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수 칼럼]하산길, 시간은 대통령 편이 아니다

이기수 논설위원 2019. 10. 31.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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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문재인 대통령이 31일 오전 부산 남천성당에서 모친 고 강한옥 여사 장례미사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모든 악업은 내가 지고 갑니다. 주상은 성군이 되세요.” 상왕으로 물러난 지 4년째, 태종 이방원이 생의 마지막 힘을 모아 기우제를 지내다 아들 세종에게 한 말이다. 태종은 “무엇 때문에 흘린 피였습니까. 죄는 저를 탓하시고 비를…”이라며 울부짖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형제들, 공신들, 처남들, 세종의 외척까지 쳐내려간 피바람을 그는 왕권 정지작업이라 했다.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사극 <용의 눈물> 마지막 회를 찾아본 것은 3년 전 이맘때 타오른 촛불이 생각나서다. 태종의 눈물과 그 겨울의 촛불은 공명(共鳴)했다. 벽을 싹 걷어주고 새 역사를 열어준 마중물이었다.

‘촛불대통령’이라 불렸다. 취임 첫달 국정지지율이 81%. 세대·지역·남녀·계층을 불문했다. 그해 6·10 기념식에서 지선 스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고을 장정들이 서로 먼저 타보려다 지쳐 쓰러지게 했다는 ‘용마(龍馬)’의 고사를 더했다. 소탐대실과 과욕을 경계하자고 총대를 멘 것이다. 사방팔방 거칠 게 없는 출발이었다. 그 국정지지율은 조국 돌부리에 걸려 대선 득표율(41%)이 뚫렸다가 지금도 하루하루 떨리고 있다. 왼쪽으로 감아 오르는 칡과 오른쪽으로 감기는 등나무의 갈등(葛藤)이 이럴 게다. ‘조국 대전’은 국회로 옮겨졌다. 혼군(昏君)을 넘어선 촛불도 쪼개졌다. 광화문광장과 서초역4거리, 그사이 반포대교 어디쯤이다. 격세지감 속에 문재인 대통령은 혼돈스러운 반환점 앞에 섰다.

5·18 광주둥이를 안아주고, 가습기살균제를 국가가 사과하고, 4대강 보를 열고, 고리원전 1호기를 세우고, 평창 올림픽이 한반도의 봄을 열고…. 임기 1년 달력엔 촛불로 달라진 세상과 대통령 어록이 이어졌다. “나는 거기까지…” 10월 마지막 날 밥상머리에서 시민사회 원로는 말을 잘랐다. 촛불무대에도 섰고 지금은 ‘비판적 지지’를 좌표 삼는 사람이다. “평가요? 박하죠. 착잡하고….” 그는 “붕 떠왔다”고 했다. 힘없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큰 개혁’, 대통령이 배수진 치고 뚫은 ‘민생의 큰 길’ 없이 전반전이 끝났다고 했다. 단임 대통령은 두괄식 개혁이 좋다고 끄덕인 밥상 위로 “밥이 민주주의”라고 한 대통령의 첫해 6·10 기념사가 소환되고, 그제 나온 ‘비정규직 36.4%’라는 아픈 숫자가 포개졌다.

공정·원칙·신뢰·겸손…. 조국 연관어로 곱씹어지는 말이다. 민주당 초선 의원은 그 66일을 “지옥이었다”고 했다. 살아온 가치와 침묵이 충돌하고, 민심과 멀어지는 시간이 괴로웠다는 표현일 테다. 김구 선생의 좌우명이 만사의 발원지를 살피라는 음수사원(飮水思源)이다. 조국이 넘지 못한 허들, 조국을 퇴장시킨 발원점은 공정사회와 불통이었다. 지금 여권이 걱정할 것은 메신저 위기다. 비유하면 ‘말발’이고, 정치에선 ‘개혁의 헤게모니’가 될 것이다. 대통령은 조국이 물러난 날, 총리는 국회 예결위장에서, 여당 대표는 16일 만의 기자간담회에서 “매우 송구스럽다”고 말했다. “많은 갈등을 야기한 데 대해” 사과한 대통령의 간접화법도, 야당 질의에 답한 총리도, 등떠밀리듯 한 여당 대표도 시민들의 화난 맘과 실의엔 못미친다. 판단·소통에 책임 있는 대통령 참모는 쇄신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풀리지 않고 막힌 응어리는 언젠가 터지는 게 역사다. 세월호의 아픔과 앙금이 2년6개월 뒤 촛불에서 폭발한 것처럼….

곧 하산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중반 때인 2004년 5월 “내려갈 때가 더 위험하다더라. 무사히 발 삐지 않고 했으면 한다”며 “잘 하산하려면 정상의 경치에 미련 갖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문 대통령에게 그 ‘정상의 경치’는 81% 지지율일 테다. 조국 표창장에, 대통령을 벌거벗겨 조롱하고, ‘갑질 대장’을 영입리스트에 올리고…. 제1야당의 헛발질도, 한 지붕 두 가족이 된 제2·제3야당의 ‘구락부 정치’도 점입가경이다. 그렇다고 ‘야당복’만으로 여당이 이긴 중간선거는 없다. 누가누가 못하나? 총선 목전에 시민들이 입에 담는 말이다. 원효대사가 일깨운 ‘화쟁(和諍)’은 갈대구멍으로 본 내 하늘만 고집하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 대통령이 주목할 하늘도 노랑풍선 너머에 있는 ‘반포대교 사람들’일 테다. 그 숫자까지가 81%였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교과서에서 읽은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은 이렇게 끝난다. 쉬운 길, 어려운 길, 처음 가는 길, 아니다 싶어 돌아간 길…. 번뇌 속 많은 갈림길에 서지만, 걸은 길과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게 숙명이다. 각오를 새롭게 해도 개혁·민생 봇짐만 천근만근일 하산길. 삐끗하면, 대통령은 촛불염원과 다른 ‘구시대의 막내’가 되고, 촛불은 세월을 덧없어 할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된다. 첫 단추는 소통, 답은 민생이다. 하산길, 시간은 대통령의 편이 아닐 수 있다.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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