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중 울리는 음유시.. 촉망받던 바리톤서 샹송가수 된 이유죠" [나의 삶 나의 길]

박연직 2019. 11. 2.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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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일 남성 샹송가수 무슈고(고한승) / 잘나가던 성악가 / 체사르 국립음악원 수석졸업 / 佛 툴롱시립오페라단 전속단원 / 초청 독창회 할 만큼 주목 받아 / 한국서 '제2인생' / 모친 위독 소식에 급하게 서울행 / 한양대 음대 강단 서며 정착 시작 / 서울프랑스학교서 11년째 교사로 / 성악가서 샹송가수 전업 / 프랑스 10년 살 때도 관심 없었는데 / 우연히 섰던 샹송 무대 반응에 전율 / 가족들 대중음악한다고 반대 심해 / "샹송은 내 인생" / 방송인 이다도시와 함께하는 전국투어 / 한국 노래 불어권 소개 등 활발한 활동 / '서른 즈음에' '쉰 즈음에'로 개사 소개도
‘푸른 하늘이 우리들 위로 무너진다 해도
모든 대지가 허물어진다 해도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면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
 
무슈고(고한승)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활동하고 있는 남성 샹송 가수다. 프랑스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가 사랑하는 연인을 비행기 사고로 잃은 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심정을 절절하게 표현한 ‘사랑의 찬가’는 그가 자주 부르는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다. 샹송 가수이면서 서울프랑스학교 음악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그를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래마을에 있는 학교에서 만났다.

고등학교 시절 노래를 잘한다는 얘기를 들었던 그는 정작 대학은 이과 전공을 택해 지원했다. 첫해 낙방한 그는 재수하면서 성악전공으로 진로를 결정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각종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그에게 온종일 성악공부를 하는 것은 사치였다. 결과는 연속 4번에 걸친 대학 진학 실패였다. 그는 미련을 떨쳐버리고 군대에 입대했다. 성남공항에서 군 복무를 하던 시절 그의 노래를 들은 중대장의 적극적인 배려로 성악공부에 집중했다. 왕래가 잦은 위병소 근무 대신 조용한 산속 초소로 근무지를 옮겨 준 덕분에 맘 놓고 성악공부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는 제대와 함께 5수 끝에 음대에 입학했다.

친구들보다 늦게 시작한 성악이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노래를 불렀다. 성악과를 졸업한 그는 청운의 꿈을 안고 이탈리아 푸치니 국립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생활비가 부족해 관광가이드를 하면서 어렵게 유학을 한 그는 1998년 프랑스 툴롱 시립오페라단 전속 단원으로 입단했다.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프랑스 체사르 국립음악원을 수석 졸업했으며, 2000년에는 툴롱 시립오페라극장에서 초청 독창회를 가질 정도로 촉망받는 바리톤 성악가였다. 하지만 그는 서울에 있는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안식년을 신청해 귀국했다. 1년 예정의 안식년을 마치면 프랑스로 돌아갈 계획을 갖고 있었던 그는 한양대 음대에서 프랑스 예술가곡을 가르치는 겸임교수로 임용되자 오페라단에 사표를 냈다. 이어 2008년 서울프랑스학교에 음악교사로 채용된 뒤 지금까지 11년째 재직하고 있다.
샹송 가수 무슈고는 “클래식을 전문으로 하는 성악가 친구들이 샹송을 가르쳐 달라고 할 정도로 샹송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다”며 “오페라를 부르는 성악가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샹송을 찾는 관중이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공연하고 샹송 인구 저변 확대를 위해 발 벗고 나서겠다”고 말했다. 그는 ‘서른 즈음에’ 등 가요를 프랑스어로 바꿔 부르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이제원 기자
그는 음악교사와 겸임교수로 근무하면서 틈틈이 무대에 섰다. 바리톤 성악가로 활동영역을 넓혀가던 어느 날 우연히 샹송을 부를 기회가 생겼다. 그때 부른 샹송이 자크 브렐의 느므키트파(저를 떠나지 마세요)였다. 성악가가 부른 샹송이 남달랐던지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바리톤 성악가로 무대에 섰을 때보다 더 많은 갈채에 그는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계기가 됐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10년 넘게 생활하다 귀국하자 국내에 뛰어난 성악가가 많은 것을 보고는 ‘내가 성악가로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었다. 방황 아닌 방황을 하고 있던 시기에 부른 샹송에 대한 관심과 지지에 그는 샹송 가수로 나서기로 마음을 굳혔다. 성악의 본토에서 유학한 해외파 성악가에서 샹송 가수로의 전업하겠다는 의향을 밝히자 가족들도 “이제는 하다못해 대중음악이냐”며 반대했지만 그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샹송만 듣고 싶어하는 관객이 많다는 점과 국내에 제대로 활동하고 있는 남성 샹송 가수가 없다는 점도 그를 샹송에 빠지게 만들었다.

“프랑스에 10년 동안 살 때는 샹송에 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샹송을 좋아하는 팬이 있는 데다가 라이브로 듣기를 원하는 분들이 적지 않은 현실을 고려할 경우 충분히 제 존재감을 알릴 수 있을 것 같아 샹송 가수로 나서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샹송을 본격적으로 부르면서 의외로 샹송을 좋아하는 팬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잊힌 노래인 줄로만 알았는데 많은 사람한테 추억으로 가슴 한쪽에 남아 있다는 것을 체감했다. 프랑스인이 많이 모여 사는 서래마을에서 만난 방송인 이다도시도 그를 샹송 가수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가 프랑스 음악을 국내에 알리고 싶다고 말하자 이다도시가 샹송을 통해서 대중 속으로 들어가자며 샹송 가수로 활동할 것을 권유했다. 이다도시와 의기투합해 ‘이다도시와 함께 하는 바리톤 고한승의 샹송 콘서트’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전국투어에 나서기도 했다.

우선 이브 몽탕과 에디트 피아프 등 국내에 많이 알려진 샹송 가수의 곡을 모아 음반을 냈다. 딱 들으면 알 수 있는 눈이 내리네, 사랑의 찬가, 장밋빛 인생 등 유명 샹송을 골라 가사를 음미했다. 프랑스에 10년을 살아 발음에는 자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태어난 두 딸은 “아빠 불어발음은 이탈리아 사람이 불어를 하는 것 같다”며 놀릴 때도 있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최대한 원곡의 느낌을 살릴 때까지 샹송을 불렀다. 프랑스인들도 그의 불어발음을 듣고는 웃음을 지었지만 그의 샹송 공연은 항상 관객들로 붐빈다.
그는 샹송이라는 대중음악에 성악을 접목한 샹송성악가라고 자부한다. 진정한 크로스오버를 추구하는 성악가라고 생각한다.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은 이국적인 외모 때문에 외국인으로 착각한다. 큰 키의 이국적인 외모가 샹송 가수로 활동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택시 운전기사에게 서래마을로 가자고 하면 “한국 온 지 얼마나 됐는데 한국말을 그렇게 잘하느냐”며 묻는 경우도 있다.

그는 불어는 사랑을 속삭이기에 적합한 언어라고 생각한다. 입술만 움직이면 발음을 할 수 있는 데다 약간의 콧소리가 들어가야 불어의 맛을 느낄 수 있다. 공연 때 불어를 잘하고 못 하고를 떠나 성악 발성을 가미시켜 노래를 부르는 특징 때문에 관객들의 호응이 크다고 자랑했다.

그는 샹송은 시라고 소개했다. 그래서 음유시인처럼 샹송을 부른다.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듯이 부르는 것이 샹송이다. 가사를 알지 못하더라도 샹송 가수의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샹송의 매력이다. 표정만으로 슬픔과 기쁨을 표현할 수 있는 게 샹송이다. 그도 거울을 보며 표정 연습에 많은 시간을 쏟는다.

그는 더 멋진 샹송을 국내 팬에게 소개하기 위해 새로운 샹송을 찾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원곡에 가까운 느낌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가사를 읽고 뜻을 파악하는 데 주력한다. 오페라단에서 활동할 때는 소리에 대한 부담 때문에 노래부르는 것이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샹송을 부르고 나서는 가사를 생각하며 표정으로 표현하는 특징 때문에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다. 샹송 가수로 활동하면서 진정한 예술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그는 샹송을 국내에 소개하는 것은 물론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최백호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를 불어로 번역해 불어권 나라에 소개하고 있다. 서른 즈음에는 쉰 즈음에로 개사해 불어로 불렀더니 반응이 좋아 7080노래를 계속 불어로 바꿔 부를 계획이다.
“고엽이라는 노래 때문인지 멜랑콜리한 가을에는 샹송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요. ‘눈이 내리네’까지 있어 가을부터 겨울까지 샹송 감상에 딱 좋은 계절입니다.”

그는 샹송을 찾는 관객이 있으면 어디든 달려간다. 그는 ‘무배콘’, 즉 ‘무슈고의 찾아가는 배달 콘서트’를 통해 샹송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샹송 팬들이 공연장을 찾게 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있는 곳을 그가 직접 찾아가서 공연하는 것이다. 피아노 반주만 있으면 공연을 할 수 있는 하우스콘서트도 그가 좋아하는 공연장이다.

그는 현재 네 번째 샹송앨범을 발표했다. 라보엠, 빠담빠담, 쉘부르의 우산, 고엽, 늘 그랬듯이 등 주옥같은 곡을 담았다. 그의 소망은 프랑스인이 좋아하지만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은 곡을 찾아 10집까지 샹송앨범을 발표하는 것이다.

그는 샹송의 저변 확대를 위해 샹송 동호인의 모임인 ‘샹송에콜’에 참여하고 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샹송을 가르치고 있으며 벌써 50여곡의 샹송을 익혔다. 그가 가르친 제자 중에 샹송 가수가 나올 정도로 수준이 높다. 성악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샹송 가수로 발걸음을 처음 내디딜 때는 자격지심이 생기기도 했지만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다. 그에게 샹송 레슨을 받는 성악가가 생겨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에게 개인 음악회 때 샹송을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성악가가 있을 정도로 샹송 바람이 불고 있다. 자신만이 잘할 수 있는 샹송을 부르는 것이 행복하다.

박연직 선임기자 repo21@segye.com

무슈고(고한승씨)는 △1967년 서울 출생 △경희대 음대 졸업 △이탈리아 푸치니 국립음악원 △프랑스 체사르 국립음악원 수석 졸업 △프랑스 툴롱 시립오페라단 전속 바리톤 △툴롱 시립오페라극장 초청 독창회 △한양대 음대 겸임교수 역임 △현 서울 프랑스학교 음악 교사 △샹송 앨범 4집 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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