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보세]어른들의 음식, 순대국이 주는 따듯한 위안
고백건대 어릴 때는 순대국을 잘 먹지 못했다.
극도로 싫어하던 음식이 순대국이었다. 돼지 냄새가 진하게 올라오는 국물에 왜 밥을 말아 먹는지 도무지 나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옛날 순대국은 생각해보면 국물에 갖가지 양념이나 재료를 넣어 냄새를 잡은 요즘 순대국과는 개념이 좀 달랐던 듯 하다. 시장 근처만 가도 큰 가마솥에서 펄펄 끓는 순대국에서 나는 돼지 냄새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십 리 밖까지 자욱하게 퍼지는 그 냄새가 싫어 시장을 갈 때면 코를 막고 뛰었다.
어릴 때 겪었던 장터 순대국 냄새에 대한 트라우마가 워낙 컸던지 어른이 돼서도 한동안 순대국을 멀리했다. 아예 입에 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자연스래 지금은 없어 못 먹는 막창이나 대창에 속을 가득 넣어 만든 순대의 맛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냥 순대하면 분식집에서 팔던 당면 가득한 순대만 생각날 뿐)
그런데 변화는 한 순간 찾아왔다. 술의 맛을 알고 국물의 맛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전까지는 극도로 싫어하던 순대국이 어느날 완전히 새로운 음식으로 와 닿는 게 아닌가. 머릿고기와 오소리감투, 곱창, 순대 등 돼지 부속물을 새우젓에 콕 찍어, 국물을 안주 삼아 떠먹다 뒤늦게 순대국의 참 맛에 입문했다. 순대국을 먹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어른이 됐구나',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게 30대 초반 무렵이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순대국도 과거 꼬릿한 돼지 냄새가 나던 순대국에서 차원이 다르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갖가지 재료와 양념을 넣어 돼지 냄새를 잡기 시작하면서 특유의 돼지 냄새가 줄어들었다. 돼지 도축과 유통이 현대화되고, 관련 조리법이 개선됐기 때문이다. 진한 사골 국물에 머릿고기, 순대, 오소리감투, 내장 등 여러 부위가 들어가야 제맛이 난다. 들깨가루와 후춧가루, 다대기, 새우젓은 필수다. 가끔 깍두기 국물까지 넣으면 그 맛이 더 달라진다. 다양한 맛의 변주가 가능하다.
순대국은 예나 지금이나 대표적인 서민 음식이다. 배고픈 시절 많은 사람들이 먹도록 국물을 내 말아 먹도록 만든 국밥의 개념이다. 비싸지 않고 푸짐해서 좋다. 양이 많은 특순대국을 시켜도 가격은 1만원 미만이다.
무엇보다 가성비 뛰어난 모듬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한잔 기울이게 만든다. 모듬을 시키면 내어주는 순대와 오소리감투, 머릿고기, 내장 등 부속물은 소박함이 주는 따뜻한 즐거움이다. 이 가격에 이러한 만찬을 즐길 수 있으니 그 누구도 부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순대국 맛집을 일부러 찾아다니며 먹는다. 아버지께서도 누구보다 순대국을 좋아하신다. 순대국 맛집을 찾는데 일가견이 있으셔서 웬만한 맛집을 모시고 가도 'NO'를 외치신다. 아래 소개하는 집들은 모두 아버지와 함께 자주 찾는 집들이다.(아버지가 OK 하신)
요즘 가장 자주 방문하는 순대국집은 서울 대방동의 서일순대국이다. 시래기를 듬뿍 넣은 특별한 야채 순대와 오소리감투, 머릿고기 등이 잔뜩 들어간 순대국은 별미 중 별미다.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찾는 듯 벽엔 유명 연예인들의 사인이 가득하다. 술국과 모듬은 최고의 안주라 감히 칭한다.
노량진과 장승배기 언저리에서 오랫동안 영업하다가 최근 봉천동 현대시장 근처로 옮긴 만양순대국도 아주 훌륭한 맛과 가성비를 보여 주는 집이다. 술꾼 들에게는 오래 전부터 이미 유명한 맛집으로 통한다. 순대국 정식을 주문해도 순대와 머릿고기를 크게 한 접시 내준다. 다양한 부위가 푸짐하게 나오는 모듬도 가격이 훌륭하다.
회사 근처인 광화문 화목순대국도 자주 찾는다. 곱창이 많이 들어 있고 얼큰한 국물이 해장에는 딱이다. 저녁 퇴근길에 찾아 가끔 반주와 함께 즐길 때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여의도에도 같은 이름의 순대국집이 있다.
적응이 되다보니 요즘은 시골 장터에 가서 접하는 냄새나는 꼬릿한 순대국도 좋다. 내공이 일취월장한 탓이다. 순대국과 함께 소박한 행복을 누리려 요즘 연락이 뜸했던 오랜 벗에게 전화 한번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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