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현의 디지털 읽기] 라디오는 죽었다, 라디오 만세!
왕이 서거하면 "국왕 만세" 외친 중세 유럽, '왕위'는 누군가에게 계승되어 계속된다는 뜻
좋은 콘텐츠 전달하는 라디오 본질 살리면 전파 라디오 죽음은 새로운 시대 여는 희소식

코넌 오브라이언은 한국에도 찾아와 한국 문화를 미국에 소개하면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국의 코미디언이다. 1990년대 초에 미국 NBC방송 심야 토크쇼 호스트로 데뷔해서 25년 동안 여러 TV 토크쇼를 진행해온 베테랑이다. 그런 그가 항상 해오던 한 시간짜리 심야 토크쇼를 30분 분량으로 줄였다. 전통적으로 토크쇼 호스트가 앉던 책상도 없애고, 프로그램 말미에 등장하던 음악 손님도 없앤, 그야말로 날씬한 프로그램으로 바꾼 것이다.
이유가 뭘까? 요즘 시대에 한 시간짜리는 너무 길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한 시간짜리 포맷은 시청자들이 밤에 잠들기 전에 TV로 보던, '시간 때우기' 용도였는데, 유튜브에서 인기를 끌기 위해서는 내용이 짧고 강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오브라이언은 작년 말부터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그냥 취미 삼아 하는 게 아니라 매주 규칙적으로 한 시간짜리 에피소드 한 편을 선보이고 있다.
인기 코미디언이 본업인 TV 출연은 반으로 줄이고, 디지털 오디오인 팟캐스트에 더 공을 들이는 것은 낯설게 느껴지지만, 이는 디지털 미디어 혁명이 오디오 콘텐츠 시장에 닥친 모습을 잘 보여준다.
팟캐스트 장악한 美 라디오 방송사 먼저 라디오 업계의 현황을 잠깐 살펴보자.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라디오를 보유한 가구는 2013년부터 2017년 사이에 35%에서 19%로 급감했고, 하락은 계속되고 있다. 데스크톱 컴퓨터를 제외하면 미디어 기기로는 유일하게 감소하고 있는 것이 라디오다. 당장 주위를 둘러보면 30대 이하에서 집에 라디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기 어렵고, 라디오를 새로 사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이제 라디오는 노년층 외에는 자동차에서나 듣는 기기로 빠르게 전락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통계가 라디오 종말을 알리고 있는 시점에 미국을 비롯한 많은 시장에서 라디오 방송국들이 다시 기세를 올리고 있다. 바로 팟캐스트와 음성 비서가 달린 스마트 스피커 때문이다.

사실 라디오와 달리 안테나로 전파를 찾을 필요도 없고, 방송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든지 들을 수 있는 팟캐스트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라디오 시대는 끝났다"고 했다. 하지만 몇몇 라디오 방송사는 "팟캐스트가 우리를 죽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팟캐스트를 장악하자"는 전략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 미국공영라디오(NPR)는 젊은 층의 사랑을 받는 방송국으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고, 미국 최대 라디오 방송사 아이하트라디오는 "우리는 미국 1위 팟캐스트 방송사"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대대적으로 알리고 있다. 그리고 라디오 방송국 대부분이 라디오가 없는 젊은 층을 위해 "집에 있는 스마트 스피커에 우리 방송국 이름을 대기만 하면 방송을 들을 수 있다"고 알려준다.
새로운 기술의 등장으로 기존 산업이 사라지는 일은 항상 일어난다. 하지만 모든 기업이 순순히 항복하고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기술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아 성장 발판으로 삼기도 한다. 가령,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미국과 유럽에서 고급 마차를 제조하던 많은 업체가 망했지만, 그중에는 자동차 엔진 업체와 손잡고 자동차 제조 업체로 탈바꿈한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 경우 살아남은 업체와 그렇지 않은 업체의 차이는 궁극적으로 '업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였다. 마차를 제조하는 사람이 자신의 업을 '말이 끄는 이동 수단을 만드는 일'로 규정했다면 그의 업은 내연기관 등장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의 업을 '바퀴 달린 이동 수단을 만드는 일'로 규정한다면 자동차 엔진의 등장은 그 기업에는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라디오 새 시대 여는 전파 라디오 죽음 현재 미국과 중국 시장에서 팟캐스트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반면, 한국의 팟캐스트 시장은 여전히 작고, 정치 콘텐츠에 편중되어 있다. 더구나 오디오 콘텐츠를 가장 잘 아는 라디오 방송국들은 여전히 콘텐츠의 디지털화가 단순히 웹사이트에 오디오 파일로 올려놓는 것으로 끝난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부터 팟캐스트에 적합한 길이와 내용을 고려하는 선진국과 달리, 전통적인 방송을 만들고 그중에서 일부를 잘라서 팟캐스트로 사용하는 일이 흔하다.
심지어 어느 대형 방송사에서 부탁받아 강의하던 필자에게 한 직원이 "우리는 전파를 다루는 기업인데, 자꾸 디지털 콘텐츠 기업이 되라고 하느냐"는 불만을 드러낸 일도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직원은 전파 송신을 담당하는 기술 인력이었다. 그분이 느끼는 불안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라디오 방송을 "전파를 다루는 기업"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마차를 만드는 기업이 "우리는 말이 끄는 이동 수단을 만드는 기업"이라고 규정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중세 유럽에서는 왕이 서거하면 "왕이 죽었다, 국왕 만세(The king is dead, long live the king)!"라고 외쳤다. 마치 죽은 사람에게 오래 살라고 하는 것 같은 이상한 표현이지만, 사실은 개인으로서의 왕은 죽었지만, 다음 사람이 그 자리를 계승하기 때문에 왕위는 계속된다는 뜻이 담긴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 나라에 왕이 존재하는 것이지, 특정 개인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라디오의 본질은 무엇인가? 좋은 오디오 콘텐츠를 청취자의 귀에 가장 편리한 방법으로 전달하는 일이다. 그 본질만 살아 있다면 전파 라디오의 죽음은 새로운 라디오 시대를 여는 희소식일 수 있다. 라디오는 죽었다, 라디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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