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 생활에 지친 몸, 뜨거운 시칠리아에서 위로받다

2019. 10. 17.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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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권은중의 나이 쉰에 떠난 이탈리아 요리 유학기 ⑮ 인턴을 마치며 시칠리아로 떠난 이유

레스토랑은 전쟁터, 셰프는 만능 일꾼 “이 나이에 저 노동강도면 골병” 걱정 뒤 인턴 4개월만에 업소 개업 꿈 접었지만 이탈리아 요리 향한 마음 더 간절해져 이탈리아에서 가장 뜨거운 시칠리아 2700년 전부터 이어진 화산 활동에 과일·채소에 강한 색채·향 담겨 있어 ‘겨울 토리노→여름 시칠리아’로 대이동

10월2일 토리노에서 출발해 도착한 팔레르모 공항은 한여름 날씨였다. 공항 바로 옆에 거대한 바위산이 있는 것이 특이했다

나는 지난 9월 말 인턴을 하는 토리노 레스토랑에 가서 짐을 챙겨서 나왔다. 6월부터 했던 인턴 생활을 끝낸 것이다.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는 인턴십 기간이 다른 요리학교에 견줘 꽤 길다. 최장 8개월이다. 스승 밑에서 기술을 배우는 도제 제도의 전통이 아직 강하게 남아 있는 탓이다. 이런 전통에 바탕을 둔 학교 커리큘럼대로라면 내년 1월까지 인턴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5월 말 학교를 마칠 때 9월 말까지 인턴을 하겠다고 미리 말했다. 그 시기 서울 집의 전세 계약 연장 문제도 있었고 50이 넘은 내 체력으로 연말까지 이탈리아에서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학교에서도 당시 “왜 인턴을 짧게 하냐”고 말하다가 만학도의 사정을 고려해 승인해주었다. 다행히 이렇게 인턴을 짧게 마쳐도 졸업장을 받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동기들보다는 짧았지만 내가 인턴 생활에서 얻은 것은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학교를 졸업하고 인턴을 마친 뒤 내년쯤 한국에서 레스토랑 개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거의 접었다. 인턴을 해보니 쉰이라는 나이에 레스토랑 개업이 쉽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지금까지 레스토랑 개업을 꺼린 이유는 경험 부족에 내 노후 자금을 날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 탓이었다. 그러나 인턴 생활을 해본 지금에는 레스토랑을 하다가는 골병들겠다는 걱정이 가장 앞선다.

내가 인턴을 하기 위해 5월 말 ‘라 베툴라’를 찾아간 날, 셰프인 프랑코는 내가 “기자를 20여 년 하다가 그만두고 셰프가 되려 한다”고 말하자 “기자 계속하지 왜 이런 전쟁터에 뛰어들어”라고 물어봤다.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곧 그 뜻을 알게 됐다.

인턴 생활을 하던 레스토랑의 셰프 프랑코는 ICIF의 교수진이었다. 학교를 다닐 때는 그가 매일같이 자는 시간을 빼고 일하다가 잠깐 시간을 내 강의하러 온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레스토랑은 전쟁터였다. 셰프는 불과 기름이 튀는 주방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고 자신을 찾는 손님을 주방이나 홀에 가서 직접 응대한다. 또 매일 아침 음식 재료와 비품을 본인이 사온다. 가스레인지·오븐·냉장고·고기분쇄기·고기슬라이서·반죽기·젤라토 기계 등 셀 수 없이 많은 레스토랑의 장치들이 망가지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가장 먼저 고치는 사람도 셰프였다.

심지어 셰프는 한 달에 2~3번씩 레스토랑에서 100㎞나 떨어져 있는 요리학교에 가서 강의도 했다. 강의가 있는 날은 아침 7시에 나가 오후 5시쯤 돌아오는데 와서는 다시 불 앞에 섰다. 그러면서 최소 한 달에 한 번씩은 메뉴를 꼭 바꾼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셰프가 안 아픈 게 이상할 정도였다. 실제로 셰프는 6월 중순 토리노 병원에 사흘간 입원해 개복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이탈리아에 유학을 다녀온 것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아내였다. 내가 레스토랑 개업이라는 헛된 꿈을 드디어 접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비극인 전쟁을 통해서 인류의 지혜가 발전하듯이 전쟁 같던 인턴 생활에서 배운 것도 많았다. 먼저 이탈리아 요리를 좀더 이해하게 됐다. 심플하지만 강렬하고 강렬하지만 심플하다는 이탈리아 요리를 설명하는 모순적인 말의 뜻을 알게 됐다. 개인적으로 유학 기간 최고의 소득이었다.

시칠리아의 새우해물파스타.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맡기 힘든 바다 냄새가 난다. 함께 마신 시칠리아 화이트 와인과 잘 어울렸다.
1m가 넘는 사르데냐 참치. 사르데냐는 시칠리아 위에 있는 지중해의 섬이다. 매주 한두 마리의 참치가 레스토랑으로 배달돼 왔다

그건 재료에서 오는 강렬함이었다. 아프리카같이 뜨거운 시칠리아에서부터 한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는 북부 알프스에서 나오는 재료는 참 다양하다. 인턴을 했던 레스토랑에서는 북부 피에몬테의 송로버섯부터 남부 사르데냐의 생참치까지 맛있는 재료가 매일같이 들어왔다. 이런 재료로 소스를 만들고 음식을 만들어보면 이탈리아 요리가 단순한 조리법으로 강렬한 맛을 어떻게 끌어내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이탈리아의 지역성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건 이탈리아에서 생긴 새로운 호기심이었다. 이탈리아 요리의 기본인 와인과 올리브오일은 지역마다 다르다. 파스타도 햄과 치즈도 지역마다 맛도 모양도 제조법도 모두 다르다. 심지어 같은 주라도 도시마다 다르다. 시칠리아에도 팔레르모와 트라파니 등 도시마다 고유의 파스타가 있다. 지역 사람들은 이를 전통이라며 엄청나게 애지중지한다. 뭐든지 서울 것을 상석에 두고 지역 것을 일단 낮게 보려는 우리 상황에서 보면 부러운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이는 이탈리아의 오래된 전통이다. 이탈리아에서 살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러시아 문학가 니콜라이 고골(1809~1852)은 “이탈리아의 도시는 시골이며 시골은 도시다”라고 말했다. 시골이든 도시든 자신만의 스토리를 가진 이탈리아 각 지역은 뚜렷한 개성이 있다. 음식은 그 개성을 드러내는 가장 대표적인 매개체다.

내가 이런 지역성을 쉽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와인이다. 이탈리아는 지역마다 전혀 다른 포도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 있다. 한때 중앙 정부에서 포도 품종 통일을 종용했지만 지역에서는 이런 방침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품종을 고수해왔다. 이탈리아에서 나의 유일한 사치는 이름도 생소한 미지의 와인을 마시는 거였다. 이래저래 힘들던 인턴 시절 이탈리아 와인은 나를 부드럽게 위로해주었다.

피에몬테에는 타야린이라는 독특한 생면이 있다. 달걀노른자를 넣어 반죽한 이 생면은 라구(토마토소고기)소스로 조리하는데 이 지역 와인인 네비올로와 잘 어울린다.

특히 시칠리아 와인은 큰 즐거움이었다. 시칠리아는 기록상으로 2700년 전부터 화산 활동을 시작해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화산 활동으로 뿜어져 나온 에너지 덕분에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에서도 비옥한 토양을 자랑한다. 시칠리아 과일과 채소가 강한 색채와 향을 가지는 것은 이런 특징 때문이다. 그래서 시칠리아 포도로 만드는 와인은 레드나 화이트나 실패가 거의 없었다.

ICIF 와인 강사인 에지오가 시칠리아 와인인 돈나푸가타를 학생들에게 따라주고 있다. 이날 나는 시칠리아 화이트 와인을 처음 마셔봤다.

학교와 레스토랑에서 나는 피에몬테 음식과 피에몬테 와인인 네비올로나 바르베라를 많이 마셔보았다. 피에몬테의 기름진 음식은 타닌이 강한 네비올로 품종의 와인과 궁합이 잘 맞았다. 그렇다면 남부 해산물 요리와 남부 와인의 궁합은 어떨지 궁금했다. 나는 남부 레스토랑으로 인턴을 가고 싶었지만 여름 극성수기에는 20대도 인턴 생활을 버티지 못한다는 학교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인턴이 끝날 무렵 나는 시칠리아행 교통편과 숙소를 알아보고 있었다. 귀국 전에 시칠리아 태양 아래서 시칠리아 와인과 음식을 꼭 먹어봐야 할 것 같았다. 인턴 생활 내내 몸도 마음도 털리고 꿈마저 접었지만 이탈리아 음식에 대한 호기심은 여전했다.

동기인 카를로(한국이름 이진원)가 수업시간에 시칠리아 깨빵(시칠리아노)을 만든 뒤 들고 있다. 시칠리아 빵은 다른 지역 빵보다 손이 많이 간다.

나는 이탈리아 음식을 알고 싶었고 맛있게 만들고 싶어서 적지 않은 나이에 이탈리아에 유학 왔다. 그건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였다. 이탈리아 오기 전까지 요리는 내 인생에서 알게 된 최고의 즐거움이었다. 힘들게 기자를 그만두고 뛰어든 요리의 길을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시칠리아에서 그 즐거움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이 허황된 꿈을 접고 다시 평범한 일상을 살길 바라는 아내에게 와인과 음식을 공부하려고 시칠리아에 가겠다는 걸 설명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게 분명했다. 복잡한 설명은 필연적인 반대를 불러오는 법이다.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나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여보, 인턴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 아무래도 시칠리아를 가봐야 할 것 같아.”

“왜? 거기 위험하잖아. 그냥 남들 가는 로마나 토스카나를 갔다 오지그래.”

“이탈리아 친구들이 거기 위험하지 않대. 그리고 한국 가기 전에 다시는 안 갈 것 같은 곳을 가보려고. 지금 아니면 내가 언제 시칠리아에 또 가보겠어.”

“에구, 인턴 끝났으면 얼른 들어올 일이지… 맘대로 하셔.”

아내의 핀잔을 승낙으로 얼버무리고 나는 10월 초 인턴을 하던 토리노에서 비행기를 타고 1000여㎞ 떨어진 남쪽 시칠리아로 향했다. 시칠리아로 떠나던 날 토리노의 오전 날씨는 10도 안팎으로 쌀쌀해 코트를 입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1시간30분 만에 도착한 시칠리아는 30도에 이르는 한여름이었다. 활화산이 꿈틀거리는 시칠리아의 뜨거운 에너지가 느껴졌다.

글·사진 권은중 <음식 경제사> <독학 파스타>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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