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과학 잡지가 될 뻔한 '과학세계'

2019. 9. 2.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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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의 과거창]
도쿄 유학생단체 과학문명보급회
1925년 '과학세계' 창간 알렸지만
실제 출간 흔적 없어 수수께끼로
잡지 ‘과학세계' 창간호 예고 광고(1925). 서울SF아카이브 제공

국립과천과학관에서는 지금 ‘과학한국, 최초의 시도들 : 정보통신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기획전시를 하고 있다. 10월 중순까지 예정된 이 전시는 120년도 더 된 우리나라 최초의 전화기 모습 등 생활 속 정보통신기기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준다. 당시엔 전화기를 ‘덕률풍(德律風)’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텔레폰(telephone)’을 비슷한 발음의 한자어로 음차해 표기한 것이다.

요즘 청소년들에게는 생소하지만 30대 이상 연령층이라면 친숙한 모양의 컴퓨터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얇은 액정디스플레이(LCD)모니터가 아니라 컴퓨터 본체보다 더 크고 무거운 음극선관(CRT), 또는 흔히 브라운관이라고 하는 모니터로 ‘너구리’ 같은 30년도 더 된 옛날 컴퓨터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실제로 한 중년 여성분이 젊은 시절 정말 좋아했던 게임이라며 감격하는 모습도 봤다.

최근에 재미있는 얘기를 접했는데, 컴퓨터 화면에서 저장을 뜻하는 그림 기호가 왜 자동판매기 모양인지 청소년들이 궁금해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건 예전에 쓰던 보조기억장치인 플로피디스크의 모양을 본 딴것으로, 이 전시의 ‘MS-DOS 체험’ 코너에서 실물을 볼 수 있다. 이밖에도 모스부호용 전신기, ‘공병우타자기’, ‘삐삐’ 등 지난 시대에 우리 일상과 밀접했던 다양한 정보통신 기술들의 체험이 가능하다. 아마 성인이라면 누구나 ‘과학기술의 가속 발달’이라는 시대적 추세를 실감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전시에서 접할 수 있는 우리나라 과학문화사의 흥미로운 수수께끼 하나가 있다. 전시물 중에 우리나라 과학잡지의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내용이 있는데, 이 중에 1925년에 출간된 한 단행본에 실린 과학잡지의 광고가 보인다. ‘과학문명보급회’라는 단체에서 내는 ‘과학세계’라는 잡지의 창간호를 알리는 내용이다. 어쩌면 이건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과학 잡지가 아니었을까?

이제껏 알려진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대중과학 종합지는 1933년에 나온 ‘과학조선’이다. 이 잡지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10여 년 동안 명맥을 이어가며 ‘과학데이’ 행사도 하는 등 일제강점기의 사실상 유일한 대중과학 전문 매체로 평가받는다. 이에 앞서 1925년 12월에 나온 ‘문명’, 1929년에 연희전문학교에서 낸 ‘과학’ 등의 잡지 기록이 있지만, 창간 이후 곧 사라지거나 학술전문지 성격에 머무는 등 명실상부한 교양과학 대중지로 보기엔 미흡한 감이 있다.

'과학세계' 창간호 광고가 실린 ‘현대문명 응용과학전서'(1925). 서울SF아카이브 제공

‘과학세계’ 창간호 광고가 실린 책은 1925년 일본 도쿄에서 출판된 ‘현대문명 응용과학전서’이다. 표지에는 안테나로 보이는 높은 철탑들과 그 위를 나는 비행기의 모습이 있다. 발행 겸 편집인은 ‘과학문명보급회’인데 이는 1924년 도쿄에서 결성된 한인 유학생들의 학술단체이다.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던 월남 이상재가 제자(題字)를, 육당 최남선이 서문을 썼으며 과학기술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며 기본 개념과 원리 등을 풍부한 그림과 함께 설명한 교양과학백과 같은 책이다. ‘과학세계’ 창간호 광고는 이 책의 가장 마지막 쪽에 실려 있으며 월간지로서 구독료 안내도 하고 있다. 6개월분 구독료를 미리 내면 과학문명보급회 회원으로 특별대우한다는 고지도 보인다.

이 ‘과학세계’가 실제로 나왔다면 1933년에 나온 ‘과학조선’보다도 8년을 앞서니 아마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과학 종합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과학세계’는 실제로 출간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발행인인 유학생 단체 ‘과학문명보급회’는 일본에 있었지만 한반도 각지를 돌며 여러 차례 과학계몽 순회강연회를 여는 등 대중과학 보급 활동에 열성을 보였으므로 이 잡지도 당연히 우리 땅의 구독자를 주된 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황상 결국 이 잡지는 창간호조차 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 문제였을지, 혹은 출간 허가를 못 받았는지 그 사유를 헤아릴 길은 없지만 아무튼 아쉬운 일이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1958년에 마침내 ‘과학세계’ 창간호가 나왔다. 물론 제목만 같고 발행인은 완전히 다른 잡지이다. 1958년에 나온 이 ‘과학세계’는 일제강점기의 ‘과학조선’ 이후 우리 땅에서 사실상 처음 선을 보인 종합 교양과학지로서, 오래전 과학문명보급회가 꿈꾸었던 대중과학 잡지의 모습을 그대로 구현했다. 표지에 실린 우주탐사선의 모습이 당시의 ‘스푸트니크 쇼크’, 즉 옛 소련이 1957년에 쏘아 올린 세계 최초 인공위성의 영향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1958년 ‘과학세계’ 창간호는 지금 과천과학관에서 실물 전시 중이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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