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하지만 절망할 일은 아니다..변화의 움직임은 살아있기에 [경향신문 선정 '올해의 책 10']
[경향신문]

시간이 지난 뒤 우리는 올해를 어떤 해로 기억할까요. ‘경향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책’이 훗날 독자 여러분이 2019년을 떠올릴 때 작은 단초라도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올해 경향신문이 ‘책과삶’을 통해 소개한 책 위주로 10권을 골라봤습니다.선정하고 보니 너무 암울해 보이기도 합니다. ‘차별’(<선량한 차별주의자>)과 ‘불평등’(<20 VS 80의 사회>)은 올 한 해 한국 사회를 달군 이슈였고, ‘산업재해’(<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아픔입니다. 뿌리 깊은 친일 문제(<제국대학의 조센징>) 역시 우리 사회의 숙제입니다.그렇다고 절망할 일은 아닙니다. 이런 문제들이 책으로 나오고, 화제가 된 것은 그만큼 해결 의지가 남아 있다는 의미일 수 있으니까요. 또 페미니즘이 ‘탈코르셋 운동’(< 탈코르셋: 도래한 상상>)이란 적극적인 행동으로 가시화하는 것 역시 긍정적입니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이런 작은 움직임이 결국 이 사회를 변화시킬 테니까요. ‘책의 위기’란 말이 나온지 한참 됐지만 여전히, 또 생각보다 책은 강합니다.
■“한국인 다 됐네요”라는 말은 칭찬이 아닌 모욕이 될 수 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평범한 우리 모두가 ‘선량한 차별주의자’일 수 있다고 말한다. 별다른 악의 없이 일상적으로 이뤄진다 해도 차별은 차별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 사는 이주민에게 “한국인 다 되었네요”라고 말하는 건 칭찬일까. 이 말이 차별인지 아닌지 알고 싶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된다. 저자 김지혜는 “이주민들은 한국인이 ‘다 되었다’는 말에, 자신이 아무리 한국에서 오래 살아도 우리는 당신을 온전히 한국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에 모욕적으로 들린다고 했다”고 말한다. 차별주의자가 되고 싶진 않지만 무엇이 차별인지 눈에 잘 보이지 않고, 가끔은 반감까지 느끼게 되는 ‘당신’이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5년간 꾹꾹 눌러 쓴 10권 프랑스 혁명 비평의 역작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주명철 지음 | 여문책

1789년부터 1794년까지 5년여간 프랑스에서 벌어진 일들을 책 10권에 꾹꾹 눌러 담았다. 2015년 12월 1~2권이 동시에 나왔고, 올해 10월 9~10권이 함께 나오면서 거대한 작업이 마무리됐다. 저자 주명철은 2015년 8월 한국교원대에서 정년퇴임한 뒤 매년 300쪽이 넘는 책 2권을 꼬박꼬박 출간했다. 저자는 1권 <대서사의 서막> 서문에 이렇게 썼다. “지금 내 심정을 곧 울릴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마라톤 선수의 심정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그리고 4년이 지난 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지만 한국에서 이런 작업을 최초로 했다는 자부심도 있다.” 주명철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이전에 프랑스 혁명에 대해 이토록 구체적으로 비평한 한국 저자의 책은 없었다.
■‘세월호·촛불’ 이후에도‘혁명’은 완수되지 않았다 디디의 우산 황정은 지음 | 창비

“2019년 1월인 현재, 혁명이 완수되었다고 믿는 이들에게 보내는 서신이다.”(강지희 문학평론가) <디디의 우산>은 세월호 참사와 촛불혁명을 배경으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중편소설 ‘d’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를 묶은 연작소설집으로, ‘d’가 세월호 1주기 즈음을 배경으로 혁명 직전의 ‘희망의 기운’을 감지한 작품이라면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1996년 연세대, 2014년 세월호 참사, 2016년 촛불혁명, 2017년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선고까지 한국 현대사를 통과하며 ‘혁명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다. 여성, 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혁명’은 완수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이야기한다. 황정은의 날카롭고도 따스한 윤리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당신도 상처 입기 바란다” 정신질환 혐오 깨질 때까지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 론 파워스 지음·정지인 옮김 | 심심

저자 론 파워스는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여러분이 이 책을 즐기지 않기를 바란다. 여러분이 이 책으로 인해 상처 입기를 바란다. 이 책을 쓰면서 내가 상처 입었던 것처럼. 상처 입어 행동하기를, 개입하기를 바란다.” 파워스는 너무나 많은 정신질환자가 잔혹하고 가혹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자신의 두 아들이 그랬듯 조현병 환자는 사랑과 웃음과 창의성과 희망을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이 항상 미래를 꿈꾸던 이들이다. 저자는 그들을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그 병의 희생자들이 모두 위험하거나 나약하거나 부도덕한 존재가 아니며, 어떤 식으로든 한 개인으로서 온전한 인간성을 인정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과학 상상력·소수자성 결합 한국SF문학에 한 획을 긋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지음 | 허블

올해 한국 SF와 출판계가 거둔 가장 큰 수확 중 하나는 김초엽일 것이다. 첫 소설집으로 일약 가장 주목받는 작가 가운데 하나로 도약했다. 포스텍 석사 출신 과학도이자 여성, 청각장애인인 그는 과학적 상상력과 자신의 소수자성을 결합시켜 새로운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이야기를 직조해낸다. 익숙한 시선에서 벗어난 그의 이야기는 새롭고도 아름답게 다가온다. 모성과 경력단절을 데이터 분실이라는 SF적 상상력과 결합시킨 한국과학문학상 대상 수상작 ‘관내분실’부터 기술 발전으로부터 파생되는 새로운 결핍과 소외를 다룬 표제작, 정상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등 수록작은 우리 사회를 예리하게 통찰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1 대 99’가 아닌 ‘20 대 80’ 중상류층 중심 불평등 분석 20 VS 80의 사회 리처드 리브스 지음·김승진 옮김 | 민음사

국가 경제는 늘 조금이라도 성장하는데 왜 사는 건 점점 더 어려워질까. 정권마다 ‘일자리 창출’과 ‘양극화 해소’를 외치는데 왜 부는 점점 더 편중되는 것일까.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등 불평등 담론은 흔히 상위 1%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나머지 99%는 모두 비슷하게 불행한 처지로 여겨진다. 정말 상위 ‘1%’의 탐욕과 독식이 원인일까.
<20 VS 80의 사회>에서 저자는 단호히 ‘아니’라고 말한다. 단순히 슈퍼리치 1%만이 아닌, 우리 사회 빈부의 불평등선을 가르는 주체는 상위 20%라고 말한다. 말 그대로 ‘1% 대 99%’의 대결구도가 아닌 상위 20%의 ‘중상류층’을 중심으로 불평등 문제를 살펴본 책이다. 미국 사회 이야기인데도 책을 읽다보면 한국 사회의 현실이 겹쳐진다.
■꾸밀 자유·꾸미지 않을 자유 평등하지 않은 양쪽의 무게 탈코르셋: 도래한 상상 이민경 지음 | 한겨레출판

지난해 초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부서지거나 잔뜩 짓뭉개진 화장품 사진이 하나둘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주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여성들이 올린 사진에는 공통적으로 ‘#탈코르셋_인증’이라는 해시태그가 붙어 있었다.
‘탈(脫)코르셋 운동’의 확산을 알리는 신호였다. 탈코르셋은 여성의 ‘꾸밈’을 전면 부정하는 운동이다. 탈코르셋에 참여하는 여성들은 화장을 하지 않고, 치마 입기를 거부하며, 머리를 짧게 깎는다.
‘안 꾸미면 될 걸 가지고 운동씩이나?’ 책은 탈코르셋에 대한 이 같은 피상적이고 평면적인 이해를 단숨에 일축한다.
저자는 “ ‘꾸밀 자유’와 ‘꾸미지 않을 자유’ 양쪽의 무게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고 말한다.
■공장 옥상에 올라간 아이 특성화고생의 ‘가혹한 현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은유 지음·임진실 사진 | 돌베개

2014년 초봄, ‘알지 못하는 아이’가 죽었다. CJ제일제당 현장실습생이던 고3 김동준군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 뺨을 맞고 엎드려뻗치기 자세로 머리를 밟힌 후 트위터 등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너무 무서워서 아침에 출근하기가 싫어요.” 그리고 공장 옥상에서 스스로 뛰어내리기 전 담임 선생님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선생님…, 저 무서워요….” 저자는 김군이 노트와 SNS 등에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떠난 이의 삶을 추적해 재구성한다. 또 김군 어머니, 이 사건을 언론에 알린 이모, 김군 사건을 담당했던 노무사부터 2017년 제주에서 목숨을 잃은 또 다른 현장실습생 이민호군의 아버지, 특성화고 교사, 특성화고 재학생·졸업생 등 죽음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포개고 겹쳐본다.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식민지 조선의 일본 유학생 제국대학의 조센징 정종현 지음 | 휴머니스트

한국 사회에서 최고 엘리트로 대접받는 인물들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제국대학이 등장한다. 그래서 책의 부제는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이다. 도쿄, 교토, 홋카이도, 규슈 등 7개 제국대학은 근대 일본의 엘리트 육성 기관이었다. 1924년 식민지 조선에도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지만, 본토 제국대학 출신들이 사회적으로 더 높은 대접을 받았기에 내로라하는 조선의 수재들은 현해탄을 건너 일본 유학을 떠났다. 저자는 ‘교토대학졸업생씨명록’ ‘동창회보’ 등을 샅샅이 뒤진 끝에 교토제국대학을 거쳐간 조선인 유학생 명단 전체를 추출해냈다.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단순히 식민지 시절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떠나, 지식인과 엘리트의 책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김영하가 풀어낸 ‘여행론’올해 최고의 ‘베스트셀러’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여행의 이유>가 올해의 책에 선정된 ‘이유’는 간단하다. 올해 가장 많이 팔린 ‘초베스트셀러’로 소설가 김영하의 존재감을 다시 과시한 책이다. 여행과 에세이, 유명 작가라는 삼박자가 잘 맞아 들어갔다. tvN <알쓸신잡>에 출연하며 대중적 인지도를 한껏 높인 김영하는 책에서 <알쓸신잡>을 통해 여행을 3인칭 시점으로 바라보고 자신과 타인의 경험이 뒤섞여 여행이 완성되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며 ‘여행론’을 풀어놓는다. 멀미약을 붙이고 떠난 첫 해외여행, 중국 푸둥 공항에서 추방당한 이야기, 소설 집필을 위해 떠났던 여행 이야기 속에 인간과 삶, 글쓰기에 대한 사유, 철학·신화·문학에 대한 지식이 녹아들었다. 김영하 특유의 능수능란한 입담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홍진수·이영경 기자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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