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이끼, 꽃잎, 개미까지.. 먹을 수 있는 '접시 위의 예술' [인류학자 이민영의 미식여행]

이민영 | 인류학자 2020. 1. 1.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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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덴마크 코펜하겐 ‘뉴 노르딕 퀴진’

제철 채소와 허브를 올린 야생닭 요리.

미식의 불모지가 ‘미쉐린 별’이 빛나는 도시가 되기까지

북유럽서 나는 재료 본래 맛을 살린 ‘뉴 노르딕 퀴진’이 있었다

순수하고 조화로우며 절제된 맛…예술작품에 가까운 요리들

프랑스·이탈리아의 화려함과 달리 미니멀리즘 강조된

북유럽의 디자인은 그들의 음식과 닮은꼴이다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에 갈 일이 생겼다. 코펜하겐에는 2010·2011·2012·2014년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리스트에서 1위를 4번 차지한 노마(NOMA)라는 레스토랑이 있다. 미식의 불모지였던 덴마크에 ‘뉴 노르딕 퀴진’ 트렌드를 만들어 전 세계의 미식가들을 불러들이면서 덴마크의 관광산업은 물론 농업·어업·낙농업까지 성장시킨 곳이다. 오너 셰프인 르네 레드제피는 2012년 ‘타임’이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뽑혔고, ‘뉴요커’의 표현에 따르면 “햄릿 이래로 가장 유명한 덴마크인”이 되었다.

■ 미쉐린 별이 빛나는 도시

제라늄의 주방 한가운데서 요리하는 셰프 라스무스 코포에드.

덴마크 코펜하겐에는 노마를 비롯해 미쉐린 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이 17곳이나 된다(2019년 기준). 그동안 전 세계에서 음식이 맛있기로 유명한 도시들을 다녀보니, ‘미식도시’가 발전하는 데는 3가지 핵심 조건이 필요해 보였다. 자연환경에서 나오는 풍부한 식재료, 여러 문화권에서 온 식재료와 사람들이 섞이며 융합될 수 있는 역사와 문화, 왕족·귀족들이 만든 미식전통 혹은 현재 가처분소득이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문화. 이런 조건을 두루 갖춘 유럽 국가로는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가 대표적이다. 북유럽은 겨울이 일 년의 절반을 차지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식재료가 빈약하고, 서유럽이나 남유럽처럼 사람과 문화가 다양하게 섞이지도 않았다. 북유럽 사람들은 검소하고 소탈한 라이프스타일로 유명하지만,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인들처럼 먹고 마시는 것에 목숨 건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척박한 음식문화에서 어떻게 갑자기 세계적인 레스토랑들이 나온 것일까?

신선한 재료들로 가득한 제라늄의 식품저장고.

너무나 궁금해서 코펜하겐의 레스토랑들을 찾아보니, 제라늄(Geranium)이라는 곳이 눈에 띄었다.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순위가 2013년 45위에서 2019년 5위까지 뛰어오른 혜성 같은 곳이다. 미쉐린 스타는 노마가 2스타인 반면 제라늄은 3스타다. 미쉐린 3스타(2016년)를 받은 최초의 노르딕 레스토랑이자 덴마크 유일의 레스토랑이라는 점까지 감안하면 제라늄이야말로 더욱 가볼 만해 보였다. 미식가 선배 중에서도 제라늄을 추천하는 이가 더 많았다.

■ “먹을 수 있는 예술”

북유럽에 자생하는 꽃과 식물을 다양하게 활용한 디저트.

제라늄은 국립경기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8층 건물에 위치해 있었다. 소박하지만 환한 정사각형 공간에는 테이블 몇 개가 한눈에 보이도록 놓여 있었고, 제일 안쪽에는 오픈 키친이 펼쳐져 있었다. 고기가 숙성되고 있는 재료실을 포함한 식당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나오니, 셰프 라스무스 코포에드와 직원들이 쾌활하게 웃고 떠들며 요리를 하고 있었다. 흰 테이블보 위에는 봉투에 담긴 편지가 놓여 있었다. “저희 미식의 우주에 여행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제 당신은 채소, 허브 그리고 이 작은 나라를 둘러싼 빛나는 바다에서 나온 생선, 조개에 엄청난 열정을 가진 주방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편지에는 이 모든 요리가 환경보호를 위해 생명역동농법으로 키운 유기농 재료로 이루어져 있다고 쓰여 있었다. “먹읍시다, 마십시다, 웃읍시다, 춤춥시다.” 초대하는 문구는 멋있었지만, 그 바로 아래에 쓰여 있는 가격 때문에 웃을 수가 없었다. 애피타이저 5가지, 요리 7가지, 디저트 4가지, 스위츠(sweets, 사탕 등 단 과자류) 2가지 등 총 18가지 요리로 구성된 ‘제라늄 여름 우주’ 코스는 2500크로네(약 43만원)였고, 와인 페어링 코스 3종류는 각각 1400~4200크로네(약 24만~72만원)였다. 와인 전통도 없는 나라에서 음식값보다 비싼 와인을 마시는 것은 위험해 보였다. 대신 다른 어느 나라의 식당에서도 보지 못할 ‘여름 우주 주스’ 페어링 코스를 시켰다. 그린 애플과 레몬 타임, 녹차와 타라곤(허브의 일종), 예루살렘 아티초크와 우롱차, 체리와 쇨(적조류의 일종), 블랙베리와 너도밤나무, 괭이밥, 스파클링 진들딸기(cloudberry) 등 7가지 주스가 나오는데, 가격은 750크로네(약 13만원). 서유럽에서 그간 맛보았던 와인 페어링처럼, 음식과 기가 막히게 페어링된 주스가 맛을 폭발시켜주기를 기대했지만, 생각보다 절제된 맛이었다. 북유럽에서 나지 않는 재료를 배제해서 그런지 올리브 오일이나 지방이 풍부한 고기의 맛은 없었고, 약간의 생선, 캐비어, 닭고기 외에는 고기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서유럽과 남유럽에서 느꼈던 풍부한 풍미는 없었다. 처음에는 약간 실망했지만, 생각할수록 내가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친 맛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 같았다. 이 셰프들도 프랑스 요리가 기반이 된 미식에 반기를 들고 원재료의 맛을 살린 미니멀리스틱한 요리를 창조해냈기에 세계적인 환호를 받은 것 아니던가. 미쉐린 가이드북에 의하면, 제라늄은 최상급의 유기농 식재료를 특별하게 관리하여 순수하고 조화로우며 기술적으로도 노련한 요리를 창조한다.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홈페이지는 “먹을 수 있는 예술”이라고 표현했다. 작은 꽃과 허브들이 촘촘하게 들어간 요리들은 보면 볼수록 북유럽의 자연이라는 공간과 여름이라는 시간이 담긴 ‘예술작품’에 가까웠다.

■ 셰프들의 선언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1위를 네 번이나 차지한 레스토랑 ‘노마’가 식당 옆에 꾸린 도시농장.

전 세계에 새로운 미식 유행을 전파한 뉴 노르딕 퀴진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뉴 노르딕 퀴진은 2004년 코펜하겐에 막 오픈한 노마의 두 셰프인 르네 레드제피와 클라우스 마이어의 주도하에 노르딕 국가들의 셰프와 음식전문가들이 코펜하겐에 모이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이 그해 발표한 ‘뉴 노르딕 음식 선언’ 10개 조항에는 오늘날 그들이 추구하고 음식으로 표현하려는 핵심 철학이 담겨 있다. 함께 음미할 만한 내용이라 직접 번역해봤다.

“순수함, 신선함, 그리고 우리의 지역에서 함께하고픈 윤리를 표현할 것. 우리가 만드는 식사에 계절의 변화를 반영할 것. 우리의 기후와 땅, 물의 특성에서 나온 식재료에 기반한 요리를 중심으로 할 것. 건강과 웰빙에 대한 현대적 지식과 좋은 맛에 대한 요구를 결합할 것. 노르딕 생산물과 그 생산자들의 다양성을 진작시키고 그 밑에 깔린 문화를 퍼뜨릴 것. 우리 바다와 농장, 야생에서 동물복지와 건전한 생산 과정을 촉진할 것. 전통적인 노르딕 음식의 새로운 의미를 발전시킬 것. 외국에서 온 자극을 최고의 노르딕 음식전통과 결합시킬 것. 지역적인 자족감을 높은 품질의 지역적 재료를 나누는 것과 결합시킬 것. 노르딕 국가에 사는 모든 사람을 위해 소비자, 요리 장인, 농업, 어업, 음식 소매와 도매 산업 종사자, 연구자, 교사, 정치인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권위자들과 힘을 합칠 것.”

■ 이끼와 꽃잎을 접시에 담기까지

어떤 디저트는 숲속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신토불이’ 구호와도 통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 지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보편성을 추구하는 이런 철학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인류학자로서 내 첫 번째 가설은 이 셰프들이 세계 미식의 기본이 되는 프랑스식 요리문법을 마스터했기 때문에 과감하게 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제라늄의 셰프인 라스무스 코포에드는 세계 최고의 요리대회로 꼽히는 프랑스의 보퀴즈 도르(Bocuse d’Or)에서 금·은·동메달을 모두 획득한 유일한 사람이다. 노마의 르네 레드제피는 스페인 엘불리(El Bulli)와 미국의 프렌치 론드리(French Laundry) 등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쌓아왔다. 그는 자신의 식당을 오픈한 뒤 1년 만에 그때까지 배워온 것에서 떠나도 되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 후 푸아그라, 캐비어, 올리브 오일, 레몬 등 북유럽에서 나지 않는 재료는 쓰지 않았다. 대신 살아있는 개미, 숲속의 이끼와 길가의 꽃잎 등을 채집해서 내놨다. 두 셰프 모두 프랑스 요리로 탄탄한 기본기를 쌓았기 때문에 ‘나와 우리의 요리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고, 그것을 찾는 과정에서 이렇게 독특하고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 아닐까.

두 번째 가설은 끝없는 다문화적 탐구이다. 두 셰프 모두 다른 나라의 요리를 공부했는데, 르네 레드제피는 팀 전체가 두세 달씩 일본, 멕시코, 호주로 옮겨다니며 팝업 레스토랑을 열기까지 했다. 그러다 노마의 성공이 10년 넘게 이어지자 관성이 창조성을 죽인다면서 식당을 닫아버린 것이다. 그렇게 전 세계를 돌며 현지의 풍부한 식재료를 다뤄보고, 현지인들과 상호작용하다보니 새로운 영감을 받을 수밖에. 주방에 발효연구실을 두고 연구하다 올해 <발효에 대한 노마의 가이드>라는 책까지 출판한 것도 그 결과물이 아닐까.

덴마크 디자인박물관에도 전시된 명품 접시에 담겨 나온 맛조개 요리.

세 번째 가설은 덴마크 디자인박물관에 갔을 때 떠올랐다. ‘오늘의 핫한 덴마크 디자인’ 코너의 다양한 물건들 속에서 제라늄에서 썼던 수수하게 아름다운 접시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프랑스·이탈리아의 화려한 인테리어와 달리 시크함, 미니멀리즘, 실용성을 강조하는 북유럽 디자인과 요리는 닮은꼴이구나. 이런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을 써온 사람들은 음식도 그런 쪽으로 디자인해갈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뉴 노르딕 레스토랑들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높은 이들의 문화 수준에 기반한 것이리라. 이러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나라의 새로운 미식문화의 가능성을 탐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코펜하겐의 뉴 노르딕 식당들을 방문해볼 가치는 충분하다 하겠다. 뉴 노르딕 음식이 지금껏 익숙한 미식과 다르다 해도, 너무 비싸다 해도 말이다.

▶필자 이민영

덕업일치를 꿈꾸는 관광인류학자. KBS 여행 전문 팟캐스트 <여행상상> 진행자. 여행작가·해외여행인솔자로 70여개국을 다니며 미식, 스쿠버다이빙, 자전거, 요가, 순례 등 다양한 테마여행을 탐구했다. 서울대 인류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한국인의 해외관광문화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 』

이민영 | 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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