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인문학산책] 종교에는 벽이 없다
해인사 주지인 향적 스님이 종교 간의 대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책 ‘프랑스 수도원의 한국스님’을 냈다. 부제가 재미있다. ‘깨달음으로 종교의 벽을 넘다.’

그런데 향적 스님이 가사를 입은 채로 그 벽을 넘어간 것이다. 30년 전 그는 프랑스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에 가서 그들의 방식에 따라 그들과 함께 살며 수행하면서 종교의 벽이 없음을, 관세음보살과 성모 마리아가 둘이 아님을 보여준 것이다.
스님이 스님의 옷을 입고 베네딕토 수도원까지 찾아가서 일하고 기도하고, 일하고 기도하고, 일하고 굶고…. 책 속으로 들어가 보면 수도원에서 몸 고생, 마음고생 많이도 했다. 겨울엔 추워서 오리털 점퍼를 입고 자야 했고, 프랑스어를 가르쳐준 수사에겐 이런 말까지 들었다. “넌 왜 숙식비도 안 내면서 오랫동안 수도원에 머무느냐, 넌 보트 피플이냐?” 미사는 참석하는데 영세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사 중에 모두 먹고 마시는 빵도 포도주도 주지 않았다. 동양의 예의는 아니지만 지나놓고 보니 그 모든 경험이 길이었단다.
그 책에서 서늘하게 느꼈던 부분이 있다. 스님에게 그렇게 길을 열어주고 기꺼이 품이 되고 울타리가 돼 줬던 그 찬란했던 수도원을, 스님이 해인사 주지가 돼 찾아간다. 그러고는 빚을 갚는다. 가난한 유학생이었기에 한 푼의 빵 값도 보태지 못했던 시절에 조건 없이 받아주고, 정을 베풀어준 수도원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한 것이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것이어서 오히려 아름다운 인지상정이었다.
그런데 수도원이, 활기 넘쳤던 수도원이, 초원의 빛이고 꽃의 영광이었던 그 수도원은 간 곳이 없었단다. 기도시간이면 신부들과 수사들로 제단 양쪽이 꽉 찼었는데, 기도시간에도 휑하도록 빈, 그런 공간이 된 것이다. 동굴 속에서 홀로 수행하던 벽안의 수도사도 저세상으로 갔다 하고, 새와 대화를 나누던 수도사도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많은 분이 세상을 떠났고, 몇몇은 환속했다. 30년 만에 세상이 변하고, 생사가 갈리고, 수도원은 초라해졌다. 무상하다. ‘무상’이다!
살아보니 산 게 없다고, 지나온 세월은 정말 꿈과 다를 바 없다. 그때 그 청춘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었는데, 내 열정을 감당하지 못해 내가 나를 상처 내며 성장하던 그 시간은 너무나 확실해서 영원히 ‘나’를 따라다닐 줄 알았는데, 지나놓고 보니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남은 것은 추억 속의 그림자다. 그리고 보니 젊음도, 열정도, 사랑도, 업적도, ‘나’를 통과해가는 것일 뿐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내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을 붙들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이 ‘집착’ 아닌가.
한때 초원의 빛이고 꽃의 영광이었던 그것, 내 삶을 빛나게 했던 그것이 집착이 된 것이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그것,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잃어버린 그것을 놓지 못하면 과거에 발목이 잡혀서 과거가 ‘나’를 붙들고 내 인생을 하인 부리듯 부린다. 내가 놓지 못하는 그것이 ‘나’를 노예 삼아 휘두르는 것이다. 젊음이 그렇고, 힘이 그렇고, 관계가 그렇고, 기억력이 그렇고, 몸이 그렇고, 지나온 날들이 그렇다.
결국은 ‘나’인 줄 알았던 인생까지 잃게 만드는 무상의 힘에 대해 워즈워스는 이렇게 썼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그것이 돌아오지 않음을 서러워하지 마라! 그 속에 간직된 오묘한 힘을 찾을지니.” 무상에 간직된 오묘한 힘, 그대는 그것을 보았는지.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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