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발레단 유지연 "가진 걸 쏟아 부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박성준 2019. 11. 26.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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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연 유니버설발레단 부감독. 이제원 기자
발레 역사에서 단 하나의 발레단을 꼽으라면 누구는 ‘파리오페라발레단’, 누구는 ‘볼쇼이발레단’ 등을 꼽을 터다. 그중에서도 발레가 왕실 유흥거리에서 극장에서 공연되는 근대 예술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역사와 전통의 발레단이라면 단연 ‘마린스키발레단(이하 마린스키)’이다. 1740년대 ‘러시아황실발레단’에서 출발해 ‘키로프발레단’, ‘소비에트발레단’ 등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마리우스 프티파가 표트르 차이콥스키와 함께 ‘백조의 호수’와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등을 만들었다. 또 안나 파블로바, 바츨라프 니진스키 같은 전설적 무용가가 마린스키의 명성을 세계에 알렸다.
마린스키의 전통은 발레단 부설 바가노바 발레아카데미(이하 바가노바)와 떼놓을 수 없다. 1738년 러시아 최초의 황실연극무용학교로 출발한 이곳은 1930년대 아그리피나 바가노바라는 교사가 발레의 모든 것을 총 8년에 걸쳐 배울 수 있도록 발레 교습법을 개발하면서 부동의 권위를 갖게된다. ‘발레의 정석’을 만든 위업을 기념해 러시아는 1957년 아예 학교 이름을 현재 명칭으로 바뀌었다. 세계 최고 발레단은 우열을 논할 수 있겠지만 세계 최고 발레학교는 단연 ‘바가노바’다. 
유지연 유니버설발레단 부감독. 이제원 기자
유지연 유니버설발레단 부예술감독 겸 지도위원은 이처럼 고고한 러시아 마린스키와 바가노바의 발레 전통을 우리나라에 그대로 가져와 후진에게 전하고 있는 무용인이다. 마린스키를 떠날 때 발레단장은 단원들에게 “지연이가 러시아 발레 전통을 한 몸에 담아 고국으로 돌아간다”며 아쉬움을 담아 귀국길을 축하해줬을 정도다.

유 부감독의 마린스키 삶은 서울 예원학교 3학년 때인 1991년 러시아 유학길에 올라 바가노바 5학년에 편입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바가노바 250여년 역사상 첫 외국인 정규 유학생이었다. 4년 후 유지연은 바가노바를 모든 과목 만점으로 수석 졸업한 데 이어 유일한 외국인 단원으로서 마린스키 입단 등 한국 발레 역사의 한장을 쓴 후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유니버설발레단에서 후진을 양성 중이다.

“우리나라 나이로 여섯 살 때 발레를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이 무용에 소질이 있다는 생각을 하셨대요. 길을 지나가도 음악이 흘러나오면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고 꼭 몸으로 무언가를 표현했답니다. 그래서 ‘무용학원을 보내자’라고 마음먹었는데, 마침 집 앞 국립발레단 출신 부부가 차린 발레학원에 다니게 된 게 발레 인생의 시작이죠.”

바가노바발레아카데미를 거쳐 마린스키발레단에서 주요한 배역을 맡아 발레리나로서 무대에 서던 시절의 유지연 유니버설발레단 부예술감독.  
우리나라와 옛 소련이 수교한 게 1990년인데 유 부감독은 이듬해 바가노바와 마린스키의 본거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유학을 떠났다. 1991년은 개방 정책에 반발한 옛 소련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를 다시 옐친이 무산시킨 후 구체제를 해체한 격동의 시기다. 유 부감독은 “빵도 하루 두 개씩 배급받던 시절이었고 대혼란기였다. 대한항공편으로 모스크바까지 간 후 기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데 하다못해 두루마기 휴지까지 들고 가느라 어머니랑 저랑 큰 트렁크 네개에 짐 200㎏을 나눠 들고 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런 난세에 유 부감독이 사상 최초 첫 바가노바 유학생이 된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재능을 키워가던 예원학교 시절 바가노바에서 특강하러 온 두 명의 무용교사가 유 부감독 재능에 홀딱 반해 귀국 후 바가노바 교장에게 적극 추천한 게 전례없는 외국학생 입학 허가로 이어졌다. “그분들이 ‘여기서만 배우기는 너무 아깝다’며 전신 사진을 보내달라더니 6개월 후 초청장이 왔어요. 저는 ‘무조건 가겠다’고 했죠. 부모님이 대단하신 게 어머니가 딱 하나 ‘그렇게 가고 싶니’라고만 묻고 보내주셨어요.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무섭고 살벌한 때였는데 하늘을 믿고 저를 믿어주신 거였죠.”

짐 정리 후 모친은 귀국하고 유 부감독은 온통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바가노바 기숙 생활을 홀로 시작했다. 당장 언어부터 큰 문제였는데 단어를 벽에 붙이고 못 알아들어도 수업에 집중했다. 방학 때도 귀국 대신 홀로 기숙사에 남아 마린스키 연습실에서 단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 순간 귀가 뜨이고 말문이 트였다. 좋아하는 발레를 마음껏 배운다는 생각에 외로움도 없었다. 다만 가족이 그리웠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매주 토요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바가노바 정문 수위실 전화로 부모님이 국제전화를 걸거나 바가노바 인근 전화국까지 가야 신청 가능한 10여분 남짓 국제통화로 외로움을 달랬다.
마린스키 유지연 빈사의백조.
무난했던 러시아 기숙생활과 달리 무용 수업은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에 맞닥트렸다. “국내에선 계속 ‘일등이다’, ‘잘한다’ 소리 들으며 일등을 지켜왔는데 러시아에 가서 보니 제 또래에 비해 어려운 테크닉은 잘하는데 기본 동작은 정확도가 떨어지는 상태였어요. 러시아 친구들은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기초단계를 밟고 올라와서 기본이 탄탄한데 저는 아니었죠. 지금과 달리 그때는 국내에선 비디오를 보고 발레를 배우는 환경이었어요. 그래서 어려운 테크닉은 어떻게 따라 하는데 정확히 다리를 든다든지 기본 동작은 부족함을 느꼈던 거죠.”
그럼에도 유학 4년만에 최우수 졸업을 하게 된 건 혹독한 연습 덕분이다. 유 부감독은 “굉장히 힘들었고 부상도 많았는데 특히 아파서 그냥 앉아서 친구들 연습하는 거 보고만 있을 때가 힘들었다”고 말했다.
“호두까기 인형은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지젤 등과 함께 클래식 발레의 정수입니다. 클래식 발레는 ‘크리스털’같아야 해요. 춤이 굉장히 맑고 깨끗하고 하나의 군더덕지도 없어야 합니다.” 연말 ‘호두까기 인형’ 공연 준비에 한창인 유지연 유니버설발레단 부예술감독. 이제원 기자
바가노바 최대 이벤트는 졸업시험이다. 한 학년에 20명이 채 안 되는 남녀 각 2개 반이 졸업작품으로 무대에 서는데 마린스키는 물론 볼쇼이발레단 등 러시아 주요 발레단장이 총출동한다. 차세대 스타를 영입하기 위해서다. 물론 최고는 마린스키 몫이다. 유 부감독은 “바가노바 졸업식이 6월인데 그전 연말·연초에 마린스키의 호두까기인형 공연에서 바가노바 졸업생 한두명이 배역을 맡습니다. 저도 신년공연에서 ‘마샤(마리)’역을 맡게 됐는데 그때 비로소 ‘아. 내가 마린스키에 들어가겠구나’하고 짐작할 수 있었죠.”
마린스키에서 유 부감독은 우즈베키스탄계 혼혈 남자 무용수를 빼면 유일한 외국인 단원이었다. 경쟁은 치열했지만 최고의 무대에 설 수 있는 나날들이었다. 유 부감독은 “입단하자마자 무대에 투입이 잘 되곤 했다. 일 년 절반은 해외투어를 다녔다. 안 가본 나라가 없을 정도로 많은 국가 여러 극장 무대에 올랐다. 세계 최고 무용수들과 한 연습실에서 땀 흘리고 내놓으라 할 극장에서 이런저런 역할을 맡아 계속 춤추면서 갈채를 받는 생활이 너무너무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그런데도 유 부감독은 2010년 34세 때 귀국을 결심하고 마린스키 내한 공연에서 마지막으로 무대에 선다. 바가노바 동기인 디아나 비쉬네바가 아직도 마린스키 수석무용수로 활약 중인 것에 비하면 빠른 은퇴였다. 아예 서울보다 익숙해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면서 끝까지 마린스키에서 춤추다 바가노바에서 교사로 일할 수도 있으나 퍼뜩 ‘집에 가고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내린 결정이었다. “러시아에서 어릴 때부터 살다 보니 ‘내가 절반은 러시아 사람이 돼서 오히려 한국으로 돌아가면 못 버틸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더 먹으니 ‘아. 나는 한국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김치 없이 잘 살았는데 언제부턴가 김치가 먹고 싶고 밥에 찌개를 먹으면 몸이 나아지는 듯하다 보니 귀국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유지연 유니버설발레단 부감독. 이제원 기자
바가노바에서 마린스키로 이어진 경력은 수석무용수와 군무 사이인 솔리스트에서 끝났다. 기초를 강조하는 마린스키는 특히 군무가 탄탄하고 그만큼 승급도 까다로운 발레단이었다. “스무 살짜리 발레리나가 깊은 감정 연기가 필요한 ‘지젤’, ‘줄리엣’ 등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군무가 그냥 허송세월하는 게 아닙니다. 세계에서 제일 튼튼한 발레단은 군무가 센 발레단입니다. 군무에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은데 단계적으로 올라가면 그게 무용수로서 길게 가는 길이고 그 과정을 거친 무용수에게서 나오는 춤은 질이 달라요. 다만 최근에는 그런 원칙이 무너지면서 세계적 추세가 젊은 무용수를 발탁해서 키워보는 경향도 있는데 장·단점이 있죠.”

마린스키 시절 유 부감독에게는 “차라리 국내나 다른 해외 발레단으로 옮겨 수석무용수로 활동하는 게 낫지 않겠나”라는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실제 볼쇼이발레단 조차 수석무용수 중에는 율리아 스테파노바, 올가 스미르노바 등 마린스키에서 군무나 코리페(군무 리더)에 머물렀던 무용수들이 많다. 그러나 유 부감독은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워낙 마린스키와 다른 단체 규모가 너무 달랐다. 제 자존심이 허락을 못 했다. 세계 최고 발레단에서 내가 어디까지 가는지, 주역에 못 가더라도 여기서 끝까지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귀국 후 유 부감독은 예원학교, 선화예고 강사와 국립발레단 지도위원 등을 거쳐 유니버설발레단에 안착했다. “제 삶이 좀 더 화려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게 오히려 너무 감사합니다. 뭔가 반짝하고 화려하게 터지고 난 뒤였다면 지금의 나와 내 가족이 없을 수 있겠죠. 건강하게 아이를 낳는다는 것도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은 아니겠기에….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사랑하는 아이, 가족과 함께하는 게 너무 감사합니다.”

유니버설발레단의 다음 무대는 연말을 장식하는 ‘호두까기 인형’이다. 유 부감독이 처음 배역을 맡았던 작품이기도 하다. 유 부감독은 호두까기 인형의 가장 큰 매력을 수정 같은 투명함이라고 설명했다. “호두까기 인형은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지젤 등과 함께 클래식 발레의 정수입니다. 클래식 발레는 ‘크리스털’같아야 해요. 춤이 굉장히 맑고 깨끗하고 하나의 군더덕지도 없어야 합니다. 아라베스크를 해도 교과서처럼 깔끔한 라인이 나와야만 하는 무대라 무용수들에게도 어려운 작품입니다.”
마린스키 유지연 은퇴식.
지도위원으로서 유 부감독의 역할은 전체적인 안무를 점검하고 무용수들이 더욱 정교하게 안무를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또 예술부감독으로서 작품 무대 설치 등 작품 전반에 걸쳐 관여한다. “유니버설발레단이 마린스키 전통을 이어가려 하는 곳이라서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었어요. 제가 가진 걸 백 퍼센트 쏟아부을 수 있는 곳이어서 이렇게 맺은 인연을 소중하고 감사히 생각하며 일하고 있습니다. 오랜 외국 생활 후라 한국 문화가 낯설 수도 있었는데 유니버설발레단이 국제적인 발레단으로서 가진 큰 장점 덕분에 제가 잘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가르치는 자리에서 서고 나선 유 부감독은 ‘완벽주의자’로서 자신을 재발견했다. 후배 무용수들에게는 늘 배역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주문한다. “가령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을 맡으면 책도 찾아서 읽어보고 영화도 보면서 나만의 줄리엣을 확실히 이해하고 만드는 노력이 중요해요. 안그러면 춤의 깊이가 얇아지는거죠. 그래서 ‘네가 누구를 표현하려는지, 네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알아야한다’고 자꾸 강조합니다. 아라비안의 무희 역을 맡으면 단순히 섹시한 몸을 만드는게 아니라 동양의 여성적 미와 신성한 아름다움을 함께 표현해야하는 거죠. 그리고나서 제일 중요하게 강조하는건 ‘무대 나가서는 마음껏 다 쏟아내고 와라’입니다. ‘네가 누구인지, 무슨 일이 있는지 관객은 아무도 모른다. 무대에 올라갈때는 네가 맡은 역할을 다 쏟아내고 들어 와야한다’고 늘 얘기합니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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