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온기와 다정은 공짜잖아요

2019. 11. 21.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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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사는 게 징글징글할 때 찾는 인생 주유소 광저우 ‘1200북숍’

24시간 문을 여는 광저우의 ‘1200북숍’. 유유출판사 제공

누구나 저마다 ‘소쩍새 우는 사연’ 한 가지씩은 품고 살아간다. 사는 게 징글징글한 것은 어린 아들을 홀로 키우며 술집을 운영하는,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 나오는, 미혼모 ‘동백’이뿐만이 아니다. 혹시 엄마가 자기 보러 오지 않을까 해서 일부러 복통과 발작을 일으키고 온 아파트에 똥을 싸질러대는, 로맹 가리가 쓴 소설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인, 여섯 살 ‘모모’의 인생만 딱한 것도 아니다. 살다보면 딱하고 징글징글한 사연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좀 살아본’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하지 않나. 내 인생이야말로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모든 사람에게는 ‘소쩍새 우는 사연’이

오래전, 베이징의 같은 동네에 살았던 그 중국 여자에게는 ‘소쩍새 우는 사연’이 없는 줄 알았다. 당시 나는 막 결혼하고 첫째 아이를 밴 상태였다. 살림 형편이 그리 넉넉지 않아, 집과 차가 있는 사람들은 아무 근심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줄’로만 알았다. 그 부부도 집과 차를 가지고 둘 다 번듯한 직장에 다니던, 베이징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이었다. 당시 초등학생 딸 하나를 키우던 그 부부를 주말이면 가끔 동네 마트에서 마주쳤다.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였지만 모든 면에서 삶이 안정되고 행복해 보이는 부부였다.

산달이 가까워지면서 순산을 목표로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산책하던 어느 가을 저녁, 집 앞 산책로에서 그 ‘행복해 보이던’ 여자와 마주쳤다.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여자는 나를 보자 살짝 웃고는 계속 말없이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여자는 계속 저녁마다 혼자 벤치에서 ‘멍때리고’ 앉아 있었다. 평소 안면만 있을 뿐 친한 사이가 아니어서 딱히 무슨 말을 걸기도 참 거시기했다. 어느 날 저녁, 또 그 여자가 혼자 앉아 있기에 용기를 내서 옆에 앉았다.

“남편분은 출장 가셨나봐요? 요즘 혼자 산책 나오시네요?” “아, 네… 혼자 마땅히 갈 데가 없어서 여기 앉아 있어요.”

얼마 뒤, 나는 아이를 낳으러 한국에 갔고 아이가 백일이 다 돼가던 다음해 초봄,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베이징에 와서 한참 뒤에도 그 부부와 아이는 통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아이를 봐주러 온 시어머니가 저녁 식사 자리에서 동네 할머니들에게 들었다며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내가 아이를 낳으러 한국에 간 사이 윗집에 살던 그 여자가 자살했다는 것이다. 얼마 뒤, 남편과 어린 딸은 어디론가 이사를 가버렸다고 한다. 더 놀라운 건, 그 여자가 6층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한 이유다. 다정하고 착해 보이던 남편이 그 여자의 절친과 바람이 났다고 한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들을 정도로 심각한 부부싸움을 하는가 하면, 또 어느 날은 여자가 동네 거리에서 남편의 뺨을 후려갈기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시어머니가 동네 할머니들에게 들은 이야기니, 어디까지가 소문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요즘 한창 푹 빠져서 보는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인상 깊게 본 장면이다. 게장 골목으로 유명한 한 소도시에서 ‘까멜리아’라는 술집을 운영하며 8살 아들을 혼자 키우며 살아가는 미혼모 동백(공효진)이 어느 날 혼자 어딘가로 간다. 그 뒤를 따라가는, 동백을 좋아하는 황용식(강하늘)이 “어디 가냐”고 묻자, 동백이 저 앞 기차역을 가리키며 하는 말. “저기가 제 주유소예요. 저도 기름 좀 넣고 가려고요.”

매일 ‘고맙다’라는 말을 듣는 곳

그 기차역은 동백에게 정신의 피안처 같은 곳이다. 사는 게 징글징글할 때마다 기차역에 와서 방전된 심신에 ‘주유를 하고’, 언젠가는 기차역 분실물보관소에서 일하는 ‘국가 공무원’이 되는 상상을 한다. 분실물보관소에 오는 사람들은 뭐만 찾아주면 ‘고맙다’고 하기 때문이다. 살면서 남에게 ‘미안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어도 ‘고맙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동백에게, 기차역 분실물보관소는 매일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자신도 남들에게 존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희망과 행복의 장소다.

가난한 흑인과 아랍인, 유대인이 몰려 사는 프랑스 파리 최악의 빈민 지역인 비숑지구에서 미혼모 창녀들의 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로자 아줌마와 사는 모모가 자주 가는 장소는, 동백이 가는 기차역과 비슷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자비심을 베푸는 의사인 카츠 선생님의 진료소다. “다른 사람이 내게 건네는 관심 어린 말을 들은 것도, 내가 무슨 소중한 존재라도 되는 양 진찰받은 것도 바로 그의 진료소였기 때문이다. 나는 자주 혼자 그곳에 갔는데, 어디가 아파서가 아니라 그저 대기실에 앉아 있고 싶어서였다”고 6살밖에 안 된 어린 모모는 말한다. 그곳에서 모모는 카츠 선생님의 뒤쪽 벽난로 위에 있는 하얀 돛이 달린 배를 타고 “나는 불행했기 때문에 다른 곳, 아주 먼 곳, 그래서 나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그런 곳으로 가버리고 싶다”는 상상도 한다.

동백과 모모가 둘 다 마음속 깊이 간절히 바랐던 것은, 다른 사람의 관심과 존중을 받는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기차역과 카츠 선생님의 진료소는 ‘불행으로부터 떠날 수 있고’ ‘(타인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는’ 장소였다. 비록 상상에 불과해도 말이다.

“여기 류얼시라는, 인구 1500만 명의 대도시 광저우에 사는 30대 중반의 괴짜 청년이 있다. 몸집이 작고 비쩍 말랐으며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르기 좋아하고 빵모자를 즐겨 쓴다. 본래 안휘성 출신인 그는 2003년 화난이공대학 건축과에 합격해 처음으로 광저우에 왔다. (중략) 2008년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무난히 대형 국영기업에 건축디자이너로 취직했다. 하지만 금세 직장생활에 염증이 났다. 결국 3년 만에 류얼시는 모두가 선망하는 그 기업을 나와, 집을 사려고 모아뒀던 돈으로 동료와 함께 카페를 열었으며 1년도 안 돼 분점 하나를 또 냈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번창 일로에 있던 사업을 갑자기 동료에게 다 넘기고 타이완으로 석사 공부를 하러 떠났다.

그 뒤, 2년 동안의 타이완 유학 생활은 새로운 인생 목표를 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2013년 10월1일부터 51일간 1200㎞를 걸어 타이완 섬을 돌았다. 그 과정에서 무료로 하룻밤 잠자리를 제공해준 타이완 사람들의 마음씨에 큰 감명을 받았다. 1995년 처음 문을 열어 타이완의 문화 성지가 된, 타이베이 청핀서점 둔난점의 경영 방식에 시선이 끌렸다. 그 서점은 24시간 운영으로 열혈 독자의 지지를 얻는 동시에 생활용품점, 패션잡화점, 테마 식당을 겸해 서점의 다원화 경영 모델이라는 아이디어를 그에게 선사했다. ‘비즈니스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지만, 문화 없이 살아남고 싶지 않다’라는 청핀서점 CEO의 한마디도 그의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중략) 마침내 2014년 초, 중국에 돌아온 그는 SNS를 통해 광저우에 24시간 서점을 열기 위한 크라우드펀딩을 개시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광저우와 서점을 사랑하는 30명의 친구들이 무려 120만위안(약 2억원)을 모아 준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2014년 7월8일 0시에 광저우 최초의 24시간 서점, 1200북숍을 출범시켰다. ‘1200’은 그가 1200㎞의 타이완 도보 일주를 해낸 것을 기념해 지은 이름이었다.”(류얼시 지음, 김택규 옮김, <서점의 온도> 역자 후기 중)

광저우 청년 류얼시(가운데 모자 쓴 이)는 대만 타이베이를 여행하며 1200북숍의 아이디어를 얻었다(위). 1200북숍에는 몸을 누일 수 있는 ‘소파방’과 무료 독서 공간이 있다. 1200북숍 누리집 갈무리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소파방’

광저우 ‘1200북숍’은 가고 싶었으나, 아직 가보지 못한 내 버킷리스트 서점이다. 미국 방송 이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두 곳(한 곳은 난징의 셴펑서점) 중 하나로 선정한 곳이기도 하다. 이 서점은 광저우의 문화 상징이자, 광저우를 밝히는 ‘정신적 등불’이다.

이른바 명문대를 나와 좋은 일터에서 그럭저럭 편안하게 살다 가는 삶이 ‘안락사’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는 창업자 류얼시. 어느 날 짐을 싸서 타이완(대만)으로 떠났던 그는 2년 뒤 다시 돌아온 고향 광저우에 세상의 모든 방랑자와 쉴 곳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정신적 피안처가 될 수 있는 24시간 서점 ‘1200북숍’을 열었다. 이 서점에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개 쉼터인 ‘소파방’이 있어서 집 없이 떠도는 도시의 객들과 가난한 여행자에게 임시 거처를 제공하고 있다.

책 <서점의 온도>를 보면 1200북숍에는 수많은 동백이와 모모가 이 서점에서 책을 읽고 잠을 자면서 몸과 마음에 ‘기름을 넣는다’. 그들에게 이 서점은 피안처이자 주유소다. 이곳에서 그들은 도시 한복판에선 받지 못했던 관심과 존중, 그리고 다정함을 경험한다.

<서점의 온도> 첫 번째 장에 등장하는 양둥이라는 10살 남짓한 아이도 이 서점의 소파방과 무료 독서 공간에서 종일 지내는, ‘갈 곳 없는’ 외로운 아이다. 엄마는 자신을 버리고 오래전에 집을 나가버렸고, 아빠는 타지로 돈 벌러 떠났다. 집에는 새엄마가 있지만 자신에게 밥을 해주지도 않고 신경도 써주지 않아서 아이가 돌아갈 수 있는 ‘집’은 없다. 1200북숍은 아이에게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 존중을 받을 수 있는 집과 학교 같은 따뜻한 ‘온도’가 있는 장소가 되었다. 1200북숍이 운영하는 심야책방은 어린 양둥과 같은, 따뜻한 ‘온도’가 필요한 수많은 ‘인생과 인생들이 마주치며’ 서로의 인생에 온기를 불어넣는 곳이다.

“사람들이 사는 게 징글징글할 때 술 마시러 오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웬만하면 사람들한테 다정하고 싶어요. 다정은 공짜잖아요. 서로 좀 친절해도 되잖아요.” 자신에게만 다정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은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동백이 쏟아놓는 넋두리다.

광저우 1200북숍에 가면 동백의 소망대로 ‘다정은 공짜’고 사람들도 ‘많이 친절하다’고 한다. 친절이라면 아주 오래전부터 ‘메이유’(沒有·없다)인 줄만 알았던 중국에 그런 천국 같은 친절과 다정을 ‘공짜로’ 제공하는 곳이 있다니 쉽게 믿기지 않는다. 그래서 언젠가 꼭 한번 가서 두 눈으로 보고 싶다. 정말 그렇다면 1200북숍은 내가 꿈꾸는 ‘인생 주유소’다.

그 여자에게도 갈 곳이 있었더라면

오래전 어느 가을 저녁, 혼자 벤치에 앉아서 멍한 두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그 여자에게도 ‘갈 곳이 있었더라면’ 삶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산다는 것 자체가 피곤하고 목구멍까지 슬픔이 차오르는 날, 우리에게는 항상 ‘갈 수 있는’ 다정하고 따뜻한 인생의 주유소가 필요한 법이다. 그곳에서 저마다 ‘소쩍새 우는 사연’을 풀어놓고 맘껏 목 놓아 울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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