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24세 여성 단독 일시종주기 <8>] 길 잃고, 신발 젖고, 폰 고장 나, 빗속의 진퇴양난!

글 사진 성예진(블랙야크 셰르파) 2019. 9. 20.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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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내린 비로 결국 폰 고장 나 삼수령에서 태백시내로 내려와
댓재 출발 직전 모습. 댓재휴게소 아주머니께서 우산을 씌워주며 마중 나오셨다. 친할머니의 정이 느껴질만큼 고마웠다.
9월 11일 일시종주 18일차
댓재~황장산~큰재~자암재~지각산~덕항산~구부시령~푯대봉~건의령~피재(삼수령) 27㎞
새벽 4시 30분,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날씨를 살핀다고 창문을 열어두고 그만 깜빡 잠이 들었다. 눈 뜨니 거센 빗소리가 나를 반긴다. 맙소사! 비가 꽤 많이 쏟아진다. 하루 종일 비소식이 예정되어 있긴 했지만 어제와 마찬가지로 조금 흩날리다 말겠지 생각했다. 희망과는 달리 하늘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는듯 비를 쏟아내고 있다. 점점 굵어지는 빗소리에 마음이 착잡하다.
알람보다 일찍 눈을 뜬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어제 일찍 산행을 마치고 쉰 덕분에 컨디션이 좋아진 듯하다. 연이틀 비를 맞으며 산행을 했으니 나도 모르게 추위와 싸우느라 피곤했던 것 같다. 전기장판에서 몸을 푹 지졌더니 한결 개운해진 느낌이다.
몸은 컨디션을 되찾았는데, 날씨가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가 자욱한데다, 해 뜨기 전이라 컴컴하니 바로 산행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오늘도 운행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다가도 며칠 전에도 태풍으로 연달아 4일 쉬었으니 그럴 수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일시종주를 하는 와중에 비를 자꾸만 피해서 될 일은 아닌 것 같다.
정말 날씨가 관건이다. 이렇게 날씨가 도와주지 않아서야 운행이 잘 될리 만무하다. 진부령에서 절을 올린 정성이 부족했을까. 머지않은 시기에 기청제라도 지내야 할 판이다. 우천 준비는 충분히 준비되었으니 폭우가 쏟아지더라도 부딪혀보자! 천천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일전에 걸어본 코스였다면 어둡더라도 궂은 날씨에도 자신 있게 나섰겠지만 초행길이라 날이 밝기만을 기다린다.
습기를 말리느라 아무렇게 널브러뜨려 둔 옷가지와 짐을 정리한다. 짐을 패킹하면서도 정신은 하늘의 동태를 살피기 바쁘다. 잔뜩 곤두선 신경은 온통 밖의 빗소리에 집중하고 있다. 평소 믿는 종교도 없으면서 괜히 부처님, 하느님, 예수님 다 불러본다. 내 마음이 하늘에 닿기를 바라면서 날이 개이기를 간곡히 빈다.
서서히 해가 떠오르고 주위가 환해지기 시작한다. 아침 햇살로도 밝히기 버거운 것인지 안개로 뒤덮인 댓재는 여전히 어둡다. 비는 잦아들긴 했지만 그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부러 시간을 늦춰보려 느릿느릿 준비하며 기다려보아도 도무지 그칠 분위기가 아니다.
산행 시작 후에 비가 내리면 어쩔 수 없지만, 처음부터 비를 맞고 시작하려니 여간 서글픈 게 아니다. 나설 채비는 진즉에 끝내고도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모처럼 민박집에서 깨끗하게 씻고 뽀송뽀송한 옷으로 갈아입었는데, 시작부터 흠뻑 젖게 생겼다. 아! 정말 오늘따라 하늘이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이른 새벽부터 부스럭 부스럭 준비를 하니 주인아주머니께서 일어나 내가 준비하는 걸 한참 동안 바라보신다. 이 많은 물건이 그 배낭에 다 들어가냐며 신기하게 쳐다본다. 궂은 날씨에 마음이 뒤숭숭했는데 아침부터 말동무가 있어 좋기만 하다. 젊은 친구가 사서 고생이라며 안쓰러워한다.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조금 있다가 출발하라며 걱정한다. 꼭 친할머니 같이 걱정해주셨다.
출발 채비를 끝내고 문을 나서자 뒤따라 나오시며 우산을 씌워주신다. 댓재에서 황장산 방향을 잘 안다며 안내를 자청한다. 여기서 가까우니 입구까지라도 데려다주겠다며 큰 우산으로 나를 감싸 안으신다. 고어텍스 재킷과 오버트라우져를 입기도 했고, 출발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흠뻑 젖을거라 사실 우산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아주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고맙던지! 홀로 짙은 안갯속을 뚫고 출발하기가 서글펐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멀뚱히 서있었는데 안내해주신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덕분에 댓재에서 사진을 남기고 산행을 시작한다. 따뜻한 저녁과 잠자리, 그리고 마중에 대한 감사를 전하고 대간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들머리가 풀숲 사이로 보일듯 말듯 올랐을 때 뒤를 돌아보니 아직 아주머니가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마지막으로 큰 소리로 인사를 전하고 댓재와 멀어져 간다.
황장산을 오르는데 산길은 이미 물길로 바뀐지 오래다. 물웅덩이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걸음을 옮긴다. 다리를 양껏 벌려 풀숲의 갓길로 지그재그 스텝을 밟으며 한 걸음씩 더디게 움직인다. 질퍽한 진흙을 피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걸음을 옮기느라 한참을 둘러 오르기도 한다.
종일 내린 비와 진흙에 등산화는 안과 밖이 완전히 젖었다.
한참을 잘 피해가나 싶었는데 발을 잘못 딛는 바람에 숨겨진 물길 속으로 발이 푹 빠져버렸다. 으악! 내 발에 직접적으로 흙이 닿는 것도 아닌데 뻘에 빠질 때의 느낌은 영 달갑지 않다. 한 번의 실수로 등산화는 온통 진흙칠갑을 하고 있다.
다시 속도가 빨라진다. 이미 빠져버렸다는 생각에 물길과 진흙뻘을 피해가지 않고 그대로 밟으며 마구잡이로 간다. 마치 빗속의 주인이 된 마냥 성큼성큼 걸음을 이어간다. 황장산까지는 600m로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 금세 도착했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어 사진만 찍고 곧바로 큰재로 향한다.
비가 와서 쉬고 싶어도 마음 편히 쉬기가 어렵다. 앉아서 쉬기엔 날씨가 쌀쌀하기도 하고 스산한 날씨에 마냥 쉬고 있으면 빗소리에 마음이 더 착잡해진다. 대간에 젖어 들면 빗속에서도 춤을 춘다던데, 나는 아직 멀었나보다. 이 속도라면 오늘 남은 길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다. 비 덕분에 오늘은 빨리 끝낼 수도 있겠다 기대를 해본다.
몇 걸음 옮기지 않아 건의령 19㎞ 표지목이 보인다. 이제 시작인데 19㎞씩이나 남았다는 안내를 보니 힘이 빠지는 기분이다. 심지어 목적지는 건의령에서 7㎞ 가량 더 떨어진 삼수령이다. 비는 이런 내 속도 모르고 계속해서 쏟아지고 앞으로 남은 길은 천리길처럼 느껴진다.
발이 자꾸만 미끄러진다. 신발 밑창에 진흙이며 나뭇잎들이 엉겨 붙었다. 몇 번이고 털어내고 나뭇가지로 긁어도 봤지만 금세 진흙투성이가 되기 일쑤다. 그렇지 않아도 물을 머금어 미끄러운 지면인데, 아무리 좋은 신발이라도 지금의 상태로 버텨줄리 없다. 스틱에 의지해 사족보행하는 느낌으로 천천히, 안전하게 내려온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 잘못 미끄러지기라도 하는 날엔 큰일 나겠다 싶어 조심조심하며 내려간다.
큰재를 지나자 정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짙어진다. 풍력발전 시설에 다다랐을 땐 이미 길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바람이 불어주니 저 멀리 희미하게 포크레인과 풍력발전기 날개가 보인다. 기둥은 온데간데없고 날개만 덩그러니 하늘에 둥둥 떠다닌다.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하는 모습이 꼭 사막 한 가운데서 신기루를 보는 것 같다.
그런 날씨 속에서 길 또한 애매한 곳이라 난감하기 짝이 없다.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직감과 트랭글 뿐이다. 주변의 길이 조금이라도 확인이 된다면 수월할 텐데, 하늘은 나를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하필이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 이런 길이 걸릴게 뭐람! 길 찾기 애매한 곳, 날이 좋아도 알바하기 딱 좋은 그런 곳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심호흡 한 번 크게 내쉬고 침착하게 앞선 이들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여기서 당황하며 허둥지둥 해버리면 더 힘들어질 것 같아 흔들리는 마음속에서 차분한 마음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온통 내 키만큼 자란 풀숲을 헤치며 희미하게 남아있는 흔적을 따라 걸어간다. 분명 직전까지는 누군가 풀숲을 헤치고 지나간 길이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는데 갑자기 길이 끊기거나 당최 어디로 갔을지 모를 길이 반복된다. 그러는 사이에 완전히 길을 잃어버렸다. 트랭글 지도를 보면 지도에 난 산길과 그리 다르지 않게 온 것 같은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이 지났을 법한 길이 보이지 않는다.
잡목과 길게 자란 풀로 빽빽이 둘러싸인 숲. 오죽하면 거미조차 어디로 도망갔는지 찾아볼 수 없다. 비는 속절없이 쏟아지고 풀숲 한가운데 꼼짝없이 갇혀 버린 것이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조금만 움직여도 소나무처럼 뾰족하고 따가운 잎을 지닌 나무가 나를 무섭게 찔러댄다.
끼니도 거른 채 걷다가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빗물 젖은 식량을 먹었다.
다시 내려가려니 올라온 길 또한 엄두가 나지 않고 잠시 멍하니 서있었다. 지난 운계봉에서의 개척산행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그땐 날이라도 좋았는데, 이젠 비까지 쏟아진다. ‘산 넘어 산’ 이라더니 정말 이럴 때 쓰는 표현인가보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
길을 잘못 든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 길이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닌 것은 자명한 사실임이 분명하다. 비가 계속 내리기에 비를 맞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고민을 오래 할 수 없다. 지금 딛고 있는 산 능성이만 넘으면 금방 등산로와 만날 것 같은 느낌에 나의 감을 좀 더 믿는 것으로 하고 계속해서 진행을 한다. 기왕 고생해서 올라온 거 조금만 더 개척산행을 해보자! 우거진 잡목을 헤치며 산을 넘는다. 정말이지 ‘정글 숲을 지나서가자. 엉금엉금 기어서가자’ 노랫말이 떠오르는 상황이다.
개척산행을 하는 사이 겉옷이 흠뻑 젖는 것은 물론이고 등산화에 물이 차기 시작한다. 아뿔싸! 다른 건 몰라도 등산화만큼은 안 되는데, 어찌 대처할 틈도 없이 한 번 젖기 시작한 등산화는 빠르게 물이 차버린다. 통 누벅 가죽으로 된 고어텍스 중등산화라 젖지 않을 줄로만 알았더니 떨어지는 물의 양이 많아도 너무 많았나보다.
오버트라우져를 입었으니 발목으로 들어갔을리 만무하고, 아마 신발끈을 타고 새어들어간 것 같다. 사실 젖는다 해도 그리 놀랍지 않을 만큼 많은 양의 물이 떨어졌기에 신발이 좋지 않아 그렇게 되었다는 원망은 들지 않는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비지만 풀숲을 헤치고 다니며 맺혀있던 물방울이 떨어지는 양이 훨씬 많았다.
개척산행, 전투산행만 아니었어도 등산화가 젖는 불상사는 없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든다. 궂은 날씨에 코스마저 쉽지 않은 구간이다. 이미 젖어버린 신발은 어쩔 도리가 없고 걸을 때마다 물이 출렁출렁 거리는 신을 신고 길을 찾기 바쁘다.
한참을 잡목 숲에서 헤매다 겨우 큰재 방향을 가르키는 이정표를 찾았다. 등산로를 찾은 것이다. 제대로 찾아왔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정표가 있는 산길 역시 풀이 심하게 우거져 사람이 지나다니기 힘든 길이라는 것. 어쩌면 내가 헤치고 지나온 길이, 길이 맞을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풀이 무성히도 우거졌다. 계절의 시기가 그런 것인지 유난히 많이 자란 풀이 산길을 파고든다.
대간을 다니는 산객이 명산을 다니는 수만큼 많진 않지만 아주 적지도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이런 길이 대간의 산길이라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사람이 지나다니면 길이 날 법도 한데, 자연 그대로의 날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옛날에 백두대간 종주를 하셨던 분들 내지 산을 좀 탔다 하시는 분들은 흔히 “요즘 대간길이 비단길보다 더 좋다” 이야기 하시는데, 그렇지 않은 길도 많다는 걸 보여주는 길이다. 2000년대 초반 대간을 하시던 분들은 이런 길을 다닌걸까? 대간길의 변천사가 궁금해지는 걸음이었다.
이미 한 번의 전투산행을 겪어서인지 이후 걸음은 편하기만 하다. 이미 젖었기에 계속해서 비가 내려도 걱정 없고, 여러 차례 반복되는 개척산행으로 이제 웬만한 길에도 자신이 생겼다. 겉옷의 안팎을 구분 할 것 없이 모두 젖어버린 뒤라 분명 쉬게 되면 엄청 추울 것이다. 편히 쉴 수 없는 상황에 묵묵히 걸음만 옮긴다.
자암재에 도착해서야 배가 고파 먹지 않고선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아 전투식량 하나를 뜯었다. 전투식량을 뜯어 막 한 숟갈 입으로 가져가는데 잠시 소강상태였던 비가 다시 쏟아진다. 하늘에 무슨 죄를 지은 건지 당최 하루 종일 날씨가 도와주질 않는다. 거기다 한 번씩 바람까지 그 기세를 더하니 나무가 머금고 있단 물마저 우두두 떨어진다. 그 비를 모두 가리기엔 역부족이라 식량도 물에 젖는다. 식량을 무릎에 두고 허리를 숙여 재킷 틈바구니에 가린다고 가리는데도 물이 들어가는 통에 한껏 움츠린 채로 급하게 끼니를 때운다. 다 먹어갈 때쯤 몸에 한기가 들기 시작한다. 춥기까지 하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서둘러 남은 것들을 입안에 욱여넣기 시작했다.
전투식량은 차갑고, 뻑뻑해서 잘 안 넘어가지는데 배는 고프고 날은 춥고 정말 생존을 위해 먹을 수밖에 없었다. 잔뜩 웅크린 채로 급하게 남은 것들을 입속으로 밀어 넣으며 내 모습을 바라보니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싶기도 했지만 그런 투정을 부릴 여유조차 없었다. 지금은 배를 채우고 이 숲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이다. 이런 감상도 살아서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갈 때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중간 탈출로가 애매한 구간이라 어떻게 서든 건의령을 지나 삼수령까지 진행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투정은 사치일 뿐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숲이 거대하게 느껴지는 것은 내 기분 탓일까. 한낮임에도 짙은 어둠이 내리 앉은 숲은 한없이 크게만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길인데, 길 한가운데 쓰러진 나무들은 그 느낌을 배가 시킨다. 걸음이 자꾸만 빨라진다. 몸은 따라주지 않고 마음만 급하니 자꾸만 나무뿌리,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질 것 같다.
자암재에서 환선봉을 지나 덕항산까지 쉼 없이 달린다. 덕항산에서 삼수령까지는 이미 한 번 가본 길이기도 하고, 그 중에서도 덕항산에서 구부시령 구간은 명산100 인증 산행으로 많이 찾았기에 익숙하다. 덕항산까지만 가면 나머지 길은 이미 잘 알고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볍다. 약간의 긴장감 덕에 예상보다 빨리 덕항산에 도착했다. 빗속에서 잠시 인증의 기쁨을 누린다. 100좌 패치로 ‘명산100 어게인’ 인증 사진만 얼른 남기고 서둘러 길을 지난다.
덕항산 정상에서 ‘명산100 어게인’ 인증 사진을 찍었다.
덕항산 바로 아래 구부시령은 이전에 인증을 받았으니 이정표 사진만 찍은 채로 지나친다. 구부시령에서 내려와 10분쯤 걸었을까? 휴대폰이 꺼져버렸다. 500m를 지날 때마다 트랭글에서 진행 거리와 평균 속도, 그리고 시간을 알려주는데 500m는 벌써 지나고도 남았을 시간에도 묵묵부답이라 살펴봤더니 전원이 꺼져있었다.
급히 배낭을 내려두고 보조배터리와 케이블을 찾아 휴대폰에 인공호흡을 해본다. 전원이 켜지는 것까지 확인하고 혹여 물이 들어갈까 가방 깊숙이 넣고 다시 내달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한참을 가도 그 사이 두세 번은 족히 울리고도 남았을 트랭글 소리가 잠잠하기만 하다. 다시 배낭을 내려두고 보조배터리와 휴대폰을 연결하고 전원이 켜지길 기다리는데, 이젠 전원이 아예 켜지지 않는다.
큰 일 났다! 모든 기록을 휴대폰으로 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내가 이동한 족적도, 사진도, 일기를 쓰기 위한 메모까지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전부 휴대폰의 힘을 빌리고 있는데 이 녀석이 켜지지 않으면 큰일이다.
이유를 찬찬히 고민해본다. 보조배터리는 빵빵하게 충전되어 있고, 연결 케이블에 충전중임을 알리는 불빛 또한 잘 들어온다. 그렇다면 휴대폰의 문제라는 건데 설마 물이 들어간 걸까 불길한 느낌이 전신을 휘감는다.
휴대폰 연결 부위를 입으로 후후 불어보기도 하고, 혹여 케이블에 묻은 물기가 문제가 될까 싶어 배낭 안의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연결해보기도 한다. 한참을 휴대폰과 씨름하며 속이 타들어간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는 더욱 거세진다. 여기서 더 휴대폰에 물이 들어가면 큰일이니 새우처럼 몸을 잔뜩 웅크린 채 품 안에서 휴대폰을 켜기 위해 노력한다.
아무리 연결해보아도 충전은커녕 케이블의 연결 부위에 시커멓게 탄 자국만 늘어간다. 기계에 무지한 내가 보아도 이쯤 되면 휴대폰에 물이 스며든 것이 확실해 보인다. 어디선가 요즘 휴대폰은 물이 들어가면 전류가 차단된다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물기가 있어 당연히 충전이 되지 않을테다.
난감하다. 이제 막 구부시령을 지났을 뿐인데, 오늘 목적지의 반에서 조금 더 지났을 뿐인데 꺼져버린 휴대폰이 야속하다. 애꿎은 휴대폰에게 왜 꺼져버렸냐며 원망의 눈초리를 보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출발할 때 조금이라도 더 충전된 상태에서 시작할 걸, 걸어오며 사진을 좀 덜 찍을 걸 별 게 다 후회가 된다.
비가 계속해서 내리는 상황이라 편히 휴대폰을 만질 수도 없고, 도리어 물이 더 들어가는 것 같다. 지금 계속해서 휴대폰을 꺼내두는 게 좋은 영향을 주진 않을 것 같다 생각이 드는 환경이다. 휴대폰과 전자기기를 젖지 않을 만한 곳에 안전하게 넣어둔다. 급한 대로 수건으로 휴대폰을 꽁꽁 감싸고 안으로 들어간 물이 빠지길 바라며 세로로 세워 가방 깊숙한 곳에 넣어뒀다.
조금 더 걸어가다 비가 멎어들면 다시 한 번 전원을 켜볼 생각으로 빗속을 뚫고 지나간다. 그나마 구부시령에서 건의령, 삼수령까지 이미 한 번 산행을 해본 곳이라 다행이다. 한 번 다녀온 길이라고 아무렴 초행길보다 마음이 편안하다.
푯대봉으로 향하는 마음이 뒤숭숭하다. 걷고 있지만 휴대폰이 꺼졌다는 사실에 마음이 심란하기만 하다. 비를 맞으며 걷고 있는데, 그 어느 때보다 힘든 환경에서 운행 중이지만 지금 걷는 걸음은 기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힘이 나질 않는다. 기록을 위해 걷는 것은 아니지만 여태껏 빠진 구간 없이 기록을 남기며 잘 걸어왔으니 우천으로 기록되지 않는 상황이 아쉽기만 하다. 휴대폰이 꺼졌으니 GPS기록은 물론이고, 트랭글 뱃지도, 기사에 사용할 사진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답답하다.
그나마 구부시령을 지나면 건의령까지 중간 탈출로가 없어 설령 기록이 꺼졌다 하더라도 건의령까지 갔다는 것은 어느 정도 보증이 된다는 것이 다행이다. 건의령 또한 차로도 임도길을 한참 올라야 하는 곳이라 삼수령까지 진행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굳이 임도를 내려가 도로로 가는 선택을 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테니까. 기록은 하지 못했지만 쉽게 등로를 빠져나갈 수 있는 구간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다. 악천후 속에 고군분투 하면서도 기록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푯대봉에 올라 다시금 휴대폰을 켜보려 노력하지만 물이 스며든 휴대폰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가방에서 꺼내고 비가 내리는데 계속 만져서인지 되레 물기가 더 많이 들어가 버린 느낌이다. 이제는 충전이 될 때 반짝이는 충전 케이블의 불빛도 잠시 들어오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꺼져버린다. 애꿎은 보조배터리의 충전 버튼만 신경질적으로 누르고 있다.
연결했다가 충전 버튼을 눌러보기도 하고, 잠시 기다렸다가 물기를 닦아 다시 연결해본다. 수건은 이미 젖은지 오래다. 케이블이 새까맣게 변한 걸 보고서도 포기가 되지 않는다. 휴대폰만큼은 포기하지 못하겠다.내 얼굴은 울상으로 바뀐지 오래다. 곧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심정이다.
어쩌면 무서웠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분명 1~2시일 텐데 내가 딛고 있는 푯대봉은 온통 안개로 뒤덮여 컴컴하기만 하다. 곧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올 것 같은 하늘이다. 흐린 날씨에 무서운 생각을 하기 시작하니 으스스한 기분이 전신을 감싼다. 숲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은 그런 기분.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산에 홀로 있다는 생각에 여태껏 씩씩하게 잘 걸어왔음에도 한 걸음 떼기가 두렵다. 휴대폰이 꺼져버렸느니 연락도 안될 테고, 시간을 알 수 없어 불안하다. 평소 걸음이라면 앞으로 남은 거리에 대비해서 일몰까지 그리 여유 있는 시간이 아니다.
구부시령. 안개가 자욱하고 젖은 수풀이 높아 고역이었다.
풍력발전단지를 지나며 흔들렸던 멘탈이 다시금 와르르 무너져내린다. 정말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한 하루다. 이렇게 되어버리니 다음부터는 우천 시에는 운행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다.
건의령과 삼수령까지는 10㎞ 정도 남은 것 같다. 길을 지나며 보이는 이정표가 그리 알려주고 있다. 평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보았던 이정표와 시그널이 어찌나 반갑던지. 휴대폰이 먹통이 되어버리고, 안개가 짙게 내려앉으니 오롯이 산에만 집중하게 된다. 사람이 지난 자그마한 흔적에도 반가움이 앞서고, 이정표를 만나면 무슨 산삼을 발견한 것 마냥 마음이 들뜬다. 한치 앞을 가리기 힘든 날씨 속에서 탈출을 꿈꾸며 꿋꿋하게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중간 탈출로가 있었다면 후퇴를 결정했을지 모르겠다. 어쩜 이 구간은 그 흔한 마을로 내려가는 탈출로 하나 없는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길을 걸어간다. 씩씩하게 걸어가려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이따금씩 풀숲에서 스륵스륵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때면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다. 또 가끔 “꾸에엥” 멧돼지 울음소리가 들릴 때면 정말 주저앉고 싶을 만큼 무서워진다. 오금이 저려온다 표현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인가보다.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남은 길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는지. 나중에 실제 걸은 시간과 비교해보니 짧은 편임에도 곱절은 더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건의령으로 향하는 길에 멧돼지 가족을 만났다. 얼추 열 마리가 넘는 대가족이었다. 안개가 짙은데다 비까지 오니 사람이 다가오는 걸 몰랐나보다. 나도 가까이 다가가서야 멧돼지라는 걸 알았고, 그 녀석들도 안개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깜짝 놀라 괴성을 지르며 도망갔다.
덩치로 보나 우렁찬 울음소리로 보나 무리의 대장쯤으로 보이는 녀석의 인도 하에 어린 새끼들까지 우르르 다른 곳으로 도망간다. 10마리는 족히 넘었던 것 같다. 정말 다행히도 지난번 설악산 오세암에서 만난 녀석들처럼 사람을 보고도 눈도 꿈쩍 않는 그런 녀석들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다.
안개 속에서 길도 잘못 들었다. 안개 덕에 날이 좋았다면 하지 않았을 알바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르겠다. 태풍이 몰고 온 바람 탓인지 이정표가 다소 애매한 방향으로 돌아가 있다. 사람이 밟은 길이 두 갈래였고 그 사이로 이정표의 화살표 방향이 향하고 있었다. 감각에 의지해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다. 감이 떨어진 건지 처음엔 곧잘 찾곤 했는데 번엔 꽝이다. 다시 돌아와 남은 길로 걸어가니 시그널이 반겨주는 대간길로 들어갈 수 있었다.
길을 찾으니 그제야 이곳을 걸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기억 속 그날도 같은 곳에서 헤매었던 기억이다. 그날은 맑고 좋았는데도 길을 잃었던 걸 보면 상습 알바 구간인가보다. 건의령 초입에 거의 다 내려와서 ‘280랠리’ 안내판을 발견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랠리가 반갑기만 하다. 올해 280랠리를 이곳에서 했나보다. 280랠리는 자전거계의 마라톤이라 생각하면 된다. 앞의 숫자 280은 280㎞의 거리를 달린다는 이야기이다.
건의령에 내려와 삼수령으로 향한다. 건의령 옆의 임도를 두고 삼수령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이렇게 날씨가 궂은데 삼수령까지 갈 수 있을까. 내려 갈수도 없는 상황이다. 힘에 부치지만 삼수령까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걸음을 옮긴다.
삼수령에서 매봉까지 7㎞ 구간은 유난히 길이 예뻐 보인다. 산림청에서 식생복원을 위해 애쓴 곳이라 한다. 걸으며 둘러보니 정말 생태가 잘 보전되어 있는 곳이었다. 다만, 오르내림이 심해 체력 소모가 적잖은 곳이었다. 마지막 3㎞를 남겨두고는 거리가 어찌나 줄어들지 않는지 고생을 많이 했다. 있는 힘껏 달리면서도 알 수 없는 시간에 마음이 앞서 그리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삼수령 비석으로 옆길로 내려와 깔끔한 정자를 지난다. 정자에 빨간색 2인용 텐트가 설치되어 있다. 오늘 밤은 이곳에서 보내려 했는데, 먼저 자리를 잡은 이가 있었다. 여자라면 상관 없겠지만 혹시 남자라면 신경이 쓰일 테다. ‘이걸 어쩐다’ 일단 배부터 채우고 생각하자 싶어 삼수령 휴게소를 찾아 내려온다.
태백시내의 모텔에서 보니 발에 다시 물집이 잡혀 있었다. 젖은 발로 오래 걸었으니 그럴만 했다.
삼수령비를 보자 긴장이 풀려버려 한 발을 내딛기에도 버겁다. 휴대폰이 꺼진 채로 운행을 하느라 진이 다 빠져버렸기에 겨우 내려와 휴게소 문을 두드린다. 발이 젖은 채로 반나절 이상 운행을 해버렸더니 얼얼한 발은 그 느낌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휴게소에 들어가 시간 먼저 살피니 딱 5시였다. 다행히도 빨라진 걸음에 예상한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한 것 같다. 라면과 콜라 한 캔을 주문하고 기다리며 휴대폰을 살릴 궁리를 한다. 젖은 휴대폰을 말리기 위해 드라이기를 빌렸다. 선풍기를 먼저 물어봤는데, 삼수령이 원래 선선하기도 하고 날이 쌀쌀해진 탓에 선풍기는 없다고 드라이기를 주셨다. 친절한 주인 내외 덕에 휴대폰을 말릴 수 있었다. 라면을 먹으며 드라이기를 켜고 휴대폰을 말린다. ‘휴대폰이 켜지지 않으면 어쩐담’ 걱정에 라면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 그간 찍은 사진과 기록을 따로 백업해두지 않았기에 이대로 휴대폰이 영영 켜지지 않는다면 끔찍한 상황이 펼쳐진다. 상상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진다.
밥을 먹으며 한참을 말려보지만 휴대폰은 도무지 켜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정말 이대로 켜지지 않으면 큰일인데. 드라이기로 아무리 말려보아도 켜지지 않는 휴대폰이 야속하기만 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빗물이 더 많이 들어갔나 보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급히 시내로 내려가는 차편을 알아본다. 휴게소 사장님께서 곧 태백으로 내려가는 버스가 올거라 이야기하셨고 곧장 짐을 챙겨 버스를 타고 태백 시내로 내려간다. 정자의 분위기가 참 좋아보였는데, 삼수령에서 야영을 하려했는데, 아쉽기만 하다.
아참, 삼수령 정자에 있던 텐트는 무려 열흘씩이나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무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남자 한 명이 그곳에 칩거하고 있다고 사장님이 이야기 하셨다. 그 분은 무얼 하기에 거기 계셨는지 궁금해진다.
지금은 다른 무엇보다 휴대폰을 살리는 게 먼저다. 삼수령에서 내려와야 해서 아쉽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터미널로 향하는 완행버스를 타고 10분 만에 태백에 도착했다. 삼수령이 태백에서 가까우니 얼마나 다행인지. 휴대폰이 젖은 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나마 시내와 가까운 삼수령에서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하루 밤을 보낼 여관부터 잡았다. 3만 5천원의 숙박비를 이야기를 잘 해서 3만원에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온돌방으로 부탁하고 들어가자마자 드라이기로 휴대폰을 말리며 젖은 침낭과 텐트, 옷가지부터 널었다. 씻고 나와 휴대폰부터 살핀다. 휴게소에서 아무리 말려도 작동하지 않던 휴대폰이 처음엔 버벅 거리더니 정상적으로 작동하는듯 보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정자에서 야영할 걸’ 아쉬움이 밀려온다.
하지만 이미 태백 시내로 내려와 버렸고, 휴대폰이 작동하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끝내 휴대폰이 켜지지 않았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졌을지 생각만 해도 고개가 저어진다. 궂은 날씨를 겪어내고도 잘 견뎌준 휴대폰에게 감사한다.
부족한 우천 대비를 메우기 위해 다이소에 들려 방수팩과 폰 충전 케이블을 하나 더 구입한다. 혹시 나중에라도 케이블 수명이 다하면 큰일이기에 여유분을 챙긴다. 다이소까지 가며 반짝이는 태백 시내를 구경한다. 지나는 길에 치킨집에 들려 한 마리 포장해서 방에서 먹었다. 아마 휴대폰이 젖지 않았다면 누리지 못했을 호사였다. 댓재 휴게소에 이어 태백 시내에서 쉬어간다. 뜨끈한 온돌방에서 1인 1닭 치킨 한 마리 비우고 나니 눈꺼풀이 무겁다. 배도 든든히 채웠겠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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