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 소녀상

심정택 2019. 7. 25.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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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2일 전남도청에서 전남 블루이코노미 경제비전 선포식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요요 미술기행-16] 지난 7월 12일 전남 무안 전남도청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전남블루이코노미 경제 비전 선포식에서 "전남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호국정신이 서린 곳입니다. 전남 주민들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불과 열두 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습니다"고 말했다. 다분히 지난해 10월 대법원이 일제의 강제징용 손해배상 청구 소송 피해자들(조선인) 손을 들어준 판결이 '국제법 상식'에 어긋나 피고인 미쓰비시중공업이 배상할 책임이 없다면서, 경제 보복 조치에 나선 일본 총리 아베 신조를 겨냥한 발언이다.

역사는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좌익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호남의 적극적인 지지로 15만표 차이로 신승했다. 이후 박정희는 영남과 호남을 분할 및 통치(divide&control)하는 정책을 구사했고 자신에게 선거 승리를 안겨줬던 호남을 희생양 삼았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 전후로 반일 데모가 끊이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반일이지만 실상은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에 대해 대학생을 비롯한 지식인층의 저류에 흐르고 있는 반감이다. 그때 박정희가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순신 장군 동상 /사진=연합
1966년 만들어진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조상건립위원회)는 그해 11월 이순신 장군 동상을 발주했다. 김세중 서울대 교수가 제작을 맡았다. 박정희는 김 교수 작업실에 두 번이나 들러 동상 제작 과정을 주의 깊게 관찰했고, 공사 대금을 직접 '희사'하는 열의를 보였다. 김세중 작가는 초대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낸 '장발'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 장발의 형은 박정희에게 권력을 내줘야 했던 제2공화국 장면 총리라는 사실이 또 다른 아이러니이다.

김세중의 주요 조각이 가톨릭 등 여러 모티브에 의존한 경우가 많았던 데 비해 충무공 동상은 한국적 전통에서 아이디어를 찾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양의 장군 동상은 주로 기마상인데 충무공 동상의 '우뚝 선 자세'는 조선 시대 능묘의 무관석에서 볼 수 있다. 갑옷이나 단단한 기둥 형태를 통해 조용하면서도 강인함과 자신감을 보여주는 충무공 상은 민족 영웅을 동양적으로 해석한 경우라는 평가다.

한편으로는 1967년 6월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 부정 의혹이 눈덩이처럼 커져 갔다. 박정희 정권은 선거 한 달 뒤 일명 동백림 사건을 확대 증폭해 이슈를 잠재우려고 했다. 전 세계를 휩쓴 유럽에서 일어난 6·8 운동은 이러한 국내 사정 때문에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학생 사회는 박정희가 전가의 보도로 빼드는 '빨갱이' 낙인을 피해 반일을 명분으로 내걸었다. 3·1절이나 8·15 광복절 전후로 여지없이 반정부 데모가 대도시를 휩쓸었다. 박정희는 반일에 부합하면서 반정부를 누를 다른 상징물이 필요했다. 이순신 장군 동상 제막식은 1968년 4월에 열렸다.

남산의 김구 동상 건립도 박정희가 주도해 1969년 8월 제막됐다. 당시 김구 아들 김신 주대만 대사는 부친의 동상을 광화문에 세울 것을 요구했으나 박정희가 남산으로 정했다.

동상은 박정희가 금일봉을 내놓는 등 각계에서 모금된 성금으로 만들어졌다. 제작은 김경승과 민복진이 맡았다. 김경승은 친일 예술인으로 분류된다. 이 또한 아이러니다. 박정희 휘호는 좌대 왼쪽에 새겨져 있다. '위국성충은 일월과 같이 천추만대에 기리 빛나리.' 동상 앞 광장 이름도 백범광장이 됐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은 세계적 수준의 도시에 오른 서울 광화문 자체의 풍경이 됐다. 박정희는 내부의 반일 감정을 외부로 표출하지 않고 내부에서 정지하면서 자신의 기반을 공고히 했다.

소녀상 /사진=매경DB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위안부를 상징하는 아이콘 된 '소녀상' 첫 작품은 2011년 12월 조각가 김운성·김서경 부부 공동 작업으로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세워졌다. 처음 구상할 때 소녀는 순한 표정으로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으나 제작을 하면서 작가들 감정이 이입되었다. 다소곳하게 놓여 있던 소녀의 손이 점점 주먹을 쥐게 되고, 맨발에 뒤꿈치를 든, 제대로 착지하지 못하는 아픔으로 표현됐다.

소녀가 입은 한복은 '조선' 상징, 어깨에 앉아 있는 새는 자유와 평화를, 맨발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험난했던 삶의 여정을 의미한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시민 모금을 통해 제작했다. 제막 전부터 일본 정부는 강력히 반발했다. 급기야 일본 총리는 2011년 12월 한일정상회담에서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였다. 소녀상은 미술사에 자주 등장하는 일반적 도상이나 작품 제작 과정, 형태, 세워진 시기와 놓인 장소에 따라 메시지는 확연히 달라진다.

2006년 서울 청계광장에 세워진 팝아트 작가인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와 코샤 반 브르군(Coosje Van Bruggen) 부부의 작품인 '스프링(Spring)', 일명 '골뱅이'는 작품 자체보다 인근의 이순신 장군상 등 작품군 맥락에서 벗어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역사적 반성은 동시대 위대한 예술가와 예술품을 낳는다.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oder·1944년~) 전 독일 총리가 '(정치인의) 한계의 지평을 확장해준다'고 했던 이는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1945년~)다. 슈뢰더와 동년배인 키퍼는 전후 독일에서 금기시된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적 소재를 과감히 끌어들여 장대한 스케일로 확장하여 현대 회화의 신화적 존재가 된 인물로 평가받는다.

일본은 국력에 걸맞게 유럽의 인상파 작품 등을 대량 보유한 미술 강국이다. 그러나 일본 사회 지도부를 중심으로 역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회개가 없다보니 전쟁과 식민 지배, 살육, 강제 동원 위안부 등 무거운 주제로 작업하는 예술가와 작품이 등장하지 않는 키치(kitsch) 만을 쫓는 무의식·무사유의 사회이기도 하다.

[심정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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