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난자 냉동까지 고민해야 하나

2019. 5. 19. 10: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토요판] 이런 홀로

난자 냉동하는 친구들 많아져
"지금 아이 낳을 생각은 없지만
일단은 보험 들어놓는 심정으로"

'완벽한 삶' 위한 라이프스타일?
난소 나이 강조 등 각종 마케팅
여성 주체성보다 가부장제 강화
난자 냉동이라는 옵션에 대해 생각한 지 벌써 2년이 흘렀고, 나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도 어려운 문제인데 이제 ‘얼릴 것인가, 말 것인가’까지 고민해야 한단 말인가? 게티이미지뱅크

난자 냉동이라는 옵션에 대해 생각한 지 벌써 2년이 흘렀다. 그사이 나의 난자는 그만큼 ‘덜 신선한’ 상태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2년 전 처음 ‘나도 난자를 얼려야 하나’ 생각한 것은 그즈음 만난 미국에 살고 있는 친구 ㄱ가 난자 동결 시술 차 한국에 왔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놀라운 것은, 옆에 있던 ㄴ 역시 이미 지난봄에 두 사이클을 진행해 난자 20여개를 얼려 놓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ㄱ과 ㄴ과 내가 공히 알고 있는 ㄷ도 이미 서울 모처의 냉동고에 자신의 난자 10여개를 보관 중이라고 했다. 그들은 모두 나처럼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없는 30대 후반의 여자들이었다. 각자 파트너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지만 미래는 불확실했다. 그때 처음으로 내 난자의 생물학적 유통기한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전까지는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지도 않았던 요소였다.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이후에도 종종 난자 냉동을 했거나 하려고 준비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지난가을 친구의 결혼식에서 홍콩에 사는 ㄹ을 만났을 때도 그는 자신이 실은 난자 냉동 클리닉에 다녀왔다고 털어놨다. 특별한 계기는 없고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난자 동결로 미래를 확보했다면서. 이혼한 싱글인 그는 한국과 대만이 그나마 비용이 싼 편이라고 귀띔했다. 결혼했지만 아이가 없는 한 친구는 검사 결과 난소 나이가 생각보다 많다며 조급해했다. 그런가 하면 지금은 결혼 생각도, 아이 낳을 생각도 없는 20대 친구는 “만약을 대비해 조금이라도 더 젊었을 때 신선한 난자를 보관해둬야 하지 않을까” 말하기도 했다.

이들은 말은 그렇게 했어도 모두 일종의 양가감정에 빠져 있는 듯했다. 사회적·경제적·정서적 이유로 출산을 미뤄왔거나 출산을 미룰 예정이지만, 아이를 낳을 기회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은 불안하다.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기 피로해서 일단은 보험을 들어놓는 심정인 것이다. 그건 ‘가임력 보존센터’ 같은 말이 불러일으키는 불쾌함과는 조금 다르게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난자 냉동 클리닉 마케팅팀에서 말하는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내 삶과 시간을 컨트롤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들어설 자리가 없어 보였다.

시간이 갈수록 난자 냉동은 캐주얼한, 하나의 삶의 옵션이 되어가고 있다. 페이스북과 애플사는 수년 전 우수 여성 인재를 위한 직원 복지 정책으로 여직원들에게 난자 냉동 비용을 지원하겠다고 밝혀 화제였다. 그즈음 미국에선 난자 냉동이 유행처럼 번졌다. 요즘은 나아가 난자 냉동 스타트업이 속속 생겨나고 있는 모양이다. 얼마 전 신생 난자 냉동 스타트업 중 하나인 ‘카인드 바디’라는 회사는 뉴욕 거리 한복판에 산뜻한 노란색 버스를 몰고 다니며 가임력 판단 지표인 호르몬 검사를 해주는 이벤트를 벌여 논란이 되었다. 여성들에게 ‘난소 나이’와 같은 또 다른 굴레를 씌우고 불임에 대한 불필요한 공포를 조장한다는 비판이었다. 또 다른 신생 난자 냉동 스타트업인 ‘트렐리스’는 전통적 병원 스타일에서 벗어나 ‘인스타그램 친화적’인 부티크 스타일의 클리닉을 차려놓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인플루언서들과 협업해 젊은 여성들을 유혹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삶의 불확실한 영역을 파고들어 확실한 것을 약속한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을 이용한 이들의 광고 캠페인을 보고 있으면, 난자 냉동은 난임 치료나 병의학의 영역에서 벗어나 더 풍요롭고 완벽한 삶을 위해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의 하나로 자리 잡을 것처럼 보인다. 난자 냉동 비즈니스의 타깃 그룹은 연령대가 점차 더 어려져 25~27살까지 확장되고 있다. 귀여운 난자 일러스트 위로 ‘네일 케어를 받을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난자 냉동도 가능합니다’와 같은 광고 문구가 띄워지는 피드는 난자 냉동을 무슨 디아이와이(DIY) 인테리어나 크루즈 여행 상품쯤 되는 것으로 여기게 한다.

아직 난자 냉동 스타트업 같은 것은 없지만 한국에서도 난자 냉동은 분명 일반적으로 고려할 만한 하나의 옵션으로 자리 잡았다. 더 이상 과거처럼 암 환자가 선택하는 의료 행위나 난임 부부를 위한 치료의 과정으로만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국에서 난자 냉동은 젊은 여성들이 자신의 가임 여부를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한 방식이기보다, 더 자주 가부장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듯하다. 텔레비전에선 여성이 연상인 커플이 2세 계획을 위해 난자 냉동을 했다거나, 30대 후반의 여자 연예인이 만약을 대비해 얼려둔 난자로 출산을 했다고 말하는 일이 잦아진다. 연상연하 커플의 난자 냉동은 연상인 여성의 가임력에 대한 세간의 상상 이상의 관심에 힘입어 이슈화된다. 부모들이나 주변의 오지랖 넓은 자들은 이제 결혼 적령기를 지난 여성에게 결혼에 더해 난자 냉동까지 종용한다. ‘미래의 남편을 실망시키기 싫다면’이라는 조건을 달아서. 비혼이거나 아이 없는 삶을 살기로 결정한 이들은 여전히 논외다.

늘어가는 고민 목록

수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수백만원에 이르는 비용은 뒤로 제쳐두고서라도, 난자 냉동이란 옵션은 아무래도 내 삶에 추가된 또 하나의 불안 요소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표준화된 생애주기 속 ‘정상적 삶의 조건’의 요소로 새롭게 발명된 또 하나의 억압일까?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도 어려운 문제인데 이제 ‘얼릴 것인가, 말 것인가’까지 고민해야 한단 말인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발명들이 이 목록에 추가될까?

그러는 동안에도 생물학적 자동장치에 불과한 내 몸의 시계는 정직하게 흘러간다. 사회에선 가임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나이에 대해 떠들어대며, 사람들은 아이 없이 늙은 여성을 무슨 문제라도 있는 듯이 대한다. 나는 호기롭게 비혼이나 아이 없는 삶을 외치지도 못하고, 내 삶에서 ‘엄마 되기’라는 옵션을 포기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조차 수년째 어른스러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피임이라면 몰라도 난자 냉동이라니. 이런 고민이 내 앞에 당도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다 보면 될 대로 돼라, 자아 성취하고 돈도 벌고 더 훌륭한 인간이 되기도 바쁜데 어째서 이런 고민까지 해야 한단 말이냐 하는 심정이 되어버린다.

최근엔 차라리 여성이 난자 제공 외에는 출산에 개입하지 않는 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곤 한다. 인공자궁이 상용화되고 여성이 난자만 제공하면 아이는 사회에서 알아서 부화하고 양육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자, 남자, 가족, 부모 등의 정의는 지금과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때라면 기꺼이 난자를 제공할 의향이 있다. 물론 거기엔 더 많은 위험 요소가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다이나믹 닌자

[▶네이버 메인에서 한겨레 받아보기]
[▶한겨레 정기구독][▶영상 그 이상 ‘영상+’]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