양심세력을 조롱하고 야유하고 있지. 그런 가운데 그들은 자꾸 도태되어가고 있고...”
“옳은 길은 아닌데, 왜 그 방향으로만 갑니까.”
“그러나 낙관하라. 미국이 ‘불안’과 ‘공포’라는 집단 심리로 장사를 해오지만 낙관주의는 역사의 화살을 추진시키는 활과 같으니까.”(이상 그레그 이스터부룩의 ‘비관이 만드는 공포, 낙관이 만드는 희망’ 일부 인용).
“현학적인데요?”
“물론 사변적이지. 그러나 틀린 말이 아니잖나. 비관주의적 역사관에서 출발한 해방 시대를 끝내고 낙관주의적 상상력으로 한반도의 비전을 설계해야 하는 시점에 왔어.”
“반통일 거부 세력이 저렇게 강고하게 대오를 갖추고 있는데도요?”
“거부세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역설적으로 더 큰 힘의 탄력을 받는 것이야. 한반도에 새로운 바람이 부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보는 세력이 있다면, 그 반동력으로 그에 대한 거부세력도 강고해지게 되어있는 것이지.”
“하지만 일제 강점기부터 벽을 쌓아온 기득권 카르텔이 있잖습니까. 권력, 검찰, 사법부, 고급관료, 자본가들... 지난 과오를 딛고 바른 방향으로 가면 되겠지만, 자기 반성을 자기 패배, 또는 자기 부정으로 인식하고 여전히 역사를 비틀고 통일의 도정을 조롱하며, 과거로 시계바늘을 돌리려는 세력들이지요.”
“그렇게 역사의 진전을 방해하고 있지만, 해방의 도도한 물결은 역사를 앞으로 전진시키고 있다. 이것을 모르고 있다면 바보지.”
“선배님이 나라를 이끌고 분단과 독재를 강화하는데, 이를 저항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어떻게하겠습니까.”
“넌 나를 시험하나? 장난하니?”
그가 또다시 화를 냈다.  
“선배님의 낙관주의를 믿습니다. 늘 세상을 어둡게만 보시더니 그런 면모를 보이시니까 저 역시 놀라서 반문해본 겁니다. 어찌됐든 우리는 지금 몰리고 있습니다. 그게 엄연한 현실입니다. 모순을 극복하는 스킬들이 부족해서 더욱 빌미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소련의 위성국가가 북한에 수립되면서 북한 공산정권을 고리로 남한 내부를 공포사회로 몰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박정희가 소주를 단숨에 목에 탁 털어넣었다. 그리고 연거푸 두잔을 더 마셨다. 그의 눈이 몹시 충혈되어 있었다. 지향하는 가치와 이상이 어떻든간에 현실은 지금 그들이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계속>

이계홍 작가, 언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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