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과거> 펴낸 은희경 "과거 회피했던 것 때문에 여성들이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 반성"
[경향신문]

소설가 은희경(60)을 만나러 가는 길에 조금 긴장한 것이 사실이다.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라는 ‘아우라’도 있지만, 그가 가진 냉정하고 신랄한 관찰력 때문이다. 은희경 하면 ‘냉소’라는 말이 따라오는데, 그는 삶과 인간의 표피를 뚫고 관통하는 예리한 눈을 가졌다. 7년 만에 낸 장편소설 <빛의 과거>를 보면 그 시선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가령 이런 장면. 소설의 주인공 김유경은 말을 더듬는 약점 때문에 매사에 소극적이고 자신을 숨기는 데 익숙하다. 말더듬 때문에 결정적 순간에 자신을 드러내는 데 실패하고 물러서는 주인공의 모습에 연민을 가지려는 찰나, 그의 동창생이자 소설가인 김희진은 이렇게 서술한다. “회피야말로 가장 비겁한 악이다” “그 정도를 치명적 장애나 결핍이라도 되는 듯이 감추려 들고 괴로워하는 것이야말로 장애와 결핍을 가까이에서 본 적 없는 그녀의 ‘공주다움’이었다.”
어쩌면 은희경에게 나의 허튼 질문에 숨어있는 결핍과 약점을 간파당하는게 아닐까. 하지만 지난 2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은희경은 “객관적으로 보려고 할 뿐이지 일부러 차갑고 부정적으로 보려는 건 아니다. 난 온화한 사람”이라며 활짝 웃었다.
<빛의 과거>가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처음 쓰려고 생각한 게 10년 전, 앉아서 쓰기 시작한 지 4년만에 완성될 수 있었다. 현재의 은희경이 40년 전 막 대학에 입학한 여대 기숙사 시절로 돌아간 소설이기 때문이다.
“작가마다 갖고 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새의 선물>에선 내 이야기를 썼고, <비밀과 거짓말>은 70년대 개발 시대의 아버지 이야기였어요. 언젠가 기숙사 시절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과거라는게 나한테 뭘까’라는 생각에서 길을 찾았어요. 1977년의 이야기만 한다면 중요하지 않지만, 40년이 지나 그 시절을 본다는 게 인생의 여정을 정리하는 것 같았어요.”
은희경이 과거를 돌아보는 방식에 미화나 향수란 없다. “이해받으려고 하거나 편을 들어달라고 하는 글에는 결코 ‘발견’이 없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신랄한 외부 시선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고 은희경은 말한다. 말더듬는 버릇 때문에 항상 선택을 회피하고 소극적이었던 김유경이 기억하는 ‘과거’는 자신의 욕망에 거침없었던 김희진이 기억하는 ‘과거’에 의해 전혀 다른 측면을 드러낸다. 김유경의 말더듬는 약점이 폭력적이고 억압적이었던 당시의 시대상과 분리될 수는 없지만, 그 약점에 숨어 방관과 회피를 삶의 방식으로 선택한 건 김유경이었다. 그래서 “정확한 관찰력은 그게 결여된 사람들이 흔히 냉소주의라고 부르는 그것”이라는 김유경의 말은 “회피하려면 핑계가 필요하다”는 김희진의 말에 의해 반박된다.
“우리의 현재는 과거로부터 온 빛인데, 현재만을 보기 쉬워요. 별빛도 오래전에 출발해 실은 꺾이고 반사된 이후에 도착하는 것이죠. 과거의 진실이 현재를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내 삶을 해석하는게 달라진다는 생각이요. 그때 내가 회피했던 것 때문에 지금 많은 젊은이들이 싸워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반성도 들었죠. 최근 불거진 여성 문제를 보며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소설은 1970년대 말 한국사회를 여성의 시각에서 세밀하게 복원한다. 지금 들으면 “고조선 아니야~”라고 할 법한 당시 여성들에게 요구되던 성역할과 편견이 ‘뼈 때리는 문장’으로 그려진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처럼 “또렷한 젠더 렌즈에 포착된 한국 근대성의 성별을 폭로”한다. “여성의 지성은 남자를 보필할 때에만 인정받을 수 있고 여자가 남자를 능가할 만큼 눈치가 없으면 진정으로 똑똑한 게 아니”라거나 “모성과 처녀성이 다 있는 여인상이라는 게 무슨 뜻이야?”라는 문장 뿐 아니라 취업률이 96.4%에 달하는 경제 호황기에도 여대의 취업률은 26%에 불과했던 현실이 드러난다. 또 성을 남녀의 권력관계로 바라본 당시로선 급진적이었던 케이트 밀릿의 <성의 정치학>을 읽는 주인공의 모습도 나온다. 은희경은 “70년대 미국에선 페미니즘 운동이 과격해진 시기였고, 77년에 이대에서 처음 페미니즘 강좌가 개설됐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뭐가 달라졌을까란 생각도 한다. 교육받은 엘리트 여성들이 사회에 적응해버린 것에 대한 반성이 있다”고 말했다.
긴급조치 9호가 내려졌던 1977년, 독재 정권의 폭압 아래 획일적인 단체생활을 요구받았던 기숙사 안은 다름이 조화롭게 섞이기 어려운 시대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대학 신입생이 마주하는 계급 차이, 서울과 지방의 격차 등도 세밀하게 그려진다.
정의를 외쳤지만 지금은 기득권 세력이 된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도 녹아난다. 희진이 자서전을 대필해 준 정치인은 개인의 출세 욕망을 좇아 성공한 것이지만 사회정의를 위해 헌신한 것으로 묘사된다. 은희경은 “권력을 비판할 때 공정을 위해서 비판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 권력자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비판하는 걸 잘 모르는 경우도 있다. 대학생 때 독재에 반대하고 사회정의에 예민했던 사람들일수록 구별을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고 말했다.
유경과 희진의 인생은 엇갈림과 교차를 거듭하면서 종래엔 “각기 다른 바위에 부딪쳐 다른 지점에서 구부러지는 계곡물처럼 모두의 시간은 여울을 이루며 함께 흘러”간다. 은희경은 “내 안에 유경과 희진이 모두 있다. 냉소적으로 한 발 물러나 바라보던 태도가 회피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삶과 인간에 대한 때론 현미경 같고, 때론 메스 같은 날카롭고 정확한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은희경이 벌써 환갑의 나이인 작가라는 걸 믿을 수 없게 된다.
“나도 같은 시대를 사는 동시대인이에요. 세 살 손자를 둔 할머니지만 항상 개인이라는 정체성이 커요. 손자도 나를 ‘희경 할머니’라고 불러요. 외할머니, 친할머니는 성차별적인 명칭이고, 할머니이기 이전에 이름을 불러준다는 게 좋아요.”
자신조차 양쪽으로 팽팽히 당겨 바라보는 균형감이 은희경을 항상 ‘현재적 작가’로 만드는 게 아닐까. 우리 시대와 자신을 언제나 예리하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작가를 가졌다는 건 우리로서도 행운이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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