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 월드] 바다에서 낚는 빨래판과 대포알, 신발짝

하응백 문학평론가 2019. 11. 29.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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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광어는 빨래판, 갑오징어는 대포알.. 여기에 중독되면 낚시도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하응백 문학평론가

사물의 크기는 미터법 등의 도량형 단위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일상생활에서는 일일이 크기를 계측하기가 불편하니, 눈대중으로 짐작하여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이를테면 아주 작은 물건은 콩알만 하다, 그보다 더 작으면 쌀알, 좁쌀, 더 크면 밤알, 감자, 주먹, 머리통 등으로 비유한다. 바다에서 파도가 높으면 '집채만 한 파도'라고 표현한다. 이런 비유를 직관적으로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 바로 낚시꾼이다.

서울의 전차는 1899년 개통하여 1968년 사라졌지만, 붕어 낚시꾼은 전차의 유산인 '전차표'를 여전히 말로 사용한다. 붕어꾼이 '그 저수지에서는 전차표밖에 못 잡았어'라고 하면 전차표만 한 크기의 붕어밖에 못 잡았다는 뜻이다. 치어를 갓 벗어난 붕어를 호박씨, 세 치 정도의 붕어는 전차표 혹은 버들잎, 그보다 약간 크면 콩잎, 일곱 치 이상 월척보다 작으면 준척, 30.3cm 이상이면 월척이라 불렀다. 월척 중에서도 대물은 '짚신'이라 표현했다. '짚신' 정도는 올려봐야 고수의 반열에 등극한다.

월척이란 말은 일반인들도 잘 아는 말이기에 낚시를 간다고 하면 덕담으로 '월척 잡으세요'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농어나 대구를 잡으러 갈 때 '월척' 잡으라고 하면 오히려 악담이다. 30cm가량의 월척도 농어나 대구는 수산자원관리법에 의해 잡으면 안 되는 크기이기 때문이다. 잡더라도 놓아주어야 한다.

대어를 잡는 것이 대부분 낚시꾼의 목표이고, 자신이 잡은 물고기의 크기를 '자랑질'해야 하므로 낚시꾼들 사이에서는 물고기 크기에 대한 별칭(別稱)이 많다. 이 별칭은 대개 물고기의 생김새를 잘 반영하고 있어 들어보면 낚시꾼이 아니라도 그 모양이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일러스트=이철원

8짜(80cm)가 넘는 대형 광어는 '빨래판'이라고 말한다. '지난번 출조에서 빨래판 잡아서 13명이 회를 실컷 먹었어'라고 하면 실감이 난다. 학꽁치의 경우 작은 건 '볼펜', 아주 크면 '형광등'이라 부른다. 학꽁치가 길쭉하기에 볼펜과 형광등은 아주 적절한 비유다.

남해에서 많이 잡히는 큰 볼락이나 열기(불볼락)는 '신발짝'이라 한다. 우럭의 경우 5짜 이상의 크기를 '개우럭'이라 한다. 우리말에서 접두어 '개'나 '돌'이 붙으면 야생을 뜻하고 그 크기도 작다. 우럭의 경우 '개'는 반대의 뜻이다. 왜 '개우럭'이 '큰우럭'을 뜻하는지에 대해 꾼들 사이에 말들이 많지만, '개우럭'에서 '개'는 '견(犬)'이라는 설이 그럴듯해 보인다. 강아지만 한 우럭이라는 말이다. '개우럭'을 잡아 놓고 보면 실제 입 큰 불도그(Bulldog)같이 보인다.

낚시꾼이 사용하는 말 중에는 그 어원을 짐작하기 어렵거나 사라진 우리말인 경우도 많다. 4짜가 넘는 크기의 쏘가리는 '대꾸리', 6짜 이상의 누치는 '멍짜', 8짜 이상의 농어 대물은 '따오기'라 한다. 작은 크기를 따로 부르는 말들도 있다. 작은 참돔은 '상사리', 작은 갈치는 '풀치', 작은 숭어는 '동아', 3짜 정도의 작은 농어는 '깔따구', 작은 민어는 '통치'라 부른다. 민어의 주산지인 임자도에서는 '통치' 따위는 민어에 끼워주지도 않는다.

지난 주말 서해로 주꾸미 낚시를 다녀왔다. 낚시 도중에 미끈한 '대포알' 하나가 바다에서 쑥 올라왔다. 대포알? 바로 대형 갑오징어를 이르는 말이다. 잡아봐야 왜 큰 갑오징어를 '대포알'이라 부르는지 알게 된다. 유선형 몸통이 꼭 대포알처럼 생겼다. 겨울이 오면 '신발짝'을 건지러 저 먼 남해 여서도나 사수도로 가야 한다. '빨래판'과 '대포알'과 '신발짝'에 중독되면 낚시도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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