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우월한 생(優生)은 없다 / 신영전

2019. 9. 18.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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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전
한양대 의대 교수

“이 단종을 실행하는 목적은 국민으로부터 열등 분자를 없애자는 데 있습니다. 유전성의 악질을 가진 사람들은 단종시킴으로써 민족의 피를 깨끗이 하자는 것이 단종의 목적인데, 국민 체위 향상을 위하여 또는 국민보건을 위하여서는 절대로 필요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 중 한 대목을 생각나게 하는 이 발언을 한 사람은 이갑수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독일 유학을 한 의사였고, 조선우생협회를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해방 후 초대 보건부 차관을 지냈다. 차관 당시 한센병에 대한 그의 우생학적 관점은 비인권적인 단종, 강제격리와 입양 등 비극으로 이어졌다. 수백만명을 인종청소라는 미명 아래 살해한 나치 정권과 규모 면에서 비교가 안 되지만, 그 논리는 찍어 놓은 듯 똑같다. 더욱 문제는 이러한 우생론이 ‘일베’ 게시판에서만이 아니라 ‘건강은 국력’이라는 모 대학 교정의 기념비에서도 발견되며, 국가 예산 수조원을 투입하겠다는 ‘좋은’ 유전자 프로젝트에서도 확인된다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우생세’(優生世)를 살아가고 있다.

최근 무리한 학생 경력 양산체계가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다. 이 역시 따지고 보면 학생을 우열로 나누고 많은 스펙과 높은 점수를 획득한 소위 ‘우등생’이 세상 특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승자독식’ 사회가 만들어낸 블랙 코미디다. 자기 자녀의 우열을 가리지 않듯, 모든 학생은 ‘우열’이 아니라 ‘다름’으로 대해야 한다. 그 다름이 차별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교육의 기본 원칙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 원칙을 버린 지 오래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도 사라졌다.

많은 이들이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를 그 범인으로 지목하지만 거기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 바로 우생론이다. 더 우수한 유전자, 인간, 계층이 존재한다는 믿음 말이다. 우생론은 과학이란 가면을 썼기에 더 무섭다. 거기에 이윤, 인종, 애국, 국가 미래먹거리, 성장동력이란 단어까지 결합하면 실로 무소불위의 괴물이 된다. 이 괴물은 ‘완벽함’ ‘무병장수’에 대한 강박을 퍼뜨리고, 영리 자본은 달콤한 말로 영혼을 잠식한다.

그러면 무엇을 할 것인가? 궁극적으로는 모든 차별을 없애고, 특별히 직종과 직위 간 소득 격차를 파격적으로 줄여나가야 한다. 대학도 점수가 아니라 적성과 희망에 따라 갈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이 있다. 우리 안의 우생론을 없애는 일이다. 먼저 우리말 속의 우열이란 단어들을 찾아내어 없애 나가기를 제안한다. ‘우등생’ ‘우열반’ ‘우등열차’ ‘우량품종’ ‘우량주’ ‘좋은/나쁜 유전자’ 등의 단어를 사용하지 말자.

특별히 과학용어 중에는 일본도 이미 포기한 우생 관련 단어가 많다. 일본은 1996년 ‘국민우생법’을 ‘모체보건법’으로 개정하면서 법 조항에서 ‘우생’이란 단어를 모두 없앴다. 그러나 이를 모방해 만든 우리나라 ‘모자보건법’ 제14조에는 아직까지 ‘우생’이란 단어가 인공임신중절을 허용하는 근거로 살아 있다. 2017년 일본 유전학회는 우성과 열성이라는 용어를 폐기하고 대신 현성(顯性)과 잠성(潛性)이라고 쓰기로 했다. ‘우열의 법칙’도 ‘유전의 법칙’이라 쓴다. ‘우성 대뇌반구’ ‘우성 수용체’ 등 의·과학계의 단어는 고칠 것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우리 학계의 변화는 너무 더디다.

존재에 우열은 없다. ‘만유의 영장’이라는 신화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생존조차도 지극히 우연의 산물일 뿐 다른 종보다 우월해서가 결코 아니다. 생존 능력으로 친다면, 바퀴벌레는 3억5천만년을 지구에서 살아남았고, 1.5㎜의 벼룩 같은 물곰(곰벌레)은 방사선은 물론 영하 273도의 극저온이나 영상 151도의 고온에도 끄떡없이 견딘다. 인간 지능도 인공지능에 뒤처진 지 오래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불완전하게 태어난다. 생물학자 렌츠의 말대로, 우리 몸에는 딱히 할 일 없이 존재하는 뼈들이 수없이 많고, 망막은 거꾸로 달려 있으며, 우리 유전체의 내용물 대부분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혹시 미래 지구에 완전한 존재가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닐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우생론은 궁극적으로 인간 스스로를 부정하는 자기파멸적 논리체계다. 그렇기에 인간의 취약성, 개방성, 유한성 같은 개인적, 집합적 신체의 구성적 특징을 ‘퇴치해야 할 위험’이 아니라 ‘공동체의 근본 토대’로 간주해야 한다는 에스포지토의 주장은 멸종을 향해 가는 우생세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의 구호다. 우월한 생(優生)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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