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비 윤씨를 위한 변명

2019. 10. 25.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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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이숙인의 앞선 여자
일러스트 장선환

극도의 폭정으로 역사의 비극을 초래한 연산군은 기이한 심리와 행동을 보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유년기를 들여다보면 ‘망나니 칼춤’을 추게 된 연원이 짐작되기도 한다. 태어나 세자에 책봉되기까지 6년은 그의 어머니 윤씨가 왕비에 올랐다가 폐위되고 사사되는 폭풍의 시간들과 딱 겹친다. 사실 윤씨가 무슨 죄를 지어 왕비에서 서인이 되고 사약을 받는 흉악범이 되었는지, 당시 사람들도 그 실체적 진실을 궁금해 했다. 다만 선녀에서 악녀로 전락하는 과정을 통해 ‘그녀의 죄’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볼 수 있을 뿐이다.

폐비 윤씨로 더 알려진 제헌왕후(1455~1482)는 정3품 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던 중 성종의 후궁에 간택되어 입궁하게 되는데, 어머니의 사촌인 신숙주가 도왔다고도 한다. 공혜왕후의 죽음으로 비워있던 곤위가 그녀에게 돌아간 것은 입궁 3년만의 일이다. “현숙한데다 모든 일에 정성과 조심성으로 임하니 대사(大事)를 맡길 만하다.” 수렴청정 중이던 ‘살아있는 권력 정희왕후의 뜻이었다. 왕비 등극의 행사는 화려했다. “그대 윤씨는 성품이 부드럽고 마음가짐이 아름다우며, 정숙하고 신실하며 근면하고 검소하여 대비전의 총애를 받아왔으니, 예법을 갖추어 왕비로 책봉한다.” 책봉식이 있은 지 3개월 만에 윤씨는 원자를 출산하는데, 나중의 연산군이다. 그리고 다시 4개월이 흘렀을 때 왕비는 대비전 여자들(정희왕후와 소혜왕후)의 구설수에 오르는데, 곤위에 오른지 7개월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아마도 왕비의 친잠(親蠶) 행사와 관련된 일인 듯싶다. 친잠이란 양잠을 장려하여 항산(恒産)을 두둑이 하자는 취지의 고례(古禮)로 진연(進宴)를 동반함으로써 왕비의 존재감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대비전에서는 연회를 생략하라고 한다. 하지만 친잠 의례의 백미인 연회가 없을 수 없어 그녀들의 허락을 얻기 위해 수차례 들락거린 덕에 겨우 행사를 치르게 된다. 외명부 부인들의 화려한 하례 행렬로 왕비가 더욱 돋보이는 가운데, 왕은 일장 연설을 한다. 교서의 형태로. “누에를 길러 항산이 풍족하게 되면 예의가 저절로 갖추어질 것이고, 나라는 지치(至治)의 높은 수준에 이를 것이다. 이 행사의 뜻을 조정과 민간에 널리 알려 모두 알게 하라.”(성종 8년 3월 14일). 이랬던 왕이 보름 후에 대왕대비의 명령이라며 국정 회의에 중궁을 폐하는 의제를 던져놓는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왕비를 묘사하는 언어로 ‘질투’와 ‘불손’이 나오더니, 정씨와 엄씨 두 후궁을 음해하는 언문 문건이 왕비 친정의 두 비(婢)에서 나왔다고 한다. 연루자로 왕비의 어머니 신씨와 이복 오라비 윤구와 윤우 및 그 아내들이 거론되었다. 그런데 문서 작성자로 지목된 여자들 모두 언문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곤경’에 처한 사건은 다시 두 비 삼월과 사비(四非)를 심하게 족쳐 왕비와 그 어머니도 알고 있었다는 식의 자백을 받아낸다. 하지만 직접 조사에 임한 왕은 삼월의 단독 사건으로 결론내고, 왕비나 그 가족들은 전혀 무관함을 공포한다. 회의에 참석한 모든 이가 이 사실을 수용하지만 유독 한 사람 정인지는 “끝까지 추궁하여 후세에 구실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 는 독보적인 행보를 보인다. 참고로 정인지는 의숙공주의 시아버지로 대비전의 권력자 정희왕후의 사돈이다. 결국 왕비의 모친 신씨의 작첩을 빼앗고, 여비는 각각 교형과 극변 유배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2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아침, 윤씨의 폐위 교서가 ‘호외’로 날아든다. 윤씨는 “성격이 패려하고 왕조모와 왕모에게 불순하며 덕을 잃은 짓이 상당히 많아 도저히 종사(宗社)를 받들 수 없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성종 10년 6월 2일) 이 결정에 대신들은 불복했다. 바로 전날 아무런 논의가 없다가 밤에 갑자기 입직한 승지를 안으로 들라 했다가 다시 그만두라고 하다가 이른 아침에 폐비 하교를 내린 이 상황을 알아듣게 설명해달라는 것이다. 이에 “윤씨는 성품이 본래 흉악하고 위험하여 행실에 패역함이 늘 많았다”로 시작되는 폐비 교서가 모양을 갖추었다. 이번에는 성균관 유생 65인이 중궁 폐출을 반대하고 나왔다. 왕은 이의를 제기한 대신들을 망령된 정보로 백성을 동요시켰다며 의금부에 회부시켜 추국하게 하고, 국가 일에 관여한 서생들은 모두 감옥에 처넣으라고 명했다. 왕은 늘 ‘내가 그리 우습냐?’ ‘폐비가 나보다 중하냐?’며 자신의 콤플렉스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진상이었지만, 이 절대 권력을 제어할 방법은 아직 없었다. 폐서인으로 사가(私家)로 내쳐진지 3년, 28세의 윤씨는 사사되었다. 곧 이어 아들 이융의 세자 책봉식이 경복궁에서 거행되었다.

현숙하여 대사를 맡길 만하다던 그녀가 패악이 너무 심해 도저히 중전 자리에 둘 수 없을 정도의 사람이 되는데 걸린 시간은 단 7개월이다. 한 개인이 새로운 집단에서 뭘 해보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다. 윤씨의 경우 완전히 새로운 공간에서 낯선 관계들에 휘말렸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조작된 언문 문서로 사람을 볶아댄 끝에 언문을 몰라 문서를 작성할 수 없음이 드러나고서도, “끝까지 파헤쳐야 할 것”을 뻔뻔하게 주장하는 고관대작. 그들에게 ‘정의감’이 한 톨이라도 있었을까. 이런 판국에 그녀가 설령 상스러운 욕을 했다 한 들 뭐가 그리 죄일까 싶다. 그것이 혈친을 난도질하고 아들을 빼앗고, 사약을 내려 죽여야 할 사안이었는가 말이다. 그녀의 아들이 광기와 복수로 가득한 폭군이 되어 줄줄이 경을 치게 되었을 때, 잠깐 후회를 했을지 알 수 없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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