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하얀 도시에 떠다니는 달콤한 음표 [김진의 나 혼자 간다]

김진 | 여행작가 2019. 7. 31.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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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낮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노래가 흘러나오고 밤이면 실내악 연주회가 열리는 미라벨 궁전. 정면에 보이는 호엔잘츠부르크 성에 오르면 잘츠부르크와 알프스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모차르트가 태어나 자란 곳이며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된 잘츠부르크 산 위엔 하얀 눈이, 산속엔 하얀 소금이 있고, 회색 지붕을 빼곤 온 마을이 하얗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 다시 감동하게 됐고 인간미 넘치는 사람들을 만나 좋았다

잘츠부르크에 도착하니 알프스의 맑은 공기가 여행자를 반겼다. 기차역에 서서 멀리 바라보니 하얀 눈을 머리에 인 뾰족한 산이 눈에 들어왔다. 싱그러웠다. 봄과 여름의 중간이었다.

알프스가 이어지는 오스트리아 티롤과 잘츠부르크 지방은 겨울이면 동계 스포츠가 성행하는 곳이다. 유럽의 스키어들은 겨울이면 좋은 설질을 찾아 여기까지 온다. 지금부터 8월 말까지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 열린다. 독일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과 함께 유럽 3대 음악 축제로 손꼽히는 이 축제는 1920년에 시작했으니 어느덧 100살이 되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듣고 있는 지금, 잘츠부르크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 추억의 그 노래 울려퍼지던 공간에서

미라벨 궁전 연주회

잘츠부르크. 모차르트가 태어나 자란 곳이면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다. 한 명의 음악가와 한 편의 영화로 인해 인구 15만명의 작은 도시가 전 세계적으로 뚜렷한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은 부러운 일이다. 아무리 다른 수식어를 찾으려고 해도, 잘츠부르크가 음악의 도시라는 점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50년이 넘어 고전영화가 된 <사운드 오브 뮤직>을 거의 30년 만에 다시 찾아 보았다.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잘츠부르크 풍경을 보며 변하지 않는 것의 아름다움을 알았다.

‘도레미 송’을 찍은 미라벨 궁전. 1606년 볼프 디트리히 대주교가 사랑하는 여인 살로메를 위해 지은 궁전 안에선 매일 밤 음악회가 열린다. 어린 모차르트도 대리석 홀에서 대주교를 위해 연주를 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모차르트 음악회는 금세 매진됐고 이튿날 현악 4중주를 예약했다. 현란한 연주에 사람들은 앙코르를 외쳤다. 숙소가 근처라서 아침저녁으로 미라벨 정원을 오갔다.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있으면 살랑거리는 바람에 기분이 좋아졌다. 장미정원을 상상하는 지금도 달콤한 향기가 피어 오르는 것 같다.

잘츠부르크는 잘차흐강을 중심으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뉜다. 사람들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 걷다 보면 대성당과 모차르트 생가가 있는 구시가지에 다다르게 된다. 게트라이데(Getreide)에는 아름다운 수제 간판들이 눈길을 끈다. 건물 위쪽에 거리로 향해 툭 튀어나온 상태로 달려 있는데 모양만 봐도 대강 상점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문맹률이 높았던 시절 가게에서 파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데서 유래했다. 빵집은 빵, 카페는 커피잔, 안경점은 안경, 시계방은 시계 그림의 간판이 달렸다. 독일어 문맹인 나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폰트와 글자 크기를 정해놓은 청계천 거리보다 개성 있고 아름다웠다. 간판 디자인을 유심히 보는 편인데, 주인의 운영 방침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상점이 다닥다닥 붙어 활처럼 이어지는 쇼핑거리에서 상업적인 의도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당신의 경험에 기꺼이 돈을 지불하겠소?’라고 떠보는 것 같았다.

■ 하얀 도시를 보았니?

호엔 잘츠부르크

노란색의 모차르트 생가가 바로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하얀 리넨을 덮어놓은 테이블 몇 개가 광장 쪽으로 나와 있었다. 호엔잘츠부르크 성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며 마신 맥주 한 잔은 말할 것도 없지만, 거리에 앉아 모차르트 집을 바라보며 오스트리아 스타일의 돈가스인 슈니첼을 먹는 것도 근사했다. 레지덴츠 광장에서는 말이 관광마차를 끌었고 다가닥다가닥 말발굽 소리에 맞춰 딸랑딸랑 방울 소리가 났다. 영화가 떠올랐다. 천둥소리에 놀란 아이들을 달래며 마리아가 부르던 노래, ‘마이 페이보릿 싱’(My favorite things) 가사는 이렇다.

“크림색의 조랑말과 바삭바삭한 애플파이(Cream colored ponies and crisp apple strudels) 초인종과 방울, 슈니첼과 국수(Doorbells and sleigh bells and schnitzel with noodles)”

백년설 말고도 잘츠부르크가 가진 또 다른 하얀 보석은 바로 소금이다. 잘츠부르크 이름을 풀이하면 ‘소금(salz)의 성(burg)’인데, 잘차흐(Salzach)강 인근 산에서 질 좋은 암염이 많이 나 이런 이름이 붙었다. 잘츠부르크산 암염을 곱게 갈아 기념품으로 파는 곳은 흔하다. 기념품 가게에서 하얀 소금 몇 봉지를 샀다. 산 위에는 하얀 눈이, 산 속에는 하얀 소금이 있고, 회색 지붕을 빼곤 온 마을이 하얗다. 체코 프라하가 붉은색, 인도 조드푸르가 파란색으로 기억되듯이 잘츠부르크를 떠올릴 때면 자연스럽게 하얀색이 연상되는 이유다.

아, 에델바이스! 에델바이스는 꽃이 별처럼 생겼고 벨벳 같은 하얀 털로 덮여 있다. 그 촉감이 궁금했지만 실제로 보지는 못했다. 고산식물이라 알프스에는 흔하지만 시내에서는 좀처럼 볼 수가 없다.

에델바이스는 노래풍 때문에 오스트리아 민요로 오해하지만 <사운드 오브 뮤직>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다. 영화 덕분에 오스트리아의 국화를 누구나 알게 된 점조차 부럽다. 에델바이스. 가사를 읽고 흥얼거리지 않을 사람 있을까?

“Edelweiss Edelweiss Every morning you greet me Small and white Clean and bright You look happy to meet me(한국어 가사: 에델바이스 에델바이스 아침이슬에 젖어 귀여운 미소로 나를 반기어주네)”

이 노래가 나온 장면은 내가 꼽는 베스트다. 망명을 해야 하는 폰 트랩 대령이 나치와 오스트리아 사람들 앞에서 에델바이스를 부르는 장면이다. 무뚝뚝하고 권위적인 폰 트랩이 결국 목이 메어 울먹이고 노래를 잇지 못한다. 마리아가 나와 노래를 도와주고 오스트리아 청중이 훌쩍이면서 합창을 하는 장면은, 나치에 맞서는 부드러우면서도 가장 강력한 저항이었다.

■ 햇살 가득한 알프스 자락의 오후

할슈타트 근처 알프스의 산과 들판

도미토리에 머물렀다. 밤늦게 도착해 기절하듯 잠에 들었고 이튿날 룸메이트들의 부스럭대는 소리에 일어났다. 잘츠부르크는 하루 이틀 정도 묵는 작은 여행지다. 그것도 알프스 호수마을 할슈타트에 가기 위해 잘츠부르크에 들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녀들이 새벽에 일어난 이유도 할슈타트로 떠나는 아침 버스를 타기 위해서였고, 저녁에 숙소로 돌아오면 새로운 얼굴이 인사를 했다. 나만 5일을 머물렀고 매번 새로운 사람들이 스쳐갔다.

혼자 여행을 다니다 보면 많은 인연을 만나게 된다. 강도나 인종차별 같은 고약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좋은 기억이다. 미소가 예쁜 웨이터, 치즈가게 주인, 개를 앞에 앉혀놓고 구걸을 하던 거지도 한국에 돌아오면 새삼스레 그리워진다. 잘츠부르크가 기억에 남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 다시 감동하게 됐고, 15년 만에 묵은 도미토리에서 인간미 넘치는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대부분 유럽을 몇 주에서 몇 달간 유랑하는 사람들이었다. 나의 직업을 알고 나서 그들은 모두 똑같은 부탁을 했다. “우리 이야기를 써주세요. 신문 사볼게요.” 밤을 새워도 모자랄 만큼 넘치는 에피소드를 가진 그들은 모두가 진정한 여행자였다.

어느 날 눈곱을 가득 붙인 채 침대에 걸터앉아 ‘오늘은 뭐 할까?’ 궁리했다. 마침 방을 나가려던 귀여운 동생이 말을 붙였다. “언니, 계획 없어 보이시는데, 할슈타트 가실래요?” 장기 여행을 하던 그녀는 내가 계획이 있는지 아니면 할 게 하나도 없는 상태인지 훤히 눈에 보였던 것이다. 덜컥 그녀의 제안에 응했다. 타이어회사 독일 지점에 근무하는 30대 한국인 남성도 함께였다. 갓 대학을 졸업해 취업을 걱정하는 그녀와 회사생활 이후를 걱정하는 그와 여행 후 원고 마감을 걱정하는 나까지, 셋은 목적 하나만큼은 같았다. 나중 일 따윈 집어치우고 지금 할슈타트에서 맘껏 놀 것. 남들이 가지 않는 조용한 호숫가와 알프스의 작은 마을을 찾아 다녔다. 가는 데마다 감탄사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동화처럼 아름다운 공동묘지에서 한 여성을 만났다. 먼저 인사를 건넸더니 웃는 낯으로 답이 돌아왔다. “오늘 날씨 정말 좋죠? 저는 남편에게 인사하러 왔어요. 좋은 시간 보내요!” 그녀는 묘비 앞에 꽃 한 다발을 놓고 떠났다. 납작 복숭아를 한 입 무는데 어찌나 달콤하던지. 시간과 공간이 소중하게 느껴져 심호흡을 크게 했다.

▶필자 김진

기업 홍보팀에서 십여년 근무하다가 여행을 좋아해 여행작가가 되었다. 취미가 직업이 되면 안 좋다고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두루 누릴 수 있어서 여전히 행복하다. 여행과 글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는다. 』

김진 |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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