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의 시화기행>시대에 맞서 '은유의 노래'로 끝없이 묻다

기자 2019. 9. 26. 11:2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특유의 운율을 타며 흘러간 밥 딜런의 노랫말들은 한 시대의 언어 아이콘이 됐다.(김병종, ‘밥 딜런, 시와 노래 사이’, 23.5×40㎝, 종이에 먹과 채색, 2019)

밥 딜런, 시와 음악 사이

당신은 진정

그 입술에서 불어오는

보랏빛 안개 같은 노래로,

그 중얼거림만으로

이빨을 드러낸

증오도, 검붉은

전쟁의 불길도

끌 수 있다고 믿었나요.

어둡고 긴 밤의 행진처럼, 우리 또한 먼 그대의

노래를 부르며

별 없는 밤을 터벅터벅

그렇게 걸었지요.

저녁의 교차로에서

어두운 광장에서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듯

우리는 그대의 노래를

불빛처럼 기다리며

마냥 서성거렸다오.

그러나 한 번도

갈기를 날리며

폭풍 속을 달리는 선지자의 말처럼

혹은 둥둥 울리는 북소리처럼

우, 우, 우

바람같이 내몰지는 못한 채

그대의 노래는

늘 물 위에 떠서

기우뚱거리며 떠가는 가랑잎처럼

그렇게

세월의 안개 저편으로 흘러갔지요

그래도 우리는 그대의 쉰 목소리

그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렇게 한 세월이 지나갔군요.

밥 딜런, 그러고 보면 우리는 그대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새벽 미명 동트는 시간에 꿈결같이

들려오는 한 소리 쪽으로

귀를 기울였을 뿐이었던 것 같아요

그만큼 누군가의 노래가,

목소리가 그리웠던

때문이었죠.

하지만 얼마나 다행인가요.

폐허를

걸어온 방랑자처럼

혹은 수도원의 별밤지기처럼

아직도 늙은 기타를 지팡이 삼아

흘러가는 시대의 석양을 바라보며

갈대처럼

서걱대며 웅얼거리는

그대의 소리를 가끔씩 들을 수 있음이

이제는 바람에 날리는 깃발이 아닌

마른빨래처럼 메마른 채

당신이 허공으로 날렸던 그 많은 말(言)들은

별의 나라들로 떠났더라도

노래는 남아

지금도 기억의 옛 창고 속에서

홀로 웅얼거리고 있겠지요.

③ 맨해튼과 밥 딜런

베트남전·히피 문화 겪으며

反戰·저항의 상징으로 꼽혀

50여년간 詩 1000여편 창작

거친 표현 공격성은 배제해

“美 민요 운율 詩로 살려냈다”

노벨상 위원회 ‘문학상’ 수여

“달에 서 있을 확률보다 작다”

노랫말 같은 수상소감 유명

2016년,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세상에나, 싶었다. 그가 노래하는 음유시인으로 한평생을 살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지만 가수는 가수였다.

일단 가수에게 노벨상이 주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생뚱맞고 당혹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한때 문청의 세월을 보냈던 나는 ‘노킹 온 헤븐스 도어’ 같은 몇 편의 노랫말을 다시 떠올리며 수험생처럼 그 속에서 시와 운율 그리고 문학성을 더듬어 찾아보려 애썼다. 왜 그랬을까 그에게서는 육친(肉親)적인 그 무엇이 있었던 까닭이다.

때로는 유대의 랍비처럼, 때로는 저항의 아이콘처럼 그는 내 곁의 시대를 스쳐 지나갔던 사람 중 하나였다. 베트남전과 히피 문화를 겪으며 세계를 휩쓸었던 반전과 저항의 물결에 늘 그의 노래가 자리하고 있었고, 조금은 다른 상황이었지만 그의 노래는 한반도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일테면 그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은 김민기의 ‘저 부는 바람’과 겹쳐지면서 밥 딜런이라는 이름은 우리 사회에서도 이방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의 노래는 줄곧 전쟁과 폐허, 죽음과 상실에 대해 물었고, 그 대답은 늘 ‘바람만이 아는 것(Blowin in the wind)’이라는 식으로 숨어드는 것이었지만 노래로, 그것도 문학성 짙은 은유의 노래로 질문을 던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선한 위안이었다.

실제로 대답 없는 질문이 노랫말로 회자되며 그처럼 강력하고 오래 살아남은 경우도 없을 것이다. 대체로 사회성이 강한 노래일수록 그 가사가 거칠거나 공격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고도의 문학성으로 포장된 데다가 일체의 정치적 수사를 거부한 채 흔적을 남기지 않은 바람처럼 불어왔다 가곤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매료시켰다. 그렇게 무대에서 사라지는 법 없이 반세기의 세월을 지켜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는 가수 아닌가. 일생을 어두운 골방에서 쓰고 또 쓰며 세월과 싸웠던 그 수많은 작가가 느꼈을 박탈감을 어쩌라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백과사전처럼 묵직한 책 한 권이 집으로 왔다. ‘밥 딜런(Bob Dylan), 시가 된 노래들’(문학동네)이라는 책. 악보가 없는 이 책에는 줄잡아 1000여 편은 됨 직한 그의 시들(무려 50년을 쓴)이 실려 있었다. 몇 편의 시를 뒤적이면서 우선 “전통적 미국 민요의 운율을 시로 살려냈다”는 노벨상위원회의 평가는 참 적절했다는 느낌이 왔다.

그의 시에는 초원을 달리는 카우보이의 외침이 있었고, 할렘의 복음성가 가락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아메리카의 물과 바람 소리가 섞여 있었다. 베개로 써도 좋을 만큼 두꺼운 그의 시집을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그가 가수이기 이전에 시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쩌면 시가 먼저고 노래는 다음이어서 드라마틱한 운율 변화가 없었을 터였다.

그런 까닭에 내게는 한결같이 그의 노래가 웅얼거림의 연속으로 들렸을 것이다. 늦은 밤 맨해튼 거리를 홀로 걸으며 빌딩 위에 떠 있는 흰 달을 본다. 문득 그의 시, ‘버려진 사랑’이 떠오른다. 내가 서 있는 이 지점쯤에서 그도 저 달을 보았던 걸까. “열쇠 돌리는 소리가 들리네, 난 내 안의 광대에게 기만당해 왔어… 맑고 커다란 달이 떠오르고 있어… 난 타는 듯한 그 달을 보며 마을로 돌아와.”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수호성인이 유령과 싸우고 있다’고 분열된 자아를 고백한다. 이 도시에서 그는 달을 보며 ‘누군가 아파트의 열쇠를 돌리는 외로운 소리’와 떠나간 사랑과 찢긴 자아를 동시에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시인 이상의 ‘아해’가 그러했듯, 자아를 환하게 비춰내는 그 달빛이 무서워 도망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밥 딜런은 신비주의의 끝판왕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늘 짙고 검은 선글라스 속에 자신을 숨기고 잠깐 나타났다가 오래 사라지곤 했다. 심지어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듣고도, 그날 선약이 있어 시상식장엔 나가기 곤란하다고 했을 정도. 하지만 막상 식장에선 자신이 노벨상을 받게 된 것은 달 위에 서 있을 확률보다도 작은 것이었다는 노랫말 같은 소감을 남겨놓고 총총히 사라져 갔다.

시대의 바람 속에서 그 흐름과 함께했던 가객 밥 딜런. 어쩌면 그는 아름다운 산과 달과 사랑 이야기가 아닌 본격적으로 일그러진 미국과 상처받은 뉴욕과 아픈 전쟁을 노래한 최초의 대도시 음유시인이었던 것 같다.

화가·서울대 명예교수

■ Bob Dylan

유대계지만 기독교 개종 뒤 음악적 변화

1941년 5월 24일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유대계로 태어났다. 본명은 로버트 앨런 지머먼(Robert Allen Zimmerman). 밥 딜런이라는 이름은 그가 좋아했다. 시인 딜런 토머스의 이름을 따서 개명한 것.

2016년 ‘미국 음악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낸’ 공로를 인정받아 한때 연인이었던 가수 존 바에즈와 함께 인권과 저항의 아이콘으로 떠올랐지만 이후 기독교로 개종하며 복음성가를 부르는 등 여러 차례의 음악적 변화를 거듭하게 된다. 가수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문화닷컴 바로가기|문화일보가 직접 편집한 뉴스 채널|모바일 웹]

[Copyrightⓒmunhwa.com '대한민국 오후를 여는 유일석간 문화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구독신청:02)3701-5555/모바일 웹:m.munhwa.com)]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