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멘 입단' 박규현, "인종차별을 '엄지 척'으로 바꿔놨어요" [GOAL 인터뷰]

정재은 2019. 7. 12.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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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닷컴, 브레멘] 정재은 기자 =

’열여덟’을 두고 “어리지 않은 나이”라고 말하고, 대중의 무거운 질타는 “기회”로 승화시킨다. 천진난만하고 발랄한 소년의 모습을 기대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에는 벌써 성숙함이 묻어난다. 11일 오후, 박규현(18)은 “이제 프로라는 생각으로 살아야 한다”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는 2시간 전 분데스리가 베르더 브레멘과 2군 임대(2년) 계약에 사인했다. 프로 무대에 세 차례 오르면 완전 이적도 가능하다.

이날 브레멘의 기온은 영상 17도,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해도 꽁꽁 숨었다. “4월에는 더웠는데...”라며 박규현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그가 회상한 4월의 브레멘은 화창했다. 맑은 날씨 속에서 박규현은 U-19와 2군 팀에서 모두 훈련을 소화했다. 그는 기존 선수들에 뒤지지 않는 기량을 자랑했고, 브레멘의 눈도장을 받았다. 이제는 브레멘 소속 선수가 됐다. “빨리 녹아들어야죠”라며 박규현은 웃는다.

이미 변화무쌍한 독일의 날씨에도 적응하는 중인 것 같다. 브레멘에서 새로운 출발을 앞둔 박규현의 이야기를 전한다.

GOAL: 방금 전 입단식을 진행했어요. 기분이 어때요?
“느낌이 좀 묘했어요. 어린 중앙 수비수로서 처음으로 분데스리가에 간 거잖아요. 그전에도 많은 일이 있었고요. 제가 다 짊어지고 여기까지 온 셈이죠. 저를 격려하고 응원해주신 분들께 보답을 하고, 기대에 부응을 해야 하는 게 제 일이에요. 부담이 되진 않아요. 어쨌든 제가 짊어져야 할 일이니까요.”

GOAL: 많은 일이 있었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판다컵 사건을 얘기하는 거겠죠?
“네, 맞아요. 사실 그때 걱정은 좀 됐어요. 좋은 계약을 앞두고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까요. 하지만 오히려 이게 제 인생에 있어서 터닝 포인트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누구든 한 번쯤 떨어질 때도 있고, 올라갈 때도 있잖아요. 매를 좀 맞았다고 생각이 들죠. 동시에 다시 저를 증명해 낼 기회라는 생각도 들고요.”

(박규현은 판다컵 사건 당시 인스타그램 계정을 지우고 다시 만들었는데, 아이디에 chance(기회)가 포함되어 있다. 이유를 물어보니 그 사건을 또 다른 기회로 삼아 발전하는 선수가 되겠다는 다짐이란다.)

GOAL: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질타를 받아서 힘들었을 것 같은데
“열아홉이면 저는 어리다고 보지 않아요. 유럽 축구만 봐도 벌써 17세에 데뷔하는 선수들도 있잖아요. 열여덟, 열아홉이면 솔직히 알 것 다 아는 나이라고 생각해요. 솔직히 어린 나이는 아니에요. 다만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른 거죠. 저는 상황을 잘 받아들이는 편이고요. 대한축구협회에서도 분명 제가 잘못은 어느 정도 했지만, 좋은 선수니까 이런 상황일수록 멘털을 잡고 빨리 일어서야 제가 더 커질 거라고 조언을 해줬어요. 감사하죠.”

GOAL: 독일에 입성한 센터백이 아닌 판다컵 논란으로 먼저 대중에 크게 알려졌어요. 그런 부분에서 좀 속상하진 않았어요?
“물론 속상했죠. 사실 굉장히 작은 대회였기도 했고요. 매를 맞은 거죠. 아, 그런데 제가 소름이 돋는 게 있어요. 제가 개인적으로 뭘 자꾸 적는 걸 좋아해요. 틈만 나면 하루 운동 일과도 짜보고, 인생 설계도 해봐요. 무슨 일 생기면 다 적고요. 인생의 목표도 적고, 1년 목표, 한 달 목표 다 적어요. 2019년 목표 중에 분데스리가 진출도 있었어요. 또 그런 것도 적었어요. 사소한 일에도 이슈가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요. 어떻게 보면 이 말도 현실이 된 거잖아요. 참 그때 소름 돋았어요. 그래서 메모하는 게 루틴이 됐어요.”

GOAL: 이른 질문이긴 한데, 그 메모장에 1군 승선 계획도 세워놨죠?
“그럼요. 입단한 지 1년 후에는 2군에서 선발 멤버로 설 거예요. 어린 나이에 말이죠.(웃음) 2년 차가 되면 1군에서 데뷔전을 치르고 싶어요. 그렇게 한 단계씩 올라가고 싶어요.”

GOAL: 4월에는 테스트를 보러온 선수였지만, 이제는 브레멘 선수로서 왔어요. 느낌이 어땠어요?
“확실히 달라요. 그때는 제가 보여줘야 하는 입장이었고, 지금도 맞긴 맞지만, 그땐 솔직히 너무 떨렸어요. 지금은 좀 마음 편하게 비행기 타고 왔어요. 내렸을 때는 한숨을 탁 쉬었어요. 출발할 때까진 감이 안 왔는데 브레멘 공항에서 유소년 디렉터를 만났어요. 그분의 아들도 축구를 하는데 우연히 아들과 같은 비행기를 탄 거예요. 그래서 공항에서 만나서 신기하기도 하고, 이미 거기서부터 브레멘 구단에 도착했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GOAL: 독일어 공부는 좀 해왔나요?
“유투브만 계속 봤어요. 채널 중에 ‘에밀리’라는 게 있어요. 독일어 일상 대화를 배웠어요. 책도 사서 나름대로 혼자 공부도 했고요. 확실히 도움이 돼요. 현지인들이랑 얘기하면서 하면 더 늘겠죠. 저는 외국인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먼저 다가가요. 영어는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해왔고요.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진짜 크다고 생각해요. 말을 못 하면 아무 것도 못해요. 운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모르고요. 인종차별을 당했을 때 대응도 못 하고.”

GOAL: 인종차별도 당했어요?
“네. 테스트 볼 때 U-19 팀에서 훈련 첫 날 골키퍼가 저한테 영어로 심한 욕을 했어요. 다음 날 제가 그 욕을 엄지 척으로 바꿔놨어요. 실력으로 대응했으니까요. 그 욕을 못 알아들었다면 못 했겠죠. 그래도 선수들이 인정이 빠르더라고요.(웃음)”

GOAL: 테스트 훈련에서 벌어진 또 다른 일들도 있어요?
“음… 그런 일이 있었어요. U-19 팀에서 훈련을 하는데 제가 차별을 좀 당했어요. 운동하기 전에 몸을 풀 때 볼 살리기 등의 놀이를 하는데 불러주질 않아요. 타지역에서 온 애들끼리만 몸을 풀었죠. 또 하나는 제가 중앙 수비를 보는데 뒤에서 골키퍼가 막 욕을 하는 거예요. 그걸 듣고 제가 말릴 뻔(?) 했는데 신경 안 쓰고 제 할 일을 했어요. 다음 날 2군에서 훈련을 했는데 확실히 성인팀이라 다르더라고요. 먼저 와서 같이 몸 풀자고 하고. 그날 솔직히 제가 잘했거든요. 훈련 끝나고 나서 한 흑인 선수가 먼저 와서 ‘브로(bro)!’하면서 친근하게 얘기하더라고요. 저한테 몇 살이냐고 물어봐서 제가 열여덟이라고 했더니 절대 안 믿었어요. 자기 친구들 다 데려와서 얘가 열여덟이라고 하면서 놀라더라고요. 이제 저 자기네 팀에서 뛰는 거냐고.(웃음) 그때 제가 19세 팀에서 있었던 일들을 다 말했거든요. 그랬더니 누가 그랬냐고 화내고. 코치한테 말했더니 자기들이 알아서 처리했다고 하더라고요, 하하. 다시 19세 팀에 갔더니 태도가 달라졌어요.”

“또, 2군에서 슈팅 게임을 한 15~20분 정도 했는데 제가 마킹한 공격수가 공을 한 번도 못 잡았어요. 그랬더니 끝나자마자 자기 혼자 분위기가 엄청 안 좋더라고요. 저를 막 흘겨보고. 코치랑 엄청 슬픈 표정으로 대화하더라고요. 제가 인사하니까 엄청 떨떠름해 했어요.”

GOAL: 어쨌든 진짜 좋은 모습을 보였나 봐요. 당시 테스트가 끝나고 감독이나 코치가 얘기해준 게 있나요?
“유럽은 원래 테스트 훈련 끝나고 선수에게 따로 얘기를 해주진 않는다고 해요. 운이 좋게 당시 구단 관계자분들이 근처에 계셨거든요. 그분들이 감독님께서 제 칭찬을 많이 했다고 전해줬어요. 제게 칭찬은 독이 아닌 마약 같은 존재예요. 칭찬을 받으면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커져요. 그 칭찬을 또 듣고 싶으니까요. 저는 사소한 칭찬만 받아도 굉장히 텐션이 많이 올라가요.”

GOAL: 브레멘과의 계약 과정에 어려움이 많았어요. 그와 동시에 현대고에 집중해야 했고요. 마인드 컨트롤이 어렵진 않았나요?
“저는 그런 상황일 수록 좋은 생각밖에 안 나요. 경기를 뛰면서도 ‘어차피 내 목표는 유럽이잖아’라며 자기 주문을 걸어요. 그와 동시에 자기 상황에 맞게 최대한 열심히 했어요. 저는 어렵거나 힘든 일에 개의치 않는 편이에요. 잘 울지도 않아요. 제가 마지막으로 울었을 때가... 중학교 1학년? 서울시 대표로 일본 대회에 나간 적이 있어요. 그 대회 만들어진 후 최초로 결승전으로 갔는데 제가 일대일 상황에서 실수해서 PK를 내줬거든요. 그 PK로 0-1로 졌어요. 그때 울었어요. 학교에 갔더니 교장 선생님께서 ‘규현이 얼굴 좋아 보이네’라며 격려를 해주셨는데 제가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씀을 드렸어요. ‘저는 지나간 일에 새로운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교장 선생님이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하하하. 정말 너무 좋아하셔서 웃겼어요.”

GOAL: 비슷한 나이 또래의 정우영 선수가 분데스리가를 먼저 경험했어요. 혹시 연락을 나눈 게 있나요?
“원래 우영이 형과 친하진 않았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U-20 대표팀을 거쳐 간 모든 선수가 단톡방에 초대됐거든요. 거기에 우영이 형이 딱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연락을 했죠! 평소에 형 이야기 많이 들었다고, 저도 곧 독일에 간다고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형이 가서 열심히 하라고, 잘할 거라고 해주더라고요. 아주 잠깐 나눈 대화였지만 그래도 연락해서 좋았어요.”

GOAL: 현대고 센터백 선배 김현우도 이미 유럽에서 뛰고 있죠.
“판다컵 소식 듣자마자 제일 먼저 연락해준 형이에요. 고등학생 때 제 롤모델이었어요. 형들이랑 있을 때는 엄청 장난을 많이 치는데, 후배들 앞에선 무게를 엄청 잡거든요. 유행어도 있어요. 고학년이랑 저학년 방을 따로 쓰는데 밤에 현우 형이 저희 방에 와서 불을 딱 끄면서 ‘잘 준비 해라’라고 하거든요. 그게 저희 사이에서 유행어가 됐어요. 너무 멋있으니까. 현우 형 나가자마자 불 딱 켜고 ‘잘 준비 해라’라고 똑같이 따라 하고 그랬어요, 하하하. 아무튼 매력적인 형이에요. 경기에서도 보고 배울 점이 많았어요. 발이 빠르고, 공격적이고. 그래서 더 따라하게 됐죠.”

GOAL: 지금 마음가짐은 어때요?
“저는 이제 마냥 고등학생이 아니라 프로 계약을 한 프로 선수니까, 프로답게 해야죠. 몸관리도 훨씬 철저하게 하고. 제가 탄산을 끊은 지가 3주 됐어요. 탄산이 단백질을 분해한다고 해서. 원래 고기와 햄버거를 먹을 땐 콜라인데....하... 너무 먹고 싶지만 이제 주스를 마십니다. 어른들에게 맥주의 존재는 제게 콜라거든요. 견뎌내야죠.”

GOAL: 내가 유럽에 진출할 수 있던 이유를 말해보자면?
“젊고, 빠르고, 빌드업을 잘하는 것 같아요. 제가 들어온 얘기이기도 하고, 제가 그 장점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으니 누구보다 잘 알아요. 저는 경기장에서 절대 싸우지 않아요. 상대랑은 싸워도 우리 팀 내에선 절대 싸우지 않아요. 상대가 화를 내고 욕해도 제가 더 안고 가려고 하고, 끌고 가려고 하죠.”

GOAL: 독일 축구를 짧게 맛봤지만, 그 사이에 느낀 점이 있다면?
“운동량이 한국과 정말 달라요. 또 중앙 수비에 대한 시선도 다르죠. 한국에서는 중앙 수비가 뚫고 나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유럽에선 그런 게 없다는 걸 느꼈어요. 뒤셀도르프에서 U-12 팀이 훈련하는 걸 봤어요. 중앙 수비가 드리블을 치고 공격수에게 볼을 주려고 찾다가 상대한테 뺏겨서 실점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보통 중앙 수비수한테 화를 내는데, 그 팀의 감독님은 공격수한테 화를 내더라고요. 왜 안 받쳐줬냐고요. 그게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한국에서 저도 드리블을 치고 올라가던 적이 종종 있는데 지도자분들이 별로 좋아하시진 않았어요.(웃음)”

GOAL: 자라나면서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했죠?
“좌측 수비수도 본 적이 있고, U-20 대표팀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도 봤어요. 중학교 3학년 때까지는 공격수를 했어요. 골키퍼도 했어요! 초등학생 때 방과 후에 하던 축구에서요, 하하. 물론 노는 거였지만. 제가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한 건 초등학교 6학년인데 당시 왼쪽 윙어를 봤고 점점 자라나면서 센터 포워드에도 섰고요. 확실히 볼을 많이 만져봤으니까 중앙 수비로 섰을 때 더 편한 느낌이 있었어요. 훈련할 때도 굳이 힘든 지역 들어가서 볼을 한 번 더 만지려고 했고요. 굳이 들어가지 말라는 지역 파고들어서 동료 더 도와주고.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잖아요?”

GOAL: 브레멘에서 그런 점을 활용하고 싶어 해요. 꼭 보여주고 싶은 모습은 뭐예요?
“한시라도 빨리 프로에서 ‘아, 얘를 써도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게 해야죠. 미래 가능성을 보고 제게 투자를 하는 거니까 그거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야죠. ‘와, 저렇게 빨라?’라는 생각이 들게 해주고 싶어요. 경기 이해하는 능력이 남다르다, 리딩 능력이 좋다... 이런 말들을 듣고 싶고요. 경기력, 이해력, 정신력 모든 면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줄 거예요.”

GOAL: 멘털적인 부분에선 크게 문제가 없어보여요.
“하하, 그렇죠. 제가 내세울 수 있는 장점이에요. 대전시티즌에서 뛰셨던 윤원일 코치님이 계셔요. 1년 동안 함께한 적이 있는데 저랑 코드가 되게 잘 맞아요.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네가 가진 멘털은 진짜 부럽고, 절대 돈 주고 못 사는 거다. 감히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거다’라고요.”

GOAL: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제 브레멘에서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요. 한국에서 뭐가 제일 그리울 것 같아요?
“배달 음식 못 먹는 것! 야식! 제일 생각날 것 같아요. 지하철에서 나오는 그 노래도 그리울 거 같아요. 문득 생각나네요. 독일 지하철은 너무 고요해요.”

사진=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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