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지킨 동서울터미널, 우린 쫓겨납니다"

조성은 기자 2019. 12. 5.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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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재건축에 설 자리 잃는 동서울터미널 상인들

[조성은 기자]

 
서울 동서울터미널의 한 식당. 전국적으로 맛집으로 소문이 나 점심시간이면 가게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선다. 터미널 이용객이 아니더라도 점심을 먹으러 이곳에 오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

식당 주인인 50대 남성 이모 사장은 음식에 자부심이 크다. 연구도 많이 했다. 지금도 전국 각지에서 들르는 손님들의 입맛을 맞추려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수많은 사람이 오고가는 터미널이면 맛이 없어도 장사가 안 되진 않을 텐데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궁금했다. 이 사장은 반대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기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먼 길 오가는 사람들이 맛있는 걸 먹고 가야 하잖아요."

터미널이 개장한 1990년부터 자리를 지켰으니 꼭 30년째다. 30년을 한 자리에서 같은 음식을 판다는 것은 누군가의 삶의 궤적에 한 질점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첫 휴가 때 밥을 먹으러 왔던 군인은 말년 휴가 때까지 꼬박 오더니 한참을 오지 않다가 여자친구와 오고, 나중엔 아기를 데리고 왔다.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함께 가던 노부부는 언젠가부터 오지 않아 이 사장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 사장은 "터미널이라는 공간 때문에 한 번 오고 안 올 뜨내기손님만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다"라며 "터미널은 누군가의 생활이 되고 세월을 함께 보내는 곳"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이 사장의 식당이 올해 말인 12월 31일을 끝으로 없어질 예정이다. 동서울터미널이 재건축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동서울터미널의 운영·관리 주체인 한진중공업은 이에 따라 상인들과 1년 단위로 계약해오던 임대차 계약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

▲동서울터미널 내부 ⓒ프레시안(조성은)

젠트리피케이션, 밀려나는 것 말고 방법이 없는 그것

동서울터미널 재건축 계획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 오세훈 서울시장의 신도시계획 운영체계에 따라 26곳이 사업계획안을 제출했고 이중 8곳이 선정됐다. 동서울터미널은 8곳 중 하나였다. 선정만 됐을 뿐 구체적인 계획이 잡힌 것은 아니었다. 재개발·재건축은 지구단위개발계획부터 지난한 인허가 절차를 거쳐 진행된다. 동서울터미널은 사업계획서 협의 단계에 있다.

이 사장을 비롯한 상인들은 2009년 쯤 뉴스를 통해 터미널의 재건축 계획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무슨 제안서를 제출했다는 얘기만 들려올 뿐 상인들에게 가타부타 다른 말이 없었다. 앞으로 회사의 계획은 어떻고 언제까지 장사를 할 수 있을 거란 설명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다고 했다.

동서울터미널 재건축계획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은 2017년부터다. 서울시와 한진중공업의 사전협상이 시작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상인들은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사전협상이라 계획이 구체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재건축 허가도 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생업이 걸려 있는 사람의 마음은 다르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느냐 물어보고 싶었지만 나서기도 어려웠다. 따지는 모양새로 나섰다간 괜히 밉보여서 다음 해 재계약이 어려울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동서울터미널의 상인들은 지난해 '화해조서'라는 이름으로 처음 재개발 관련 통보를 받았다. '재건축을 하게 되면 다른 요구 없이 원상회복 하고 나간다'는 내용이었다. 보상안이나 대안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이 사장은 "강제퇴거각서를 받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서명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진중공업이 화해조서를 작성한 사업자에 한해서만 2019년 1년 계약을 진행하겠다는 내용증명을 보냈기 때문이다.

한진중공업 측은 아직 인허가도 나기 전이라 상인들과 협의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라고 했다. 상인들은 서울시에 중재를 요청했지만 서울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민간소유지라 서울시가 개입할 수 없다고 했다. 30년 장사를 했든 어쨌든 상인들의 목소리가 들어갈 여지는 없었다. 지역 개발에 관한 결정은 인허가권을 가진 서울시와 자본을 투입할 한진중공업의 몫이다. 회사가 계약 종료를 통보하면 상인들은 나가면 된다. 그게 현행 법이다. 

한진중공업은 <프레시안>과의 전화통화에서 "1월 중 상인들과 협의할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일정이나 대안을 세운 것은 아니다. 이 사장은 "가게를 정리하고 나가면 어디로 가야 할지도 막막하다"라고 한숨을 쉬었다.

▲동서울터미널 내부 ⓒ프레시안(조성은)

거대 자본과 영세상인, 갑과 을이 너무나 명확한 구도

뒤늦게야 상인들은 지난 10월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고 지난달 26일 처음 기자회견을 열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계약 종료를 세 달도 남기지 않은 시점이었다. 불공정한 임대차 계약서 때문이었다. 

임대차 계약서 제22조에는 집단을 구성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이에 따라 동서울터미널은 초창기부터 상인회 같은 조직을 구성할 수도 없고, 일체의 집단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고희동 동서울터미널상인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은 "만약 이 조항을 어기고 조직을 구성한다면 바로 임대차 계약이 해지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계약서 제24조에는 계약해지 사유를 열거하고 있다. '임차인이 계약기간 중 정당한 사유 없이 4일 이상 영업행위를 중지할 때', '불성실한 상행위로 임대인의 명예와 신용을 훼손했을 때', '임대인의 빌딩관리 운영상 계약 해지를 필요로 할 경우', '갑의 정당한 시정 요구에 계속 불응하는 경우' 등. 마음만 먹으면 뭐든 걸 수 있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다. 고 위원장은 "회사 마음에 안들면 언제든지 찍혀 나갈 수 있는 내용"이라며 "납작 엎드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권력관계에서는 '말'이 힘을 발휘한다. 상인들은 한진중공업 측 관리 담당자가 '넌지시'하는 말이 제일 어려웠다고 말한다. "가게가 오래됐네"라는 말은 "리모델링 해라"라는 말과 같았다. "첫차가 5시부터 있잖아"라는 말은 "가게도 5시에 열어야지"라는 말로 들렸다. 상인들은 '알아서 기었다' 회사가 강요한 것도,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모든 것은 자발적이었다. 

고 위원장은 올해 말 계약 종료를 앞두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심정으로 총대를 멨다고 했다. 고 위원장은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나가란다고 나가면 너무 억울할 것 같다"고 말했다. 동서울터미널 상인들은 앞으로 공동행동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지난달 26일 열린 기자회견 (동서울터미널 상인비상대책위원회 제공)


조성은 기자 (pi@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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