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 인 NBA] 블랙 맘바 코비 브라이언트, 마이클 조던에 근접했던 사나이! ①

양준민 2019. 8. 6.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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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양준민 기자] “스포일러 해줄까요? 마흔여덟이 되면 그런 생각이 들죠. 옳은 건 뭐고 틀린 건 뭘까. 나한테 옳다고 저 사람한테도 옳을까. 나한테 틀리다고 저 사람한테도 틀릴까. 한 가지는 기억하자. 나도 누군가에겐 개새끼일 수도 있다” 최근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서 브라이언이 배타미를 위로하며 남긴 대사다.

브라이언의 말처럼 세상 모든 이들에게 호감을 살 수 있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설령 신이라고 해도 100%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가 오늘 소개하려는 코비 브라이언트 역시 현역 선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리는 선수다. 

그 예로 혹자는 코비에 대한 평가로 위대한 스코어러, 투철한 직업윤리 의식을 가진 진정한 프로 등의 표현을 쓰기도 한다. 정규리그 1,346경기 통산 33,643득점을 기록, 리그 역사상 3번째로 가장 많은 득점을 성공시키는 등 코비는 당대를 대표하던 스코어러였다. 마찬가지 여러 일화에서도 프로로서 그가 투철한 직업윤리 의식을 갖췄는지 역시 잘 드러난다. 美 현지에선 코비의 오프시즌 워크아웃을 666 프로그램이라 부른다. 이 명칭의 유래는 코비가 오프시즌 2시간의 트랙 운동과 2시간의 농구 기술 훈련 그리고 각각 1시간씩 하체와 상체 강화훈련을 진행해온 것에서 따왔다. 하루 6시간 일주일에 6일씩 6달 동안 이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를 666 프로그램이라 부르고 있다.

이와 함께 국가대표팀 일화에선 그가 지독한 승부욕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 참가한 코비는 케빈 듀란트와 카멜로 앤써니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을 잘 아우르는 리더십으로 조국에 금메달을 안겼다. 美 대표팀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코비는 매일 아침 공식 훈련을 시작하기에 앞서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웨이트트레이닝을 소화하는 등 후배들의 기량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매일 아침 7시부터 11시까지 개인 훈련을 소화하는 등 농구를 향한 코비의 열정은 마이크 슈셉스키 감독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당시 34살의 나이로 올림픽에 참가한 코비는 트레이닝 캠프 참가 전부터 개인 트레이너를 따로 고용해 최상의 컨디션 유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등 지독한 승부욕의 화신이었다. 

때로는 다른 선수들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가르침을 청하는 등 코비가 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 무엇도 아닌 지독한 승부욕이었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실제 코비의 승부욕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다. USA 투데이의 보도에 따르면 코비는 12살이 되던 해 농구캠프에 참가, 그날 경기에서 단 1개의 슛조차 시도하지 못하고 무득점에 그친 일이 있었다. 이때부터 코비는 마이클 조던의 고등학교 시절 영상을 보면서 플레이를 연구하기 시작하는 등 이날의 좌절감을 다시는 맛보지 않기 위해 맹훈련에 돌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美 경제지 중 하나인 웰시 고릴라도 코비의 성공에서 배울 수 있는 5가지 교훈 중 하나로, “도전을 겁내지 않고 이를 뛰어넘기 위해 극한의 노력을 기울였던 코비의 지독한 승부욕”을 꼽았다.

하지만 이 지독한 승부욕이 코비에게 있어선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코비에 대한 또 다른 평가로는 욕심쟁이 난사꾼이란 표현이 있다. 평소 농구선수로서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하기로 유명한 코비는 은퇴 직전까지 플레이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며 때로는 팀의 경기력에 악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실제 코비는 은퇴를 선언한 2015-2016시즌도 평균 28.2분을 뛰며 16.9개 야투를 시도, 성장이 필요한 팀 내 후배들을 제치고 가장 많이 공격을 시도하는 등 이른바 ‘니갱망’의 표본이 되기도 했다. 여기에 전성기 시절 동료를 살리는 플레이보단 자신의 득점을 먼저 챙기는 이기적인 성향의 플레이 스타일도 코비에 대한 비판 여론이 형성된 또 다른 이유.

이처럼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자 다른 이미지의 선수로 회자 되는 코비 브라이언트가 과연 20년이란 시간 동안 어떤 커리어를 쌓아왔는지 줌 인 NBA를 통해 농구선수, 코비 브라이언트의 커리어를 조명해보는 시간을 가져봤다.



▲1996 NBA 신인드래프트 전체 13순위 코비 브라이언트, 그 전설의 시작!

코비 브라이언트는 1978년 8월 23일 前 NBA 선수 조 브라이언트와 파멜라 콕스 브라이언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코비는 아버지 조 브라이언트가 1984년 휴스턴을 끝으로, NBA를 떠나 이탈리아로 건너가 선수 생활을 지속하면서 유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당시 코비의 나이는 6살이었다. 코비가 이탈리아의 언어·문화에 익숙하고, AC 밀란의 열렬한 팬이 된 것도 바로 이 때문. 코비는 AC 밀란의 유소년 팀에 가입해 축구를 시작했고, 이때부터 AC 밀란의 팬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들의 우려와 달리 코비는 이탈리아 생활에 비교적 빠르게 적응했다. 코비 가족은 1984년부터 아버지가 선수은퇴를 선언한 1991년까지 이탈리아에서 생활했다.

어려서부터 에너지가 넘쳤던 코비는 3살 때부터 농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 어린 시절 축구선수와 농구선수의 길을 꿈꿔왔다. 코비가 레이커스의 팬이 된 것은 그의 할아버지 영향이 컸다. 코비의 할아버지는 코비 가족이 유럽에서 생활하는 동안 NBA 비디오를 녹화해 이탈리아로 보냈고, 대부분 경기가 레이커스의 경기였다. 당시 레이커스는 매직 존슨이 팀을 이끌며 쇼타임 레이커스로 명성이 자자했다. 레이커스는 래리 버드가 이끈 보스턴 셀틱스와 라이벌 열전을 써 내려가며 NBA 인기가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이런 이들의 화려한 플레이가 어린 코비의 기억 속에도 각인, 이때부터 코비와 레이커스의 인연이 시작됐다.

1991년 미국으로 돌아온 코비는 본격적으로 농구선수의 길을 걸어갔고, 로워 메리언 고등학교 시절, 그 두각을 나타내며 많은 주목을 받았다. 로웨 메리언 고등학교는 코비가 입학했을 당시 4승 20패의 성적을 기록하는 데 그치는 등 약체 중의 약체였다. 그러나 2학년이 된 코비가 팀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으며 승승장구를 거듭하기 시작, 펜실베이니아 주를 대표하는 팀으로 거듭났다. 코비는 당시 평균 31.1득점 10.4리바운드 5.2어시스트를 올리는 등 펜실베이니아 올해의 선수로 선정됐다. 코비는 팀 사정상 포인트가드부터 센터까지 5개의 포지션을 모두 소화하는 등 두각을 드러냈고, 듀크 대학과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 등 미국 명문 대학의 리쿠르팅 리스트 최상단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코비는 애초부터 대학 진학보단 프로 진출을 염두하고 있었다. 1995년 신인드래프트에서 고등학생인 케빈 가넷이 1라운드에 지명되는 것을 보고 본격적으로 NBA 진출을 꿈꾸기 시작했다. 여기에 1995년 아디다스 ABCD 농구캠프에서 MVP를 수상하는 등 고교 최고의 선수가 된 것도 코비가 프로 직행을 결심한 또 다른 계기가 됐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SAT에서 총점 1,080점을 기록하는 등 자신이 원하는 모든 대학에 갈 수 있었지만 코비의 선택은 여전히 프로 직행이었다. 결국, 코비는 1996년 여름 NBA 신인드래프트 개막을 앞두고 드래프트 참가를 발표, 코비의 발표는 여러 언론 매체에 실려 급격히 전국으로 퍼지는 등 시작부터 많은 관심을 끌었다.(*가넷은 1995 신인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5순위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에 지명됐다) 

코비에게 관심을 보인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와 함께 LA 레이커스였다. 이미 필라델피아는 일찍이 지역 출신인 코비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예의주시했다. 필라델피아는 코비를 팀으로 불러 제리 스텍하우스와 1대1 대결을 주선하는 등 관심을 표했다. 하지만 당시 1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던 필라델피아의 선택은 앨런 아이버슨이었다. 조지타운 대학 출신의 아이버슨은 대학 시절 폭발적인 득점력을 선보이는 등 포인트가드 포지션 보강이 필요했던 필라델피아에 필요한 선수였다. 마찬가지 레이커스도 코비와 워크아웃을 진행하며 래리 드류와 마이클 쿠퍼, 그리고 제리 웨스트 단장까지 참여하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웨스트 단장은 코비와 워크아웃을 진행한 이후 “코비는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재능을 갖추고 있다”는 말을 전하는 등 만족감을 드러냈다.

당시 레이커스는 샤킬 오닐의 영입을 위해 샐러리캡 절감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블라디 디박의 트레이드를 알아봤다. 그런 와중 샬럿이 디박 영입에 관심을 가졌고 드래프트 상위 지명권을 원했던 레이커스는 샬럿이 보유하고 있던 전체 13순위 지명권을 받아오며 트레이드를 마무리했다. 레이커스는 드래프트 개막 전까지 지명리스트를 샬럿에게 철저히 숨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샬럿은 13순위 지명권으로 코비 지명은 생각지도 않았기에 지명을 목전에 두고, 레이커스가 코비의 이름을 부른 것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는 후문. 그 결과 코비는 리그 역사상 6번째로 고교에서 프로로 직행한 선수이자 가드로는 처음으로 고교에서 프로로 직행한 선수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다만 코비의 레이커스 입성은 곧바로 이뤄지지 않았다. 디박이 레이커스의 결정에 반발, 샬럿으로 가지 않고 은퇴를 선언하겠다 협박하는 등 샬럿과 레이커스의 트레이드 합의는 7월이 돼서야 확정됐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자신이 어릴 적부터 동경했던 레이커스에 입성했지만 코비가 처음부터 레이커스 구단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은 건 아니었다. 데뷔 시즌 코비는 정규리그 71경기에서 평균 15.5분 7.6득점(FG 41.7%)을 기록하는 등 벤치를 지킨 시간이 더 많았다. 당시 레이커스는 코비가 아닌 에디 존스와 닉 반 엑셀을 중용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코비는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며 플레잉 타임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코비가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올스타 휴식기였다. 1997 올스타 전야제 덩크 콘테스트에 참가한 코비는 18살의 나이로 최연소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고, 기세를 몰아 후반기 자신의 입지를 굳혀가기 시작했다. 샤킬 오닐은 정규시즌 종료 후 후반기 코비에 대해 “코비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성장했다. 이렇게 성장이 빠른 선수는 처음 봤다”는 말로 만족감을 드러냈다.

2번째 시즌에도 코비는 선발이 아닌 벤치 멤버로 활약했다. 하지만 데뷔 시즌 활약으로 구단의 신뢰를 얻은 코비는 정규리그 79경기에서 평균 26.1분 15.4득점(FG 42.8%) 3.1리바운드 2.5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팀 내에서 비중이 급격히 늘어났다. 코비는 1997-1998시즌 올해의 식스맨상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여기에 1996-1997시즌 개막을 앞두고 아디다스와 신발 계약을 맺는 등 경기 외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했던 코비는 팬 투표를 통해 1998 올스타전 베스트 5에도 선정, 리그 역사상 최연소로 스타팅에 이름을 올린 선수로 기록된다. 레이커스는 1998-1999시즌을 앞두고, 에디 존스와 닉 반 엑셀을 팀에서 내보내며 코비를 중용했다. 단축 시즌으로 치러진 당해 시즌, 코비는 정규리그 50경기 평균 37.9분 19.9득점(FG 46.5%) 5.3리바운드 3.8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선발로 확고히 입지를 다졌다. 이때 레이커스는 잠재능력과 스타성을 모두 증명한 코비와 6년간 7,000만 달러에 연장 계약을 체결한다. 

사실상 코비에게 있어 데뷔 후 처음 3시즌은 리그 적응을 위한 과도기였다. 코비는 정규리그와 함께 플레이오프에서도 그 입지를 꾸준히 넓혀갔다. 코비는 데뷔 시즌 플레이오프 9경기에서 평균 14.8분 출장을 기록했다. 코비는 세미파이널 유타 재즈와 경기에서 4쿼터 종료를 앞두고, 결승 2득점을 올리는 등 강심장을 자랑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선발로 중용된 1998-1999시즌도 8경기에서 평균 39.6분 출장 19.8득점(FG 43%) 6.9리바운드 4.6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꾸준히 플레이오프 무대를 경험했다. 쓰리핏의 시작인 1999-2000시즌을 앞두고 리그 적응기를 마친 코비를 두고 사람들은 코비가 마이클 조던과 매직 존슨에 비견되는 슈퍼스타로 성장할 것이라 기대감을 드러내는 등 코비는 그렇게 새로운 역사 창조를 앞두고 예열을 끝마쳤다.             



▲필 잭슨과의 만남, 쓰리핏 레이커스 왕조 건설!

1999년 필 잭슨의 레이커스 감독 부임은 코비의 농구 인생에 전환기나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마이클 조던과 함께 6번의 파이널 우승을 달성, 시카고 왕조 건설의 주역이 됐던 잭슨은 1998년 조던의 은퇴와 동시에 스스로 시카고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계약 기간이 만료된 잭슨은 시카고와 재계약을 포기하고 야인으로 돌아갔다. 잭슨이 레이커스의 제안을 받아들인 결정적 이유는 바로 샤킬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 원투 펀치의 재능과 우승 가능성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당시 레이커스는 잭슨의 부임과 함께 시카고 왕조 건설의 또 다른 주역이던 론 하퍼와 호레이스 그랜트가 함께 레이커스로 이적하는 등 오닐·브라이언트 듀오를 중심으로 탄탄한 전력을 자랑했다. 잭슨은 시카고 왕조 건설의 기반이 됐던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레이커스에 이식, 또 한 번의 3연패를 이룩하며 리그 최고 명장이란 명성을 그대로 이어갔다.

잭슨의 지도를 받기 시작한 코비는 1999-2000시즌 정규리그 66경기 평균 38.2분 22.5득점(FG 46.8%) 6.3리바운드 4.9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급격한 성장세를 보여줬다. 코비는 정규리그 개막을 앞두고 프리시즌 워싱턴과의 경기에서 손에 부상을 입는 바람에 시즌 초반을 결장했다. 하지만 이후 코트에 돌아와선 오닐과 함께 팀 득점을 책임지는 등 득점과 어시스트 공격 전반적인 부분에 모두 관여했다. 특히 코비의 성장세가 두드러진 부분은 다름 아닌 수비였다. 코비는 1999-2000시즌부터 상대 스코어러의 수비를 전담하는 등 수비에서도 공헌도가 높았다. 그 결과 코비는 1999-2000시즌 생애 첫 올-NBA 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선정, 리그 역사상 최연소 수상자에 등극했다. 이때부터 은퇴 전까지 총 12번의 NBA 올 디펜시브 팀에 선정되는 등 코비는 그저 공격만 잘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코비와 오닐의 원투 펀치를 앞세운 레이커스는 1999-2000시즌 정규리그 67승 15패를 기록, 리그 전체 승률 1위를 기록했다. 본 무대인 플레이오프에서도 레이커스는 거침이 없었다. 새크라멘토 킹스와 피닉스 선즈,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져스를 차례로 꺾고, 서부 컨퍼런스를 평정한 레이커스는 파이널에서 인디애나 페이서스마저 물리치고 1988년 이후 처음으로 파이널 우승에 성공했다. 코비는 고비 때마다 클러치 득점을 성공시키며 팀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파이널 2번째 경기에서 제일런 로즈의 발을 밟고 발목을 다친 코비는 경기에 돌아오지 못했고, 3차전마저 결장했다. 하지만 돌아온 4차전 후반전에만 22득점을 몰아치는 등 해결사를 자처한 코비는 오닐이 파울 아웃으로 빠진 그 빈자리를 잘 메우면서 팀 승리를 이끌었다. 6차전에서도 극적인 결승 득점을 성공, 120-118 극적인 승리를 이끈 코비는 데뷔 후 4년 만에 첫 파이널 우승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2000-2001시즌도 레이커스는 코비·오닐의 원투 펀치를 앞세워 리그를 평정, 파이널 2연패에 성공했다. 2000-2001시즌은 레이커스에게 있어 2연패를 달성한 기쁨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코비와 오닐의 갈등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며 앞으로 다가올 불화의 시작을 암시한 시즌이기도 했다. 1999-2000시즌 생애 첫 파이널 우승을 달성한 코비는 자신이 좀 더 많은 역할을 맡길 원했고, 이로 인해 오닐과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 이에 레이커스는 조직력에 문제를 드러내며 정규리그 56승 26패를 기록, 전년보다 성적이 크게 떨어지면서 우승 전선에 위기감이란 단어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 들어선 파이널 2연패에 성공하기까지 단 1패만을 허용, 건재함을 보여줬다. 포틀랜드, 새크라멘토, 샌안토니오를 모두 스윕으로 물리친 레이커스는 파이널 1차전을 필라델피아에게 내주며 연승이 중단됐지만 이후 4연승에 성공, 파이널 2연패를 달성했다.

쓰리핏 달성에 성공한 2001-2002시즌도 레이커스는 정규리그는 58승 24패를 기록하는 등 다소 부진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 들어선 언제 그랬냐는 듯 거짓말처럼 경기력을 회복하며 왕조 건설에 성공했다. 레이커스는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새크라멘토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치른 것을 제외하곤 매 시리즈 상대를 가볍게 제압, 3연패에 성공했다. 심지어 파이널에서 뉴저지 네츠를 4-0 스윕으로 물리치고 왕조 건설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평가받는 쓰리핏을 달성했다. 코비는 23살의 나이로 쓰리핏에 성공, 리그 역사상 최연소로 리그 3연패에 성공한 선수에 그 이름을 올렸다. 특히 코비는 매 경기 4쿼터를 포함해 승부처나 고비 때마다 해결사의 면모를 선보이며 어느새 그의 이름 앞에는 클러치 플레이어란 수식어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레이커스가 코비와 오닐의 불화란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안고 있었음에도 쓰리핏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들의 불화가 코트 위까지 이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갈등은 어디까지나 코트 밖에서 일이었다. 코비는 시간이 지날수록 공격에서 득점 적립에 더 많은 욕심을 냈다. 하지만 어시스트가 필요할 땐 오닐의 득점을 돕는 등 공사 구분을 확실히 했다. 마찬가지 오닐도 코비의 기량이 계속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는 등 코비가 팀의 공격 1옵션이 되기를 갈망하는 것에 대해 코트 밖에선 직접적인 불만을 표하기도 했지만 코트 위에선 그 누구보다 코비의 든든한 조력자를 자처하며 레이커스가 파이널 3연패로, 1980년대 이후 다시 한번 왕조를 건설하는 데 일조했다. 오닐은 3연패를 달성하며 1번의 정규리그 MVP와 3번의 파이널 모두 파이널 MVP를 수상하는 등 자타가 공인하는 리그 최고의 선수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레이커스는 2002-2003시즌 쓰리핏의 후유증을 톡톡히 겪어야 했다. 사람들이 파이널 3연패를 왕조 건설의 이유로 삼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선수들의 체력이다. NBA는 정규리그만 82경기에 이르는 등 일정이 타 리그와 비교했을 때 비교적 빡빡한 리그다. 여기에 플레이오프와 파이널 일정까지 합한다면 그 수는 100경기 가까이 이르게 된다. 주축 선수들의 경우, 오프시즌 국제대회까지 참가해야 하는 경우까지 종종 있다. 아무리 체력이 강한 선수라고 한들 몸이 축날 수밖에 없는 상황. 무엇보다 떨어진 체력은 선수들의 부상을 유발하기도 한다. 실제 지난 시즌 골든 스테이트도 파이널 3연패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클레이 탐슨과 케빈 듀란트가 부상으로 쓰러져 파이널 3연패의 위업을 달성하지 못했다.

마찬가지 레이커스도 2002-2003시즌 오닐이 시즌 초반 발가락 부상으로 수술을 받으며 첫 12경기를 결장하는 등 선수단 전체가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렸다. 오닐은 이전부터 발가락이 좋지 못했지만 3연패 달성을 위해 수술을 미뤄왔다. 2002년 여름 파이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술을 받은 오닐은 생각보다 부상 정도가 심해 또 한 차례 수술을 받는 등 코트로 돌아오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다. 오닐의 컨디션 저하로 팀 내 비중이 늘어난 코비는 정규리그 82경기 평균 41.5분 30득점(FG 45.1%) 6.9리바운드 5.9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정규리그 MVP 수상 경쟁을 펼쳤다. 하지만 레이커스는 오닐의 경기력 저하를 쉽사리 극복하지 못했다. 그 결과 레이커스는 정규리그에서 50승 32패로 서부 컨퍼런스 5번 시드를 기록했다. 이어 플레이오프에선 세미파이널 샌안토니오에 패해 리그 4연패라는 새로운 위업 달성에 실패했다.

이에 레이커스는 2003-2004시즌 다시 한번 우승에 도전하기 위해서 선수단에 대대적인 변화를 단행했다. 바로 국내 팬들에게 친숙한 전당포 라인업이 결성된 때가 이때다. 레이커스는 시즌 개막을 앞두고 칼 말론과 게리 페이튼이 팀에 합류하며 우승 도전에 나섰다. 하지만 레이커스는 2003-2004시즌 코트 밖 이슈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2003년 여름 터진 코비의 섹스 스캔들도 그중 하나였다. 2003년 여름 덴버에서 백인 여성이 코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신고하며 사건이 시작됐다. 이에 코비는 모든 혐의를 전면 부인하며 합의에 이은 관계라고 주장했다. 소송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코비가 불륜을 저지른 건 어디까지나 명백한 기정사실이었고, 이는 코비의 이미지 손상으로 이어졌다. 당시 코비는 재판 참석 등으로 인해 정규리그 65경기 출장에 그쳤다. 경기에 나서서도 효율성이 떨어지며 문제를 일으켰다.

오닐과 코비의 갈등도 심해져 갔다. 두 사람은 EPSN 등 공개 방송에 나서 서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등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져 갔다. 특히 오닐의 경우, 시즌 개막을 앞두고 레이커스와 연장 계약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금액과 관련해 구단과 이견을 보였다. 그런 와중 제리 버스 구단주와 언성을 높이며 말싸움을 벌이는 등 극심한 갈등을 겪기도 했다. 오닐은 당시 연 3,000만 달러 규모의 연장 계약을 원했다. 하지만 레이커스의 생각은 오닐과 전혀 달라 갈등을 야기했다. 이에 코비는 프리시즌 ESPN과 가진 인터뷰에서 “오닐은 형편없는 리더다. 그는 경기가 아닌 오로지 돈만을 최고 관심사로 삼고 있다”는 말로 오닐을 자극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잭슨 감독조차 통제가 불가할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다. 그 결과 잭슨 감독의 연장 계약 논의까지 뒤로 미뤄지는 등 레이커스의 코트 밖 이슈는 한 시즌 내내 떠들썩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레이커스의 이런 코트 밖 이슈가 코트 위 경기력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게리 페이튼-코비 브라이언트-칼 말론-샤킬 오닐의 라인업을 내세운 레이커스는 정규리그 56승 26패로 서부 컨퍼런스 2번 시드를 기록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휴스턴-샌안토니오-미네소타를 차례대로 물리치고 서부를 제패한 레이커스는 파이널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 격돌한다. 당시 사람들은 두 팀의 파이널을 예상하며 레이커스의 절대적인 우세를 점쳤다. 그도 그럴 것이 디트로이트는 라시드 왈라스를 제외하곤 올스타 출신 플레이어가 없었다. 레이커스가 근래 3번의 파이널에서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상대를 압도했다는 것도 사람들이 레이커스의 우세를 점쳤던 또 다른 이유였다.

하지만 두 팀의 파이널은 예상과 달리 1차전을 디트로이트가 먼저 가져가는 등 디트로이트의 4-1 승리로 끝이 났다. 단단한 조직력의 수비를 앞세운 디트로이트는 코비와 오닐에겐 득점을 허용하는 대신 칼 말론과 게리 페이튼 등 다른 선수들의 득점을 틀어막았다. 코비도 파이널에서 평균 46.2분 22.6득점(FG 38.1%) 2.8리바운드 4.4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효율성은 엉망이었다. 디트로이트는 코비를 막기 위해 리차드 해밀턴과 테이션 프린스를 전담 수비수로 내세웠다. 오닐도 벤 왈라스·라시드 왈라스, 왈라스 듀오가 막으면서 그 파괴력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레이커스에 합류해 은퇴 전 마지막 우승을 노리던 말론과 페이튼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반대로 디트로이트는 1990년 이후 처음으로 우승에 성공, 이후부터 동부를 대표하는 강호로 거듭났다.(*페이튼은 2005-2006시즌 마이애미로 이적해 파이널 우승의 꿈을 이뤘다)



▲시련 옆에 또 시련, 홀로서기 시작한 코비 브라이언트!

2004년 여름은 코비에게 있어 커리어의 또 다른 전환기였다. 오닐이 팀을 떠나며 코비가 레이커스의 1옵션으로 거듭났기 때문. 2004 파이널이 막을 내린 직후 오닐은 미치 컵첵 단장과 언쟁을 벌이는 등 구단 수뇌부와 극심한 갈등을 빚기 시작, 결국 팀에 공개적으로 트레이드를 요청하기에 이른다. 컵첵 단장은 오닐과 더크 노비츠키의 스왑 딜을 추진했다. 하지만 평소 노비츠키를 격하게 아끼는 마크 큐반 구단주가 이를 수락할 리 만무했다. 뒤를 이어 마이애미가 오닐 영입에 관심을 표명했고, 더 이상의 선택권이 없었던 마이애미와 트레이드 논의를 시작했다. 그 결과 레이커스는 마이애미에 오닐을 내주고, 반대로 캐론 버틀러·라마 오돔·브라이언 그랜트 3명의 선수와 미래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 1장을 받아왔다.

팀을 떠난 건 오닐만이 아니었다. 레이커스는 2004 파이널 종료 후 이틀 뒤인 6월 19일(한국시간) 필 잭슨 감독과의 결별을 발표했다. 이미 잭슨과 레이커스의 이별은 일찍이 예고된 것이었다. ESPN의 보도에 따르면 잭슨은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 동안 레이커스와 연장 계약을 협의하면서 FA인 코비가 팀에 남는다면 자신이 팀을 떠날 것이라 엄포를 놓기도 했다는 후문. 실제 잭슨은 자서인 The Last Season에서 2003-2004시즌 당시 레이커스에서 있던 일화를 소개하며 코비와 갈등을 겪은 일도 함께 언급하기도 했다. 컵첵 단장으로선 팀의 중심인 코비를 포기하기 쉽지 않았고, 결국 잭슨과 이별, 코비를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당시 코비는 클리퍼스와 계약을 논의하고 있었다. 다만, 오닐과 잭슨이 팀을 떠났다는 소식에 코비는 즉각 클리퍼스와 진행하던 협상을 중단하고 레이커스로 돌아왔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1옵션의 자리에 오른 코비는 2004-2005시즌 정규리그 66경기에서 평균 40.8분 27.6득점(FG 43.3%) 5.9리바운드 6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다만, 팀 동료들의 지원이 미흡했던 탓에 레이커스는 34승 48패를 기록하는 데 그치며 10년 만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실패에 대한 책임은 모두 코비에게로 그 비난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코비의 이기적인 플레이와 함께 리더십에 비판을 가했다. 평소 내성적이고 독불장군이었던 코비는 팀원들과 소통에 소극적이었다. 자신만이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코비는 팀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자신이 최고의 선수가 되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다. 다만 결과적으로 이는 코비 자신에게도 독이 됐다.

이에 레이커스는 단 한 시즌 만에 잭슨 감독을 다시 불러들이는 초강수를 뒀다. 잭슨이 팀으로 다시 들어오며 안정감을 찾은 코비는 2005-2006시즌 정규리그 80경기에서 평균 41분 출장 35.4득점(FG 45%) 5.3리바운드 4.5어시스트를 기록, 생애 첫 득점왕 등극과 함께 정규리그 MVP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리는 등 기량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코비가 81득점을 올리며 리그 역사상 단일 경기 최다 득점 2위에 오른 것도 이때다. 역대 단일경기 최다 득점 1위 기록은 1962년 윌트 채임벌린이 올린 100점이다. 코비는 2006년 1월 23일 토론토와 경기에서 후반에만 3점 6개(3P 54.5%)를 포함해 55득점(FG 64.3%)을 올리는 등 이날 레이커스가 올린 122득점 중 득점의 66%를 책임지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잭슨 감독은 코비를 중심으로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재편했고, 그 결과 코비는 공격의 중심이 되면서 매서운 득점력을 뽐냈다. 실제 코비는 1월 한 달에만 평균 43.4득점(FG 47%)을 기록하는 등 레이커스 프랜차이즈의 득점 기록을 바꿔갔다. 코비는 2005-2006시즌 27차례의 +40득점을 기록하며 이 부문 1위로 올라섰다. 이와 함께 통산 2,832득점을 기록하며 단일 시즌 최다 득점 기록까지 갈아치우는 등 레이커스 프랜차이즈에 새로운 역사를 썼다. 평균 35.4득점으로 득점왕에 오른 것 역시 +35득점으로 득점왕에 오른 리그 역사상 5번째 선수에 이름을 올렸다. 레이커스도 코비의 활약에 힘입어 정규리그 45승 37패, 서부 컨퍼런스 7번 시드로 플레이오프 무대에 복귀하는 등 코비와 잭슨의 재회, 그 첫 번째 시즌은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물이 오른 것은 득점력만이 아니었다. 코비는 2005-2006시즌 리더로서도 한층 성장한 모습을 보이며 호평을 받았다. 전과 달리 선수들과 소통에도 적극 나서는 것은 물론, 리더십으로 정평이 나 있는 유명인사들을 찾아 가르침을 청하기도 했다. 비즈니스 인사이더의 보도에 따르면 코비가 리더십을 기르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이는 스타워즈 OST 작곡가, 존 윌리엄스였다. 코비는 윌리엄스가 오케스트라를 완벽히 지휘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고, 그에게 많은 조언을 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코비와 잭슨의 재회가 레이커스에게 완벽한 해답이 된 건 아니었다. 2006-2007시즌을 앞두고, 코비는 등 번호를 8번에서 24번으로 변경했다. 고등학교 시절 코비는 33번을 등 번호로 썼다. 하지만 레이커스에서 33번은 카림 압둘 자바가 썼던 번호로 영구결번이 된 상태였다. 이에 코비는 데뷔 시즌 등 번호로 24번을 원하기도 했지만 이탈리아에서 농구를 하던 기억과 1996 신인드래프트를 앞두고 참가한 아디다스 ABCD 농구캠프에서 8번을 달고 MVP를 수상한 적이 있어 8번을 등 번호로 선택했다는 후문. 코비가 등 번호를 바꾼 이유는 초심으로 돌아가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의미에서 데뷔 시즌 원했던 24번을 등 번호로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6-2007시즌 코비는 정규리그 77경기에서 평균 40.8분 31.6득점(FG 46.3%) 5.7리바운드 5.4어시스트를 기록, 2시즌 연속 득점왕에 올랐다. 레이커스도 코비의 활약에 힘입어 정규리그 42승 40패로 7번 시드에 올라 잭슨 감독 복귀 후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문제는 플레이오프에서 2시즌 연속 1라운드에서 탈락, 코비 원맨 팀의 한계를 절감해야 했다는 점이다. 당시 레이커스는 코비와 라마 오돔을 제외하곤 롤 플레이어급 기량의 선수들이 주전으로 뛰면서 팀 전력구성에 한계를 드러내는 등 코비가 이끄는 레이커스가 우승에 도전하기 위해선 변화가 불가피했다.

2부에서 계속.

*스크롤 압박에도 불구하고,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점프볼 DB, NBA 아시아, 나이키 제공
#기록참조-NBA.com, BASKETBALL REFERENCE
  2019-08-06   양준민(yang126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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