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낡아서 바스러져 가는 것들 사이..이곳도 언젠가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손아람 작가의 다리를 걷다 떠오르는 생각]

손아람 작가 2019. 10. 2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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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팔당대교

경기 하남시 창우동과 남양주시 와부읍 팔당리를 잇는 팔당대교의 길이는 총 935m에 이른다. 팔당대교는 팔당댐 아래로 한강 본류를 가로지르는 첫 번째 다리로, 한강에 18번째로 건설됐다.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취미로 책상을 만들곤 한다. 먼저 목재 수입 업체에서 두꺼운 집성목을 구입한다. 무늬가 아름답고 단단해서 잘 휘어지지 않는 아카시아나 멀바우 목재를 선호하는 편이다. 원하는 크기로 자르려면 재단비가 든다. 배송받으려면 용달 트럭을 빌려야 해서 또 추가비용이 든다. 책상의 완성도는 사포질이 좌우한다. 이 정도면 됐겠지, 라는 생각이 세번쯤 들 때까지 거친 사포로 표면을 연마한다. 고운 사포로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오일을 스펀지로 곱게 펴바른다. 귀찮지만 시간을 단축하려면 무거운 판재를 들고 옥상에 올라가 햇볕에 잘 말려야 한다. 마르면 다시 거친 면을 사포로 연마한다. 다시 오일을 먹인다. 다시 옥상으로 들고 가서 말린다. 마지막 사포질로 마무리한다. 단단한 목재 표면에 드릴로 작은 구멍을 뚫는다. 철제 주물 다리를 나사로 연결한다.

다 만든 책상을 지인들에게 보내기 전에 인두로 지져 서명을 남긴다. 겉보기로는 특별할 게 없는 책상은, 오로지 마지막 5분 동안 남긴 이 서명으로 인해 특별한 지위를 갖게 된다. 이 차이는 순수하게 상징적인 것이다. 브랜드 가치란 게 어떻게 탄생하는지 깨닫는 순간이다. 그래서 책상은 내 노동의 상징적 가치를 인정해줄 만한 사람들에게만 보냈다. 물론 다시 한번 용달차 비용이 든다. 완성된 책상을 보고 돈 주고 살 테니 하나 만들어 줄 수 있겠냐고 묻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장사로 생각하면 대체 얼마를 받아야 수지가 맞을지 감이 오지 않는다. 비슷한 자재를 사용한 책상의 인터넷 최저가는 내가 들인 돈보다 10만원쯤 더 저렴하다. 노임을 제하고 원가만 따져서. 게다가 국내산이다. 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을까?

한강 상류에 놓인 팔당대교는 특별한 감흥을 남기는 다리는 아니다. 반대로 나는 특별한 생각에 이끌려 다리를 걸었다. 온갖 문서를 뒤져보아도 근래에 준공된 팔당대교에서 뽑아낼 만한 사연은 없지만, 악명 높은 교통 체증에 시달리면서도 눈길을 끄는 이야깃거리 하나 갖지 못했다는 점은 오늘 내가 하려는 이야기에서 팔당대교의 역할에 더없이 어울리는 위치다. 이 다리는 남양주시와 하남시 사이를, 낡아서 바스러져 가는 것들 사이를 잇고 있다.

남양주시와 하남시를 잇는 다리

악명 높은 교통 체증에 시달리면서

눈길 끄는 이야깃거리 하나 없다

팔당대교를 남양주 방면으로 건너 한강을 끼고 한참 올라가면 나오는 마석가구공단은, 불가능한 가격의 가구들을 세상에 내놓는 곳이다. 본래 이곳은 한센병 치유자들의 정착촌에서 기원했다. 한센병은 1940년대에 개발된 항생제로 이미 완치가 가능한 병이었지만, 수천년간 지속되어온 격리와 학살의 처방전은 20세기 후반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의학적으로는 완치되었지만 사회적으로는 불치병 상태에 놓인 한센병 치유자들은 적대적인 세상에서 스스로를 격리해야만 했다. 한센인들의 사회적 재활을 도우려는 성공회 선교사들이 마석 땅 4만평을 구입해 무상으로 나눠주었고, 거기서 정착민들은 자립 공동체를 꾸려나갔다. 한센인들은 초기에는 농업과 축산업에 종사했고, 지역 일대가 상수도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뒤로는 소유지를 가구 공장 부지로 임대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이주노동자들이 가구 공단으로 유입되면서 정착민의 구성이 한바탕 뒤바뀌게 된다. 건물주의 위치로 신분이 격상한 한센인들, 자본주의 사회의 최상층과는 거리가 먼 영세 공장의 고용주들, 코리안드림을 좇아 노동자 대투쟁 시대의 노동 사각지대로 밀려들어온 이주노동자들 사이에 성립한 기묘한 삼각관계는 남양주시 외국인복지센터에서 기획한 기록물에서 이렇게 표현되었다.

남양주 쪽으로 가면 마석가구공단

하남시 방면으로 건너면 미사리

모두 사라져가는 것의 흔적이다

마을 주민인 한센인이 이주노동자들의 임금체불 문제를 직접 나서서 해결한 적도 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한센병 후유증으로 손가락 열 마디가 일그러지고 다리 한쪽이 없던 김종호씨 이야기다. (…) 자기 소유의 공장에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임금체불이 계속되거나 나쁜 소문이 돌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벼룩의 간을 빼먹고 문둥이 콧구녕에 있는 마늘을 빼먹을 새끼들아, 꺼져!” 그가 습관처럼 내뱉는 말 한마디에 임금체불 공장주는 꼼짝없이 두 손을 들었다. 임대인이 이주노동자들을 대신해 공장주를 거세게 압박하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체불된 임금을 해결해주고 공장 운영을 계속하든가, 임대인의 요구대로 이곳을 떠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우린 잘 있어요, 마석>, 고영란, 이영)

가구 판매점 거리 위쪽 산등성이에 몰려 있는 낡은 공장들을 보고 있으면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마술처럼 저렴하고 질 좋은 제품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평형을 맞추기 위한 값을 누군가 치러야만 하는 것이다. 진회색의 시멘트 벽돌이나 곰팡이 낀 콘크리트 벽체로 쌓아올린 공장 건물들은 아직까지 동네에 남아있는 80년대 축사의 흔적과 잘 구별되지 않는다. 온갖 가구가 만들어지는 공장 실내는 마치 가구의 사용이 금지된 공간처럼 최소한의 작업대만이 놓여 있다. 이곳에서는 철지난 마르크스의 주장을 반박할 도리가 없을 것 같다. 마르크스는 상품을 사용 가치에 따라 만드는 데 반해, 교환 가치에 따라 내다파는 자본주의 시장이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렸다고 보았다. 5만원짜리 책상을 만드는 일의 가격적 가치는 그 책상을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의 가치와 같지 않다. 딱 한우 스테이크 한 접시만큼의 가치와 같다.

1986년 착공해 1995년 4월 완공된 팔당대교의 개통 기념 플래카드 아래로 차량들이 지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퇴락한 ‘흉물’은 첨단산업부지로

라이브 카페는 대부분 음식점으로

변모할 예정이거나 탈바꿈했다

눈으로 살펴보고 가구를 구입하려고 찾아왔다가 길을 잃은 방문객을 제외하면, 공단은 외부인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다. 이주노동자들도 공단 바깥으로 좀처럼 나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주변을 둘러싼 녹지를 품은 쾌적한 아파트 단지와는 생활의 교류가 느껴지지 않는다. 공단의 경계를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은 것처럼 공기마저 다르게 느껴진다. 입구에 방치된 폐자재들 사이로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났고, 한때 이주민 아동들이 다녔던 폐교의 운동장에는 키 작은 농구 골대와 기울어진 축구 골대가 녹슬어가고 있다. 남양주시는 인근 주민들이 ‘흉물’로 인식하는 마석가구공단을 이전할 계획을 갖고 있지만, 후보지를 검토하기만 해도 대상 지역 주민들의 격렬한 반발이 되돌아온다. 기피 시설을 두고 벌어지는 핑퐁 게임이 으레 그렇듯이, 탁구공의 입장에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값싸고 좋은 물건과 값싸고 좋은 노동에 대한 대접은 결코 같지 않다.

팔당대교를 하남시 방면으로 건너도 역시 사라져 가는 것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라이브 카페들은 한때 행정상으로는 사라진 지역명인 ‘미사리’ 자체를 뜻했다. 이곳의 라이브 카페들은 소공연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비주류 음악인들에게 설 무대를 빌려주었지만, 활황기였던 2000년대 초반 즈음부터 이미 ‘불륜 커플’ ‘한물간 가수’ 딱지가 붙어 관객과 가수 모두 떳떳하기 어려운 공간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미사리에서 한동안 공연했던 가수 서문탁은 무대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퇴물 취급받는 게 정신적으로 힘들었다고 토로했던 적이 있다. 2006년 개봉한 영화 <라디오스타>에서는 미사리의 분위기를 더욱 극단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영화가 그려내는 미사리 라이브 카페에서는 서로를 존중하지 않는 관객과 뮤지션이 충돌한 끝에 각자의 근본을 부정하는 모욕을 주고받는다. “돈은 니 마누라한테나 줘!” “지가 조용필인 줄 알아요, 한물갔으면 좀 찌그러지는 맛이 있어야지!”

그나마 음침하게라도 기억할 거리가 남아있던 시절조차 지나갔다. 강변을 따라 늘어섰던 60여개의 라이브 카페는 대부분 음식점으로 바뀌었고, 카페촌의 터줏대감인 윤시내의 ‘열애’와 송창식의 ‘쏭아’만이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종처럼 외롭게 남아 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가까운 미사 신도시에 작업실을 가진 가수 라디는 지금도 송창식의 공연을 보기 위해 종종 쏭아를 찾는다. 한국 대표 가수였던 송창식의 공연조차 관객 열 명을 못 채울 때가 많지만, 라디는 라이브 카페를 ‘한물간 가수’의 무대로 부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정점을 지나면 누구나 한물갑니다. 그때부터는 평생 동안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느냐만이 중요한 거죠. 저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힐 때 송창식 선생님 공연을 보러 가요. 돈이 궁해서 계속 공연하시는 게 아니에요. 여전히 관객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아 있는 거죠. 그런 무대를 보고 나면, 나도 미래에 저렇게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얻죠.”

라디 역시 소공연을 선호하지만, 준비된 상설 무대가 거의 없어 직접 무대를 만들곤 한다. 관객의 눈이 보이는 무대에 서면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는 관객과 가수가 분위기를 공유할 수 있는 작은 공연이 드물어진 것은, 관객과 가수 사이에 음악적인 대화가 잘 오가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대중매체를 통해 음악을 주로 접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음악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양식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음악이 ‘특별한 사람’의 전유물로 인식되는 곳에서는, 관객도 ‘특별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의 무대에서만 음악을 찾게 된다. 가수는 우상으로 숭배되고, 관객은 성지순례자의 역할을 맡는다. 그럴수록 음악 그 자체에 담긴 이야기는 힘을 잃는다. 경전에 쓰인 언어가 사멸하는 과정이 대개 그와 같다.

한물가서 찌그러지고 만 것들은

새로움을 향한 갈구로 이어진다

하지만 결국 모두 낡을 운명이다

종말 이후의 세상처럼 퇴락한 마석의 가구단지는 이전이 끝나면 첨단산업부지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미사리 라이브 카페들의 무덤터에 세워진 식당들 역시 인근에 새로 들어선 대형 복합쇼핑몰에 손님을 빠르게 빼앗기고 있다. 하지만 끊임없는 명멸 속에서 결국에는 모든 게 다 낡을 운명이다. 첨단산업도 영원히 첨단일 수는 없고, 새 쇼핑몰도 영원히 번쩍이는 공간일 수는 없다. ‘한물가서 찌그러지는 것’에서 ‘새로움을 향한 갈구’로 이어지는 섭리의 과정에는 놓치기 쉬운 작은 틈이 있다. 사람들은 단지 낡음을 싫어하는 게 아니다. 의미 없는 것, 사연과 이야기가 없는 것, 부질없다고 느껴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할머니가 남긴 유품과 배터리 수명이 다된 구형 스마트폰의 차이, 혹은 불에 타 무너진 숭례문과 아직 멀쩡한 재건축 대상 아파트의 차이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두 종류의 사물 인식은 두 종류의 인간형에 대응한다. 낡은 것의 의미를 탐색하는 사람과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사람. 작가인 나는 전자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내 직업이 낡아빠진 사물들의 범주 첫줄에 위치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전에 팔당대교에 서면 상류 쪽으로 물안개 사이로 팔당댐이 산맥처럼 솟아나고, 저녁 즈음에 붉은 노을 속에 한강의 흐름에 밀려 떠내려가는 작은 섬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고즈넉한 풍경 앞에 멈춰서는 이는 거의 없다. 팔당대교 위를 지나는 무수한 자동차들, 허리를 숙인 자전거족들은 그저 어디론가를 향하는 길에 다리를 밟고 지나간다. 아직 젊은 팔당대교는 그들 각각이 향한 목적지에 깃든 사연을 갖지 못한 평범한 콘크리트 교량일 뿐이다. 언젠가 이 다리도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목적지가 될 수 있을까? 충분한 이야기가 쌓일 때까지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아마도 한물가서 찌그러지는 날이 더 빠르게 닥쳐올 것 같다. 어깨 나란히 세워질 새 다리인 제2팔당대교가 곧 착공될 예정이다.

손아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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