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2019년 가을, 두 젊은 예술가의 초상
[요요 미술기행-28] 가을이 깊이 들어왔다는 걸 알 수 있다. 늦은 오후, 처음 와 보는 지하철역 가로수와 상가의 간판, 보도조차도 왠지 낯이 익고 익숙하다. 커피숍의 높고 빨간 문이 유난히 돋보인다.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1882~1941)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가장 이름난 성장 소설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가 경험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주인공은 어른으로 커가면서 알게 되는 감각과 관능, 그중에도 성의 유혹, 그 반대 정신세계의 강력한 인력, 고독과 가족과 교우 등 모든 것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독자적인 의식을 가진 개인으로 성장해 간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가족과 종교, 사회와 (아일랜드)민족의 현실 등 삶을 지탱하는 근본적 테두리이기도 한, 크고 작은 속박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를 결심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것은 곧 예술가의 길이기도 하다.
영문학자 김우창은 이 소설 속 예술가의 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예술가의 자유를 위한 그의 결단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여러 경험과 깨달음이 선행, 수반한다. 공중을 나는 수리의 이미지를 통하여 하늘의 바람 속으로 자신이 풀려나는 것을 느끼고 마음속에 삶의 충동의 외침을 듣는 것도 그러한 경험의 하나이다. 또는 주인공은 해변의 소녀의 모습에서 삶의 현실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깨닫기도 한다. 소설에 묘사된 이러한 광경들은 (…)그에게 하나의 계시(啓示)처럼 그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을 가리키는 조이스의 유명한 용어가 에피파니(Epiphany), 현현(顯現)이다. 그것은 직관적 진실 파악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경험의 본질 혹은 실체가 한순간에 완전히 이해되는 것을 에피파니라고 한다. 에피파니에 도달하는 찰나를 작품화한 이도 있다. 팝아트의 창시자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 1922~2011)이 아트 딜러이자 자신의 친구인 프레이저와 롤링스톤스의 멤버 믹 재거가 마약 현장에서 체포돼 이송되는 장면을 실크스크린으로 1967년 제작한 작품이 '스윙징 런던(Swingeing London)'이다.
젊은 작가 이어진에게 '인물'은 주변 상황과 공간을 그려내는 에피파니로서의 매개다. 상상의 실내 풍경은 바깥세상으로도 이어진다. 이어진은 독일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자발적 실업은 면해야겠기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세운상가 인근 재개발 구역에 얻은 작업실에서 새벽까지 그림을 그린다. 유화는 잘 마르지 않고 작업에 대한 욕심은 급하다. 마르지 않은 색에 색을 더하니 마치 수채화처럼 겹쳐 보인다. 모델이 될 만한 거리의 사람들을 사진 촬영해야 하지만 시간이 없다. 작업실에 찾아와 모델비를 주지 않아도 되는 친구들의 순간 동작을 포착해서 작업한다. 이번 겨울, 무용수들을 이끌고 바닷가로 간다. 촬영하고 그릴 것이다. 수개월 전 방문한 이어진의 작업실을 나서면서 입구에 모로 세워 놓은 풍경화가 좋다. 잠시 머물다 돌아오는 짧은 기간의 해외 레지던시보다는 장기 거주하면서 생존을 모색하는 작업을 계획한다. 독일을 가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한다. 이번 가을 계획했던 독일행을 실천하지 못한 내가 괜히 미안해진다.


동양화를 전공한 이승은 역시 카메라는 작업의 주요한 수단이다. 처음 찾은 사당역 인근 카페에서 대화를 하다가도 상대의 등 뒤로 비치는 기물과 창으로 들어오는 빛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먼지 이는 듯한 빈 공간을 잡아낸다. 지난여름, 졸전에서 처음 작품을 접했다. 밀도는 떨어지지만 작품이 컸고 시원했다. 마치 중국 상하이 화랑가의 주류 전시회 작품을 보는 듯했다.
그녀가 경험한 재료는 묵과 동양화 물감이다. 붓으로 밀어내고 당기는 물감이 주는 광물질 알갱이의 촉감이 좋다. 밑그림 없이 구도를 만들고 공간을 장악하는 것이 동양화의 매력이다. 그녀는 영상 작업 자체에도 관심을 둔다.
이승은은 수개월 전 다녀온 프랑스의 하늘이 그립다. 사회적 환경도 다르지만 자연적 환경도 뭔가 색감이 달랐다. 작가에게 풍경은 추상이다. 현실을 덜어냄으로써 관객들을 유토피아와 노스탤지어에 이르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상품이 포장되는 시간 연속선상 흐름을 삶을 갖춰 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예술가적 기질을 타고난 사람은 이를 거부한다. 원하는 시간과 공간에 머무르고 싶을 때 머물러야 한다. 자발적 실업을 통해 인생의 에피파니를 경험한다.
무간지옥인 이 땅에 예술이 주는 평화를 나눠주고 싶다. 의무감이라고 했다. 국내에서 대학원 진학도 미루고 프랑스행을 꿈꾼다. 헤어지기 직전 떠오른 몇 번 칼럼을 기고했던, 파리8대학에서 정치사회학 박사를 받은 프랑스 매체 한국어 발행인에게 물어보았다. 국립파리 보자르, 베르사이유 보자르를 추천한다. 그는 몸으로 밀고 가는 예술가가 왜 굳이 학위가 필요하느냐고 묻는다.
난 이들에게 예술가와 예술가가 아닌 사람 간 차이는, 생각을 작품으로 구현해내고 행동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갤러리 사업을 하면서 '어설픈 재능이 재앙을 만든다'는 걸 실감했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려 예술고에 가고 미술대에 간다. 이후의 한 길 행보는 확고한 신념이 없으면, 재능이 없어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보다 더 고달퍼진다. 스칼라와 올바른 벡터를 가진 두 젊은 예술가가 불필요한 순례에 들지 않고 순항하기를 기원한다.
[심정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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