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강단 '행태주의' 지배..평화병 지적 처방 못찾아 절망했다"
"평화 찾아온 미국에서 또다시 전쟁"
냉전시대 소련 '철의 장막'에 공포감
1953년 데이비드 이스턴 '정치체제론'
'자연과학의 투입-산출 모형 차용'
'소련의 행태' 예측 시도했으나 실패
과학철학 명문 미네소타대학원에서
'행태주의의 문제' 규명하고자 씨름
조지아대학 교수로 '비판 강의' 개설
기계적·산술적·가치중립적 '중시'
행복·정의·평화·이상 등 '도외시'
"군비강화로 승리한다는 맹신 낳아"
베트남전·이라크전..패배 필연적
1965년 미국 땅에 도착하자마자 서울에서 품었던 나의 꿈은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았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미국이란 나라에서는 나의 ‘평화병’을 치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한순간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 국공내전과 한국전쟁을 체험하면서 중독된 평화병을 미국에서 치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미국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 정신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나라가 아닌가?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 세워진 나라라면 지구상에서 평화를 가장 애호하는 나라가 아니겠는가? 그런 기대를 가지고서 미국 땅을 밟았지만 미국은 평화 대신 베트남 전쟁을 들이밀었다. 미군은 그해 2월 북베트남 폭격을 시작으로 본격 개입을 하고 있었다. 또 전쟁이란 말인가? 도대체 왜 나의 인생에서는 가는 곳마다 전쟁을 만나야 한단 말인가?
또 다른 이유는 나를 더욱 절망하게 만들었다. 그즈음 미국 정치학계에서는 이른바 ‘행태주의’(behavioralism)의 붐이 막 일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나 역시 행태주의에 대해서 많은 호기심과 기대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메리칸대학 강의실에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서울대에서 느낀 실망감보다 더 극심한 실망감을 반복적으로 느꼈다. 행태주의를 통해서는 내가 염원하는 ‘평화병의 지적 처방’을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행태주의는 오히려 나의 학문적 관심을 압살했다. 미국에 와서 또다시 ‘학문적 고아’가 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나의 미국 유학 생활은 평화를 해명하지 못하는 행태주의의 문제점을 학문적으로 해명하는 난제와 씨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행태주의는 냉전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핵무기를 보유한 미국과 소련 양국의 이념 대결로 시작된 냉전은 전세계를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으로 양분하면서 인류의 공멸을 야기할 정도의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그런데 미국은 ‘철의 제국’ 소련의 행태를 예측할 수 없었고, 그처럼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소련에 대한 공포감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러자 사회과학자들이 나섰다. 그들은 과학적 방법을 활용해서 소련의 행태를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측’까지 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또 소련의 행태에 대한 불확실성을 감소시킴으로써 소련이 야기하는 공포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행태주의 혁명을 선도한 데이비드 이스턴은 1953년에 <정치체제론>(The Political System)을 출간했다. 이스턴은 자연과학의 ‘투입-산출 모형’을 차용해서 정치체제의 행태를 예측하고자 했다. 냉전 시기 소련의 정치체제 내부는 직접 관찰할 수 없기 때문에 ‘블랙박스’로 간주하고, 블랙박스의 투입과 산출을 관찰하면 소련의 정치체제 내부의 역학을 추론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행태주의의 거장으로 평가되는 가브리엘 알몬드는 한걸음 더 나갔다. 그는 구조기능주의 시각에서 블랙박스를 해부했다. 자연과학적 객관성을 신봉한 그는 모든 정치체제 역시 몇 가지 보편적 기능을 수행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즉 모든 정치체제는 정치사회화, 이익 표출, 정치커뮤니케이션 등과 같은 투입이 이뤄지면 정치체제 내부의 역량 기능, 전환 기능, 유지 및 적응 기능 등을 통해서 입법·행정·사법 등과 유사한 결과를 산출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각국이 처한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특수성에 따라 투입에서 산출에 이르는 경로는 상이할 수 있다. 그러나 알몬드는 모든 정치체제의 구조와 기능이 진화해서 결국은 미국 민주주의 체제로 수렴된다는 근대화론의 철학을 견지했다. 바로 그 경로가 역사의 보편적 법칙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알몬드의 구조기능주의는 사회학자 탤컷 파슨스의 구조기능주의를 정치학적으로 변용시킨 것이었다. 파슨스는 정치체제를 포함한 모든 사회체제는 그 자체의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런 기능을 ‘패턴변수’라고 지칭했다. 파슨스는 패턴변수를 5가지 유형으로 집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파슨스는 귀속적 지위, 기능적으로 뒤섞인 지위, 독특한 가치, 패거리 지향, 정서 지향성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사회를 전통사회로 지칭하고, 그것들과 상대적인 기능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사회를 근대사회로 지칭했다. 그런데 파슨스가 볼 때 인류의 역사는 전통사회에서 수행하는 패턴이 근대사회에서 수행하는 패턴으로 변화하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파슨스가 이해하는 근대사회란 미국 민주주의가 대표하는 서구사회를 의미했다. 결국 파슨스는 ‘서구적 편견’을 지닌 근대화론의 기수였던 것이다.
그러나 행태주의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행태주의의 방식에 따라 아무리 연구해도 소련의 행태를 설명할 수 없었고, 예측은 더더욱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행태주의를 탄생시킨 데이비드 이스턴은 1969년 ‘정치학에서 새로운 혁명’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스턴은 정치행태의 설명과 예측을 목표로 출발한 행태주의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자인하고, 앞으로 정치학은 시대의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는 연구에 헌신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미국 학계에서 이스턴의 제안은 외면당했다. 이스턴으로부터 독립한 행태주의가 이제는 너무도 장성해서 학계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9년 후반 소련이 붕괴되면서 냉전이 종식되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냉전 종식을 예측한 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행태주의가 인간의 행태를 설명하고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미 오래전에 판명되었는데도 그것을 관성적으로 고수하는 미국 학계의 ‘지적 지체’를 단적으로 예증하는 사례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미네소타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가 허버트 파이글, 메이 브로드벡 등의 과학철학 강의를 집중적으로 수강하면서 행태주의의 문제점을 철학적으로 진단하고자 했다. 내가 볼 때 행태주의가 인간의 행태를 설명하고 예측하지 못한 결정적 이유는 자연과학적 방법을 차용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행태주의의 연구 대상인 인간과 자연과학의 연구 대상인 자연은 존재론적으로 다르다. 예컨대 인간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인 반면, 자연은 그런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면 자결하기도 하지만, 자연의 세계에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행태주의는 자연과학적 방법을 차용한 나머지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을 의미를 추구할 수 없는 자연으로 간주하면서 연구를 진행시켰다. 다시 말해서 연구 목적에 적합한 연구 수단을 개방적으로 모색한 것이 아니라, 연구 수단을 고정시켜 놓고 연구 목적을 그것에 인위적으로 짜맞췄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행태주의의 모든 재앙이 잉태되었다.
첫째, 행태주의는 자연과학적 논리로 연구할 수 있는 기계적인 인간관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 예컨대 행태주의는 인간을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동물로 간주했다. 여기에서 인간의 합리성이란 경제적 이익에 따라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또한 경제적 이익은 양적으로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수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경제적 이익만을 좇는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예컨대 종교전쟁을 경제적 이익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둘째, 행태주의는 개인들의 산술적 종합을 사회로 간주하는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전제했다. 그러나 사회에서 공유하는 역사적 유산, 문화적 특성, 공적 가치 등은 개인들의 산술적 종합을 초월해서 존재한다. 일찍이 장자크 루소는 사회에서 공유하는 일반의지는 그 사회 구성원의 산술적 종합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런데도 행태주의는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고수함으로써 사회 구성원 전체를 규율하는 가치를 추방해 버렸다. 하지만 그런 가치를 도외시하고 어찌 사회를 제대로 연구할 수 있겠는가?
셋째, 행태주의는 통계학·확률론 등을 중요한 연구 수단으로 채용함으로써 양적 측정이 가능한 데이터에만 배타적으로 주목하고, 행복·정의·평화 등과 같이 측정이 용이하지 않은 질적 가치를 연구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그러자 행태주의는 그러한 질적 가치에 대해서 사회적 책임을 질 필요가 전혀 없게 되었다. 오히려 그런 가치를 철저히 외면해야만 가치중립이라는 과학적 이상에 충실하게 복무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넷째, 행태주의는 인간의 ‘사색’ 또한 추방했다.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우선적으로 문제를 색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상적 (문제가 없는) 사회에 대한 개념을 먼저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상적 사회에 대한 개념에 비추어 비정상적 사회의 문제를 선명하게 색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적 사회에 대한 개념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철학·역사·윤리, 특히 인간의 본성을 깊이 성찰해야만 한다. 하지만 수학적 합리성에 배타적으로 주목한 행태주의에서는 이를 도외시했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도 몽매했다. 그러자 행태주의는 이상적 사회에 대한 개념을 독자적으로 구상할 능력 또한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면 그런 행태주의를 통해서 학생들에게 어떤 사회의 이상을 가르칠 수 있고, 그런 이상을 구현할 수 있는 사유능력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다섯째, 행태주의적 사고방식은 ‘군비경쟁’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 주지하듯 전쟁은 인간이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쟁은 인간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다. 전쟁의 와중에도 외교적 협상과 정치적 타협이 숨가쁘게 이뤄지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인간 대신 사물에 주목하는 행태주의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전쟁의 본질은 인간이 아니라 ‘무기’였다. 그래서 인간의 정치와 외교를 추방하고 오직 막강한 무기를 적대국보다 많이 축적해야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을 탄생시켰다. 그러면 적대국이 가만히 있겠는가? 인간을 누락시킨 무기 중심 전쟁관은 필연적으로 끝없는 군비경쟁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막강한 무력을 보유하고서도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국이 베트남의 전투 현장에서 패배한 적은 없다. 그러나 미국은 정치적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전쟁은 무기 그 자체가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치적 판단을 통해서 수행하는 것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단적으로 예증하는 사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여전히 정치와 외교를 경시하면서 자국의 군산복합체가 양산하는 첨단 무기로 무자비한 전쟁을 강행하는 ‘낭만적’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의 정치적 본질을 거스르는 낭만적 습관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 패배뿐이었다. 실제로 미국은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또다시 패배했다. 두 전쟁에 삼성 장군으로 참전했던 대니얼 볼저는 500여쪽에 이르는 자신의 저서 <왜 우리는 졌는가>(Why We Lost·2014)에서 미국이 스프레드시트의 데이터와 추상적 이론을 맹신했기 때문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여섯째, 미국의 행태주의적 전쟁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점은 ‘전사자 수’(body count)에 대한 강박적 집착이다. 내가 1965년 미국에 도착해서 목격한 잊을 수 없는 기억 중 하나는 텔레비전에서 연일 보도하는 베트남 전쟁 전사자 숫자였다. 미군 전사자 수와 베트남군 전사자 수를 대비시킨 도표를 보면 항시 베트남 전사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따라서 그 도표만 보면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매일 승리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행태주의는 전사자 수라는 통계로 전쟁의 정치적 본질을 은폐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훗날 조지아대학 대학원 교수로서 필수과목으로 개설된 ‘정치학 방법론: 과학철학적 성찰’에서 위에서 예시한 행태주의의 한계를 상기시키면서 행태주의를 수십년간 가르쳤다. 그런데 한국을 방문해보니 행태주의가 미국보다 더욱 번창해 있었다. 충격이었다! 이제 한국의 사회과학을 지배하는 행태주의를 자각하지 못할 지경에 이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거의 모든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입하다 보니 행태주의의 적폐까지 ‘선진학문’으로 포장해서 끊임없이 수입했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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