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공장, 유독물질 사고가 걱정된다면? [커버스토리]

장은교 기자 2019. 8. 1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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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 - ‘우선관리지역 60곳’ 보고서 단독 입수

우리 동네 공장에서 가스 누출사고가 발생했다. 공장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 ‘나’는 이 사고가 난 사실을 기사를 보고 알았다. 가스가 누출됐다니. 갑자기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운 것 같다. 아뿔싸.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집으로 오려면 공장 앞을 지나쳐야 한다. 지금 바로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나. 학교 안에 있는 게 더 안전할까. 그런데 대체 어떤 가스가 유출됐다는 거지. 얼마나 위험한 거지. 정부는 뭘하는 걸까.

만약, 사고가 발생하기 전 우리 동네 공장에서 어떤 화학물질을 취급하고 있고, 그 물질들은 사고가 났을 경우 어느 정도로 위해한지를 알고 있다면 어떨까. 사고가 발생했을 때,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지자체(지방자치단체)가 사고 발생부터 대응방법, 처리과정까지 실시간으로 알려준다면 어떨까.

환경부가 이런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사업에 착수했다. 환경부는 화학사고 대비를 위해 지자체와 기업, 시민사회단체, 화학물질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 구축 사업단’을 지역별로 구성한다고 16일 밝혔다. 화학물질(사고대비물질)을 취급하는 기업들은 취급량과 물질의 내용을 공개하고, 지자체와 지역 시민사회단체, 화학물질 전문가들이 미리 위험을 파악하고 대응 계획을 짜며 함께 사고에 대비하고 관리하는 것이 핵심이다. 2016년 경기도 수원시를 시작으로 2018년까지 10개 지자체에서 ‘선도 사업단’이 운영됐고, 이를 토대로 사업단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로 했다.

환경부는 전국 지자체 중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 구축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60곳을 선정했다. ‘우선관리지역 60곳’은 원진직업병관리재단 노동환경건강연구소에서 지난해 2월~12월까지 진행된 연구를 통해 선정됐다. 화학물질(사고대비물질)의 취급량, 인구 수, 산업단지 생산규모 등을 고려해 분석했다. 분석 결과, 우선관리가 필요한 지역 1위는 전라남도 여수시, 2위는 경기도 안산시, 3위는 울산시 남구인 것으로 나타났다. 환경부는 지난 12일 우선관리지역 60개 지자체에 선정결과를 통보했다. 오는 12월 간담회를 열고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 구축을 위한 전국네트워크를 조직할 계획이다.

환경부는 60개 지역 선정 의미에 대해 “화학물질 취급·생산규모에 따른 위험도, 공장 인근 거주민들의 수, 각 지자체의 의지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로 ‘화학사고 위험’을 보다 미리 관리하게 된 지역으로 보면 된다”고 밝혔다. 환경부는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는 전국 모든 지자체에 구축하는 것이 목표이므로, 순위권에 선정되지 않은 지역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지자체가 있다면 전국네트워크를 통해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경향신문은 우선관리지역 60곳의 목록과 선정과정이 담긴 환경부의 ‘화학사고 예방·대비·대응을 위한 지역대비체계 구축 보고서’를 단독입수했다. 약 3개월동안 중앙기획단 회의와 지역 사업단 간담회 등을 취재했으며, 지자체 담당 공무원과 시민사회 대표, 화학물질 전문가 등을 만나 이번 시업의 의미를 분석했다. 본지 뉴콘텐츠팀은 우선관리지역 외에도 전국 지자체별 화학물질 취급 량과 지난 3년간 화학사고 발생건수 등을 분석해, 인터랙티브 콘텐츠 ‘공장 안전 프로젝트, 우리 공장이 달라졌어요’를 별도 제작했다. 경향신문 홈페이지와 모바일을 통해 지역별 화학사고 위험관리정도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시한폭탄’과 일상 속 동거? 안전 네트워크 만들어 불안 줄인다

2012년 9월 경북 구미의 휴브글로벌 공장에서 발생한 불산누출사고 당시의 CCTV 장면. 경북지방경찰청
2013년 경기 화성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발생한 불산누출사고 현장감식 모습. 구미 사고로 공장 노동자 5명이, 화성 사고로 1명이 숨졌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 구축

2012년 9월27일, 경북 구미제4산업단지 ‘휴브글로벌’ 공장에서 불산 가스 10t이 누출됐다.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5명이 사망했고, 소방관 18명이 다쳤다. 사고가 난 공장 옆엔 다른 공장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주택과 축사도 가까웠다. 최소 3000명 이상이 호흡곤란과 함께 코와 목에서 피를 토하는 증세를 호소했다. 동물도 확인된 것만 4000마리 이상 희생됐다. 구미 불산 사고 이후 7년, 우리 사회는 화학사고로부터 조금 더 안전해졌을까.

화학물질안전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서 발생한 화학사고는 66건이었다. 2014년엔 105건, 2015년 113건, 2016년 78건, 2017년 87건으로 줄어드는 추세지만, 화학사고는 단 한 건이라도 파급력이 클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건수로만 영향력을 가늠하긴 어렵다. 환경과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은 시간을 두고 봐야 하고, 불안과 공포 등 사고가 미치는 심리적 영향력은 더 오래갈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화학물질이 없는 세상에서 살기 어렵다. 인간이 불을 사용하기 시작한 후 늘 화재의 위험에 노출되면서도, 불 사용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지진, 태풍, 쓰나미 같은 대형 자연재해에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상에선 생활의 일부가 된 화학물질을 잘 쓰고 잘 관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노동자 5명이 숨진 구미 ‘불산 사고’ 이후 7년…화학사고는 줄어드는 추세지만 공포 여전 정부와 지자체가 기업·시민사회와 손잡고 미리미리 소통하며 사고에 대비하자는 취지로 올해 말까지 전국네트워크를 조직해 2023년까지 최소 60곳에 지역대비체계 구축 계획 여수가 우선관리지역 1위…환경부 “1군 지역이 아닌 지자체에도 참여 가능성 열려있어”

환경부가 추진 중인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의 목적은 화학사고에 대한 일상의 불안을 관리하자는 데 있다. 사고가 터지고 나서야 우왕좌왕 수습하고 쉬쉬하며 불안해할 것이 아니라, 기업도 시민도 정부도 서로 위험을 드러내놓고 미리미리 소통하고 대응하자는 것이다.

환경부는 2015년 화학물질관리법 시행, 2016년 화학사고 관리에 관한 지자체 권한을 강화한 표준조례안 제시, 2016~2018년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 구축(10개 지역)에 이어 올해 말까지 전국네트워크를 조직해 2023년까지 최소 60개 지역에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를 구축할 계획이다.

■ 우선관리지역 60곳은 어떻게 정했나

환경부는 2016년 2개 지역(수원·여수), 2017년 4개 지역(평택·양산·광주 광산구·인천 서구), 2018년 4개 지역(파주·화성·청주·영주)에서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 구축사업을 진행했다. 사업이 모범적으로 정착된 곳도 있고, 사업단이 구축되긴 했으나 아직 미흡한 곳도 있다. 올해는 김해, 구미, 군산, 용인에서 사업단 구축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환경부는 1년에 4곳씩 사업을 진행하려면 전국(229개 지자체, 특별자치시인 세종시를 기초단체로 보고 제주를 제주시와 서귀포시로 구분)에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를 모두 구축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을 감안해 우선관리지역 60곳을 선정하기로 했다. 수원, 청주, 파주 등 먼저 모범적인 사례를 구축한 지자체 담당 공무원들과 시민사회단체, 연구진이 결합한 ‘기획단’을 결성해 이들이 다른 지자체에 노하우를 전수하는 전국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다.

우선관리지역은 다음 단계를 거쳐 선정됐다. 첫 번째, 지역별로 사고대비물질(급성독성·폭발성 등이 강해 화학사고의 발생 가능성이 높거나 화학사고가 발생한 경우에 피해 규모가 클 것으로 우려되는 화학물질로서 화학사고 대비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물질)의 취급량을 분석했다. 화학물질안전원에 따르면 전국의 사고대비물질 취급 사업장 수는 7909곳이었다. 전국 229개 지자체를 기준으로 218개 지자체에 해당 사업장이 존재했다.

전국 대부분 지역에 사고대비물질 취급 사업장이 존재하지만, 취급량을 비교해보면 일부 지역에 취급량이 집중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남 여수, 광양, 경북 포항, 충남 당진, 울산 남구, 경기 평택, 충남 서산, 울진 울주군 등이 500만t 이상을 취급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여수의 경우 96개 업체에서 2371만3369t을 취급, 물질량으로는 압도적인 1위로 기록됐다.

두 번째, 지자체별 인구수를 비교했다. 경기 수원처럼 사고대비물질 취급량이 타 지역에 비해 적더라도(35개 업체, 1만731t), 인구수가 많은 경우(120만2628명) 사고대비 필요성이 높다고 봤다. 연구진은 보고서에서 “사고대비물질을 대량 취급하는 사업장이 있을 경우 지역사회의 두려움과 관심도가 높을 수 있기 때문에 기초단체 중에서 인구 10만명당 1000t 이상 사고대비물질을 취급하는 기초단체를 선별해 총 67개 기초단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 같은 분석 결과 울산 남구와 전남 여수가 54개 취급사업장을 보유해 1위로 조사됐다.

세 번째, 산업단지의 규모를 고려했다. 연구진은 국가산업단지의 유무보다는 지역 내 산업단지의 매출액이 화학사고 관리체계 구축과 연관성이 높다고 봤다.

산업단지 생산액 기준으로는 전남 여수가 4836만4655t으로 1위, 경남 창원이 2850만7616t으로 2위, 경기 안산이 2294만269t으로 3위로 조사됐다.

최종순위는 전국 기초단체를 사고대비물질의 취급량(제조량+사용량)에 따라 1군(1~60위), 2군(61~120위), 3군(121~229위)으로 나눈 뒤 기초단체별 인구수 순위와 산업단지 생산액 순위의 평균을 구해 정했다.

분석 결과 사고대비물질 취급량과 산업단지 생산액이 압도적으로 많고 인구수 대비 대규모 취급 사업장도 많은 전남 여수시가 우선관리지역 1위로 선정됐다. 우선관리지역 60곳의 순위는 데이터에 따라 결정됐지만, 1위가 전국 지자체 중 가장 위험한 지역이라고 보긴 어렵다.

여수의 경우 2016년 수원과 함께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 구축 사업을 가장 먼저 시작한 지역이다. 지역대비체계의 롤 모델로 평가받는 수원 역시 38위에 선정됐다. 지역대비체계가 구축된 두 지역은 화학사고가 발생할 경우 타 지역에 비해 비교적 신속한 대응체계가 작동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고대비물질이 일정 수준 이상 계속 취급·생산되고 특히 공장지대와 가까이 사는 지역민의 수가 많을 경우 우선관리지역에 포함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연구진의 의견이다.

환경부와 연구진은 “우선 1군 지역부터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 우선 구축지역으로 분류해 전국네트워크 참여 및 지역대비체계 구축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라며 “2, 3군 지역에서도 주민의 관심이 높고 지자체의 의지가 있다면 사업 참여와 전국네트워크 참여 가능성 역시 열려있다”고 말했다.

■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란?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의 핵심은 ‘조례 제정’과 ‘(지자체 산하) 화학사고관리위원회’ 구성이다. 조례 제정은 화학사고 관리에 있어 지자체가 제도적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화학사고관리위원회는 지자체와 기업, 시민사회와 전문가 등이 정기적으로 모여 화학물질을 공동 관리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다. 환경부가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 우선관리지역 60곳을 조직하려는 것도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환경부가 전국으로 확대하려고 하는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는 경기 수원과 충북 청주를 이상적 모델로 삼고 있다.

화학사고 대응에 조례 제정과 화학사고관리위원회 구성이라는 해법을 찾기까지는 뼈아픈 과정이 있었다. 2011년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2012년 구미 불산 사고를 계기로 2015년부터 화학물질의 독성정보와 용도를 등록하도록 하는 ‘화학물질관리법’이 시행됐다. 화학물질관리법에 따라 화학물질 취급 사업장은 통계조사에 응해 화학물질 취급 정보를 제출해야 한다. 또 유독물질을 취급하면 사업장 외부의 사고영향을 평가하는 ‘장외영향평가’를 실시하고, 사고대비물질(2019년 8월 기준 총 97종)을 취급하면 화학사고 예방·관리를 위한 ‘위해관리계획서’를 의무적으로 제출하게 됐다. 유독물질 관리를 지자체에서 하고 있었으나, 이 권한도 중앙정부로 넘어갔다. 그러나 화학물질 관리에 대한 지자체의 권한이 사라지자 현장에서 ‘행정 공백’이 드러났다. 수원시에서 발생한 물고기 집단폐사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2014년 10월31일 삼성전자 수원공장 인근 하천(원천리천)에서 물고기 1만마리 이상이 떼죽음한 채 발견됐다. 등이 굽거나 내장이 터지고 머리와 꼬리 색깔이 변한 물고기 사체가 발견된 지점은 삼성전자 공장에서 물을 흘려보내는 우수토구에서 백련교 하류까지 약 3㎞에 달했다. 하천 물을 수거해 조사한 지역 시민단체인 수원환경연합은 유독물질인 ‘클로로포름’이 검출됐다고 밝혔다.

수원시는 시민단체의 요구를 받아들여 민관합동조사단을 꾸렸지만, 삼성의 반대에 막혔다. 삼성은 공무원의 조사에는 응하겠지만, 민간외부전문가의 조사에는 협조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지자체가 화학물질 관리와 사고대응에 있어 법적인 권한과 책임이 없기 때문에 삼성을 강제할 힘이 없었다. 이때 느낀 현실적 한계가 ‘조례제정 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각 지역현장과 시민사회 전문가들의 뜻이 모아지면서, 2016년 ‘화학물질관리법 제7조의 2’가 신설됐다. 이 조항은 “지방자치단체는 관할구역에서 취급하는 화학물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화학물질로 발생하는 사고에 대비·대응하기 위해 화학물질 안전관리 및 화학사고 대비·대응을 위한 계획 또는 시책의 수립·시행, 화학물질의 관리에 관한 중요 사항을 심의하고 자문하기 위한 위원회의 구성·운영을 조례로 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조례를 통해 지자체가 화학사고를 관리하고 대응할 수 있는 ‘행정적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수원시는 ‘주민 알권리’를 강조한 ‘수원시 화학사고 대응 및 지역사회 알권리 조례’를 만들었다. 이 조례를 보면, 시장이 시민의 안전 및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고독성물질의 취급·배출현황, 지난 5년간 화학물질 사고 정보, 시에서 사업장 주변 환경을 측정·조사한 결과 등을 공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시장은 사업장의 화학사고위험등급을 정하기 위해 사고대비물질 취급사업장에 화학물질 취급 및 관리현황과 자체 방제 계획 및 인근 지역에 대한 장외 영향평가 등에 관련한 정보를 요구할 수 있으며, 자료 및 정보의 제공을 요구받은 자는 법령이 정하는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이에 협조해야 한다”고 명문화하고 있다. ‘화학사고관리위원회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내용도 포함됐다.

◆취급 물질 알리고, 사고 대비 훈련…지자체·시민·기업이 ‘함께’

김해 도심, 길 하나만 건너면… 지난달 18일 경남 김해시 상공 촬영 모습. 대규모 산업단지 안동공단(삼방동·어방동·안동·지내동 일원)과 길 하나를 두고 주택단지가 자리 잡고 있다. 김해시는 화학사고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 구축사업을 시작했다. 김해 | 강윤중 기자

경기 수원 ‘알권리 조례’ ‘위원회’ 만들어 사고 발생 때 사고 사실·대응상황 등 실시간 공개…주민설명회 수차례 열어 불안·공포 줄여 충북 청주 ‘관리정보시스템 구축’, 사업장이 화학물질과 취급량 등 직접 등록…시민들 관련 정보 확인하고 사고 땐 기업 수습에 도움 사업 연속성·인력·예산 부족 등 현장 목소리 반영하고 시민·정부·기업은 ‘약속된 조직과 플레이’로 위험 드러내고 미리 대응해야

수원시는 이 조례를 토대로 기업을 화학사고관리위원회에 끌어들였다. 삼성전자, 삼성전기와 함께 지역 내 화학물질 제조업체인 송원산업까지 위원회에 참여했다. 수원의 대표적인 화학물질 취급업체인 세 기업은 수원시 환경안전팀 담당자와 지역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화학물질 전문연구진과 정기적으로 만나 화학물질 취급과 사고대비를 논의하고 있다. 2018년 5월에는 송원산업이 하루 업무를 접고, 공장에서 유해화학물질 누출에 따른 대형 화재사고 대비 훈련을 했다. 초등학생들이 견학을 왔는데 화학사고가 발생했다는 가정 아래 전 직원과 공무원들, 인근 학교 초등학생들이 참여한 재난대비 훈련을 했다. 기업이 하루 공장 문을 닫고 손해를 감수하며 화학사고 대비훈련을 했다는 사실은 지역사회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송원산업 환경안전부 이정호 부장은 “기업 입장에서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화학사고관리위원회에 들어가게 됐는데, 지금은 회사의 경영방침도 많이 달라지게 됐다”고 말했다. 이 부장은 “예전처럼 생산에만 초점을 맞추거나 화학물질 정보를 폐쇄적으로 운영하던 시대는 갔다”며 “기업이 독자적으로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기업 입장에서도 정보를 공개해 잘 관리하고, ‘제도권에서 관리받고 있는 사업장’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좋은 면이 많다”고 말했다. 삼성 역시 관련 정보를 제공하며 “수원시와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정도의 관계”가 됐다고 한다.

사고 대응방법도 달라졌다. 수원시가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를 구축하는 동안, 두 건의 화학사고가 발생했다. 두 사건 다 지역사회에 미치는 피해는 미미했으나, 주민들의 체감도는 달랐다. 2017년 3월 도금업체 이전과정에서 ‘6가크롬’이라는 화학물질 누출 사고가 발생했다. 수원시는 토양오염을 정밀조사하고 정화하는 등 비교적 빠르게 사고를 처리했으나, 이 사실이 6월 언론보도를 통해 뒤늦게 알려지면서 지역사회가 동요했다. 인체에 미치는 유해한 영향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으나, 불안한 주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9번의 주민설명회와 주민건강영향조사를 거쳐야 했다. 수원시 환경정책과 유두연 주무관은 “신속하게 사고를 수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민들에게 빠르고 정확하게 알리는 것이 불안이나 공포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그 사건 이후로는 사고가 나면 바로바로 알리는 것으로 대응방법을 바꿨다”고 말했다.

그해 11월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오리뜰삼거리 부근 한 아파트 단지 인근 도로에 주차된 탱크로리 차량에서 염산 15ℓ가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피해 상황은 미미했고 현장은 빠르게 수습됐다. 수원시는 사고 현장 수습과 함께 수원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홈페이지 등을 통해 사고 사실과 대응 상황을 실시간으로 공개했다. 인근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대면 설명회도 열었다. 당시 빠른 대응으로 단 한 건의 민원도 접수되지 않았다.

수원시는 조례 제정과 사고관리위원회 구성을 넘어 올해 말 완성을 목표로 비상대응계획수립을 추진하고 있다. 각 사업장이 화학물질안전원에 등록한 ‘위해관리계획서’들을 분석해 사고 발생 시 대피 장소와 협력 병원 확인 등 지자체 입장에서 현실적인 대응계획을 만들고, 시민사회단체뿐 아니라 지역주민대표, 학교 등과 연계하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 이와 함께 통계에 누락된 미등록 영세 사업장에 대한 전수조사도 진행하고 있다.

2014년 물고기 집단폐사를 직접 조사했고, 현재 수원시 화학사고관리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 대표 윤은상 수원햇빛발전협동조합 이사장은 지난 5년간의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윤 이사장은 “행정은 늘 ‘최소한의 것’만 하고 기업은 늘 ‘숨기려고만 한다’는 인식이 있는데, 화학사고관리위원회를 통해 각 주체가 거버넌스를 만들고 서로 자주 부딪히면서 안전한 방법으로 화학사고를 통제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청주시 역시 사고를 계기로 빠르게 대비체계를 구축한 지역이다. 청주에선 2012년 8월 다이옥산 폭발사고가 일어나 9명이 목숨을 잃었고, 2013년에도 불산 누출사고로 1명이 부상을 입었다.

청주시는 두 건의 사고를 계기로 화학안전팀 전담조직을 구성하고, 2017년 화학물질 안전관리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지난 3월부터는 화학물질 안전관리 위원회를 구성했다. 청주시의 화학사고 대비체계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화학물질 사업장 관리정보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지역 내 화학물질취급 사업장은 직접 화학물질 취급 종류와 취급량을 실시간으로 등록하고, 지자체는 방제약품과 장비 현황을 제공하며, 사고 발생 시 피해범위를 지도를 통해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2016년 처음 구축된 이 시스템은 2017년 1차 업그레이드를 거쳐 올해 2차 업그레이드 작업을 진행 중이다. 배미옥 청주시 안전정책과 주무관은 “(이 시스템은) 평상시에는 지자체와 시민들이 화학물질 관련 정보를 습득하는 목적으로 활용되고, 사고가 발생하면 기업에 도움이 될 인력과 장비, 협업체계를 지원하는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면서 “처음에는 기업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시스템에 들어오도록 설득하는 과정이 어려웠지만, 지금은 ‘화학사고는 숨길 수 없다’는 인식이 커지면서 기업들의 관심과 참여도도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 예산, 인력, 의지… 현실적인 문제들

사고대비 경험 전수하는‘화학사고 대비 어벤져스’‘화학사고 대비 전국네트워크 기획단.’ 환경부·지자체 공무원과 시민사회단체, 화학물질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이들은 ‘화학사고 대비 어벤져스’처럼 전국의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 구축을 위해 각 지자체에 경험을 전수하고 있다. 왼쪽부터 유성 환경부 사무관, 홍성철 호서대 교수, 이근탁 노동환경건강연구소 객원연구원, 배미옥 청주시 주무관, 유두연 수원시 주무관, 윤은상 수원시민햇빛발전협동조합 이사장, 박준태 파주시 환경사업소장, 천경식 환경부 주무관, 송용권 환경부 과장, 오승보 환경부 전문위원, 김신범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 세종 |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지난 7월18일 경남 김해시청.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 구축 김해시 사업단’ 1차 회의가 열렸다. 김해시는 환경부가 공모한 2019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 구축사업에 공모한 지자체 중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아 사업단을 구축하게 됐다. 김해시는 우선관리지역 60곳 중 33위로 선정된 곳이다. 김해시청 담당 공무원, 김해 시민사회단체 대표, 기업체, 연구진 등이 모인 이날 회의 막바지에 지역에서 도금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이명걸 금호도금공업 대표이사가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사실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위해관리계획서’를 작성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비싼 컨설팅비를 내고 용역업체에 맡겨서 진행하고 있는데, 여기서 또 뭘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걱정됩니다.” 화학물질을 제조·취급하는 노하우는 있지만, 관에서 원하는 형태의 전문적인 문서를 작성하는 것이 작은 기업 입장에선 현실적으로 버겁다는 이야기였다. 또 다른 화학물질 제조업체 (주)ESD코리아의 이승근 과장은 “사업장에서 고농도 위험물질을 대체할 수 있는 물질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해시 담당 공무원들도 속마음을 꺼냈다. 수질환경과 황희철 과장은 “저희 과 이름이 수질환경과이고 팀 이름은 수질오염예방팀인데, 사실 화학사고가 우리 부서 소관인지도 잘 모르겠고 생소한 측면이 많다”고 말했다. 황 과장은 “우리 시는 화학물질 취급량이 많고, 화학사고라는 것이 한번 나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번 지역대비체계 구축을 통해 안전한 시스템을 마련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공무원의 순환근무 특성상 담당자의 업무가 연속되기 쉽지 않다는 맹점도 지적됐다. 화학사고에 대비한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 행정시스템상 전문 인력이 부족한 것도 보완이 필요한 지점이다.

이날 현장에서 나온 솔직한 발언들은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 구축에 있어 전국의 거의 모든 공무원과 기업이 공감하는 문제들이다. 전문적인 시스템이 정착돼있지 않기 때문에 아직까지 담당 공무원의 열정과 성의에 기대는 부분이 많다. 수원과 청주처럼 모범사례로 꼽히는 곳의 담당자들도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했다.

청주의 배미옥 주무관은 “화학사고가 발생하면 지자체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막연하고 책임은 무한정이어서 시한폭탄처럼 안고 가야 하는 문제로 생각되는 경향이 크다”며 “중앙정부 차원에서 화학사고 담당자에 대한 교육프로그램을 만들어 담당자가 바뀌어도 업무가 연속될 수 있도록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수원시 환경정책과 김선혁 환경안전팀장은 “비만 오면 휴대전화를 붙잡고 있게 된다”고 했다. 혹시 미끄러운 빗길에 화학물질을 실은 탱크로리 차량이라도 넘어져 사고가 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기 때문이다. 화학물질 이름조차 생소했던 담당자들은 어려운 명칭과 방제방법, 방제용품 등을 차근차근 공부하며 준전문가가 됐다. 김 팀장은 “화학사고는 자주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화학사고만을 대비한 인력과 예산을 유지하고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다”며 “화학사고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좀 더 확산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수원은 담당자가 바뀔 것에 대비해 최근 3년간의 환경·화학사고 사례집과 대응매뉴얼을 만들었다.

환경부 화학안전과 유성 사무관은 “지자체 입장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돈과 인력인데, 1년에 환경부 예산 2억원으로 4지역씩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 구축사업을 마련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며 “각 지자체의 재해관리기금 용도를 조금 더 분명하게 하고, 전담직원을 배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자체의 조직과 예산은 행정안전부 관리 대상이다.

환경부는 지난 6월 우선관리지역 60곳 선정 간담회를 열면서 행안부와도 협의했다. 행안부는 “굉장히 의미 있는 사업이라고 보고, 환경부와 함께 협의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화학사고 지역대비체계 구축사업의 연구총책임자인 김신범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은 “우리는 이제 화학물질과 ‘함께’ 살 수밖에 없다”며 “시민과 정부, 기업이 ‘약속된 플레이’를 통해 화학사고에 충분히 대비하자는 차원에서 지역별 네트워크 구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은교 기자 ind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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