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 칼럼] 새해의 '희망 고문'

허영섭 2020. 1. 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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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새해를 맞아 ‘쥐꿈’을 꾼다. 덫에 걸린 쥐 한 마리를 풀어줬더니 커다란 보물창고로 안내했는가 하면, 자식이 귀한 집안에 자손이 번성하도록 처방을 내렸다는 식의 얘기다. 부지런하고 새끼를 많이 낳는 쥐의 운세를 빌어 우리 사회적 현안들이 풀리기는 바라는 쥐띠해의 소망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몇 마디 덕담을 주고받는 것만으로 위안받기에는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다는 게 우울한 현실 진단이다. 여간해선 해결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희망을 갖는다는 자체가 고통일 수밖에 없다.

경기가 바닥을 모르게 가라앉고 있다는 것부터가 심각하다. 기업과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걱정은 벌써 오래 전부터다. 도심의 번듯한 점포들도 권리금을 포기한 채 문을 닫아걸고 있다. 직장인들이 점심값을 아끼려고 ‘혼밥’을 하고 있다는 정도라면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빈둥대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오죽하면 생활고에 못 이겨 식구들이 함께 극한 선택을 했다는 소식이 끊이지 않고 있을까.

새해의 ‘희망 고문’은 이처럼 먹고사는 문제에서부터 시작된다. 정책 책임자들의 셈법에 따르면 풀려도 진작 풀려야 했건만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올해는 경제가 잘 돌아갈 수 있을까. 기업 규제를 풀고 노조 중심의 정책을 바꿔달라는 기업인들의 아우성이 더욱 커지는 것을 보면 답변은 부정적이다. 보따리를 싸들고 해외로 공장을 옮기려는 움직임도 마찬가지다. 가라앉는 배에서 먼저 줄지어 뛰어내린다는 쥐떼의 위기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높으신 분들께서는 안심하라는 진단만 내놓고 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닮아가는 디플레이션 공포가 눈앞에 어른거려도, 6000억 달러의 수출탑이 불과 1년 만에 무너졌어도 “아직 괜찮다”는 답변뿐이다. 그러면서도 세금 퍼붓기 정책은 계속 나열되는 중이다. 진짜 걱정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일단 민심의 동요만큼은 막고 보자는 건지 가늠하기 어렵다.

정파와 이념에 따라 갈라지고 찢어진 사회 현실로 눈길을 돌리면 한숨은 더욱 깊어지기 마련이다. 과거 적폐를 청산하고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애초의 결연한 분위기는 어디로 갔는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아무리 ‘가재는 게 편’이라지만 그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올바른 방향일 수는 없다. 그럴수록 기댈 데 없는 ‘흙수저’들의 허탈감만 늘어갈 뿐이다.

국민들의 불만과 걱정은 여기서 훨씬 더 나아간다. 건강을 위협하는 미세먼지 대책이나 국민연금 고갈 문제도 보통이 아니다. 정부의 극약 처방에도 불구하고 널뛰는 듯한 아파트값도 피로를 끼치는 요인이다. 확대되는 복지정책의 부담으로 정부가 빚더미에 오르는 것도 결국에는 국민들이 처리할 문제다. 여기에 끝내 ‘새로운 길’을 선언하고 나선 북한의 핵문제까지 굳이 추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국내외 문제에서 정책이 일방적으로 추진되는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한 가지 기대할 수 있다면 오는 4월 총선에서 참신한 얼굴들을 뽑아 지금의 편협한 정치 구도를 쇄신하는 것이다. 지난 연말을 보내면서 국민들은 국회의 파행 과정을 뚜렷이 지켜봤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현명한 선택을 내릴 수 있을 것인지도 장담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분명한 것은 행복을 누려야 할 국민적 권리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정치 지도자들은 새해에는 단연코 모두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며 또 약속을 늘어놓고 있다. 정부 정책이 현실과 동떨어져 서로 못 살겠다고 나자빠지는데도 궤도를 수정할 생각은 없이 자기 고집만 내세운다면 공수표로 끝나기 십상이다. 우리는 과연 연말에 이르러 지금보다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인가. 이루기 어려운 희망으로 마음의 고통만 더해지는 게 아닐까 벌써부터 걱정된다. <논설실장>

허영섭 (gracias@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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