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의 수난 [편집실에서]

2019. 10. 16. 09:3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캘린더 기사’라는 게 있습니다. 국가 지정 공휴일이나 기념일, ‘5·18 OO주년’과 같이 특별히 기억해야 할 가치가 있는 날에 즈음해 쓰는 기사를 말합니다. 예컨대 세계 금연의 날(5월 31일)에는 담배의 폐해를 강조하는 기사, 스승의 날(5월 15일)에는 참스승의 표상이 되는 훌륭한 선생님을 소개하는 보도가 지면을 장식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비중 있는 기념일의 경우 몇 회에 걸쳐 시리즈를 기획하기도 합니다.

‘캘린더 기사’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기념일을 꼽으라면 아마 ‘한글날’을 들 수 있겠습니다.

해마다 한글날을 전후해서는 거의 모든 매체가 우리말·글과 관련된 기사나 아이템을 다룹니다. 한글의 우수성을 되새기거나 아름다운 우리말을 알리기 위해 애쓴 이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하지만 이런 미담보다도 우리말에 섞여 있는 일본어의 잔재를 지적하고, 과다한 외래어 사용을 자제하자는 캠페인성 기사가 더 눈에 띕니다. 물론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얼마 전 국립국어원이 ‘가려써야 할 일본어투 용어’를 선정해 ‘망년회’, ‘구좌’, ‘익일’과 같은 단어는 ‘송년회’, ‘계좌’, ‘다음날’과 같은 말로 쓰도록 권장했다는 뉴스는 거의 매년 접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말과 글이 훼손되고, 외래어나 ‘일본어 찌꺼기’가 일상 속에서 범람한다는 지적은 수없이 제기돼 왔습니다. 인터넷·소셜미디어(SNS)의 급격한 발달과 확산에 따라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됐습니다. 온라인 상에는 온갖 혐오와 비하의 언어, 욕설이 난무합니다. 이른바 ‘급식체’로 통칭되는 청소년들의 비속어는 우리말 파괴뿐 아니라 세대 간 소통마저 단절시키고 있습니다. 한·일관계가 악화되면서 일본을 배척하고 일본 상품을 불매하는 운동을 펼치면서도 우리말 속에 파고든 일본어를 아무런 의식 없이 마구 씁니다.

글만 그런 게 아닙니다. 말도 그렇습니다. 이제 정치인들이 쏟아내는 막말의 수준은 거의 임계점에 달했습니다.

지난주 한글날 정치권은 최근 일고 있는 막말에 대한 자성의 논평과 함께 품격 있는 정치를 다짐했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반말은 민의의 장에서 이제 일상화된 지 오랩니다. 최근엔 국회 상임위원장이 국정감사장에서 장애인을 비하하는 욕설을 다른 당 소속 의원에게 날리고, 다른 의원은 아예 “지X, 또XX 같은 XX”라며 원색적인 욕설을 내뱉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최근 영화 〈말모이〉를 봤습니다. 1940년대 일제강점기, 우리말의 사용을 금지한 일본에 맞서 우리말을 모아 사전을 편찬하려는 조선어학회 사람들의 눈물겨운 분투기를 담은 영화입니다. 거기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말과 글이라는 게 민족의 정신을 담는 그릇인데… 공동체 정신이 말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거거든요.”

사실 공동체까지 거론할 필요도 없습니다. 말과 글은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처럼 아름다운 우리말과 글이 이렇게 수난을 겪은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말과 글의 소중함을 기리기 위해 지정한 한글날의 취지를 무색케 합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조홍민 에디터 겸 편집장 dury129@kyunghyang.com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

인기 무료만화

©주간경향 (weekly.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향신문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주간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