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피 흘리며 녹슬어가는 가슴 속 대못 하나

1986년 ‘심상’으로 등단한 서정학(1957~ ) 시인에게 시는 ‘가슴에 박힌 못’이다. 등단 34년(‘시문학’ 초회 추천을 감안하면 40년) 동안 세 권의 시집을 내는 더딘 행보에 ‘못’은 녹이 슬었다. 두 번째 시집 ‘죽산에 이르는 길’ 이후 세 번째 시집 ‘반달과 길을 가다’를 내기까지는 17년이 걸렸다.
시인의 황소걸음에는 늘 사랑과 이별, 그리움이 동행한다. 그가 시 쓰기에 온전히 매진할 수 없었던 것은 “마음이 여린 탓”(이하 ‘시인의 길’)에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라 고백했지만, 자식들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마음이 컸을 것이다.
어머니는 광주리를 이고 서녘에서 걸어오셨다. 냇물을 건너 벼가 익은 들판을 지나 어머니를 마중 가는 길, 다홍치마 같은 구름 아래에서 밀잠자리가 날아다니고 익은 벼 포기 사이로 메뚜기들이 뛰어다녔다. 어린 동생 손에 잠자리 한 마리를 쥐어주고 허기진 우리는 저녁노을이 짙어질 무렵까지 들판에서 기다렸다.
하루 종일 어머니는 방물장수처럼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았을 것이다. 홍시처럼 잘 익은 저녁 해가 기울면서 들판도 온통 붉게 익어갔다. 그때 어지러움 속에서 나는 보았다. 둥글고 커다란 햇덩이가 어머니의 광주리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툭 우리들의 배고픔 속으로 떨어져 밝게 빛나는 것을 그리고 그때 철새들이 꺼억꺼억 울면서 새재를 넘어가는 것을…
- ‘새재 부근’ 전문
지천명(地天命)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나라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늦은 저녁, 곧 떨어질 홍시 같은
막 터져버릴 듯한 울음 같은
술 내음을 풍기며 돌아오시던 아버지.
그분은 그분만의 나라에서 비로소
집으로 귀환하셨다는 것을
나이가 들다 보니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나라에는
꽃도 피지 않고, 냇물도 흐르지 않는다.
늘 막막한 안개만 가득하다.
아버지의 나라에는 당연히
요정이 살지 않는다.
저녁 무렵, 비틀거리며 그들의 영토에서 돌아오는
슬픈 왕들을 보라.
집으로 다시 귀환하는 이방인들을 보라.
- ‘아버지의 나라’ 전문
시인은 종종 과거로 여행을 떠난다. “언젠가 크림빵을 사들고 오시”(‘문득, 눈물이’)거나 늦은 저녁에 “술 내음을 풍기며 돌아오시던” 아버지에게서는 애증을, “광주리를 이고 서녘에서 걸어오셨”던 어머니에게서는 연민을 느낀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새로 산 인라인스케이트를 신고서 마냥 신이 난 아이”(‘아빠 일기’)와 “말없이 웃어준 아내와 건강하게 자라준 아이들”(‘참회’)에게서는 미안함과 고마움, 행복이 묻어난다. 또한 유고 시집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간 시인(‘가을 편지 1 -고 윤택수 시인에게’)과 오랜만에 숭인동 커피숍에서 만난 초등학교 동창들(‘스텔라에서’)에게서는 만남과 이별, 추억을 송환한다.
시인은 새나 넘나들 수 있는 험한 고갯길이라는 뜻의 문경새재(조령) 부근 충주가 고향이다. 해 질 무렵 어린 동생과 “방물장수처럼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았”을 어머니를 마중 간다. “어머니의 광주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어머니는 시골에서 필요한 작은 물건들을 이고 다니며 팔았을 것이다. “냇물을 건너 벼가 익은 들판”을 지나고, “다홍치마 같은 구름 아래에서 밀잠자리가 날아다”니는 전원 풍경은 허기져 어지러운 ‘나’와 ‘어린 동생’으로 인해 더 이상 목가적이지 않다.
종일 무거운 광주리를 이고 여러 마을을 다니며 물건을 팔아 어린 자식들을 먹여 살리던 어머니에 비해 아버지는 “늦은 저녁”에 술에 취해 집으로 들어온다. ‘어린 나’는 그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정을 꾸리고 애를 낳아 기르면서,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地天命)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나라가 있음”을 겨우 알아차린다. 그 나라에는 “꽃도 피지 않고, 냇물도 흐르지 않는” 고독한 왕국이다. 가장으로서 식솔을 책임지지 않는 “슬픈 왕”은 집에서도 “이방인”일 뿐이다. 그가 시인의 길보다 생활인의 길을 우선시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아파트 언덕 너머에 바다가 있다고
서늘한 바람 한 자락도 그곳에서 불어오는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꾹꾹대며 가끔 날아오는 새들도 갈매기이고
간헐적으로 들리는 소음도 파도 소리일 거라고 홀로 우겨본다.
세파에 지쳐 어둡기도 전에 불을 꺼버린 변방의 가게들을 지나
집들의 옥상을 징검다리처럼 건너, 키 큰 나무들을 뛰어넘으면
파도가 흰 이빨을 드러내고 시시덕거리고 있을 것이다.
모래톱 속에는 무늬 고운 조개들이 잠들어 있을 테다.
멀리 보이는 불빛 옆에 항구가 가슴을 열고 배들을 기다릴 터이고
그 너머를 지나면 몇 포기의 섬들이 돋아나 있을 것이다.
달이 뜨면 산호들이 방정을 하고 해초들도 달빛으로 머리를 감을 것이다.
연안을 지나면 가끔은 멸치 떼가 돌고래도 몰고 올 것이다.
흔들리며 지낸 하루, 어차피 착각 속에 보낸 날들
불 꺼진 집들의 지붕 위로 별 하나 뜨지 않는 밤
뻘밭에 누운 목선처럼 홀로 잠을 청하기 전에 꿈꾸어본다.
언덕 저 너머에 바다가 있다고, 그가 나를 부르고 있다고.
- ‘언덕 너머에’ 전문
시 ‘언덕 너머에’는 삶의 이상과 현실을 다루고 있다. 언덕을 경계로 “내가 사는 아파트”와 “불 꺼진 집”은 현실의 공간이고, “바다”와 “지붕 위의 별”은 상상의 공간이다. 시인에게 언덕 너머의 세상은 현실도피이면서 영원히 머물고 싶은 이상향이다. “세파에 지”친 시인이 언덕 너머에 귀 기울이는 시간은 오롯이 시를 쓸 때다.
시인의 발걸음은 거칠 것이 없다. “집들의 옥상을 징검다리처럼 건너, 키 큰 나무들을 뛰어넘”어 그리운 바다로 간다. 바다에는 “흰 이빨을 드러내고 시시덕거리”는 파도와 모래톱 속에서 잠든 “무늬 고운 조개들”이 있다. 시인의 시선은 백사장과 항구를 지나 “몇 포기의 섬들”과 바닷속 산호들과 해초에 머문다. 시인이 “언덕 저 너머” 바다를 꿈꾸는 것은 그곳에서 “그가 나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빠는 외국에서 바가지를 썼더라도 시 한 편은 건졌잖니”(‘복제인간’)라는 문장으로 볼 때 그의 정체는 ‘시’라 할 수 있다. 언덕 너머를 상상하면서 시 한 편을 쓴 것이다.
바위 틈새에 소나무와 이름 모를 잡목들이 자리잡고 있다. 나는 소나무의 끈질김에 대하여 주목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리를 내준 견고한 돌덩이들에 대해 발언한다.
견고함은 때론 미덕일 수도 있으나, 혼자만의 세계다. 갈라지고 부서지고 난 뒤 그들은 함께한다. 봄날, 풍요로운 생명을 키우는 것은 틈이다. 시멘트 보도블록 사이로 피어난 민들레꽃을 보아라.
그대와 나 사이의 틈은 멀어짐이 아니다. 틈 사이에서 피어나는 그리움의 꽃들을 보아라. 틈새 사이에서 뿌리내리고 열매 맺는 사랑을 보아라. 갈라지고 부서지는 것은 아픔이고 고통이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맑은 여울을 보아라. 저 멀리 맴돌아나가는 푸른 강물의 반짝임을…
- ‘틈새’ 전문
‘반달’과의 동행 길에는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넝쿨장미꽃, 수국, 동백, 살구꽃, 국화, 아카시아꽃, 산수유, 매화, 벚꽃, 초롱꽃, 산다화, 싸리꽃, 팬지꽃, 오랑캐꽃, 패랭이꽃, 달맞이꽃, 달개비꽃 등과 이름 없는 무수한 꽃이 등장한다. 꽃의 시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환갑을 넘긴 시인은 이제 “아름답던 꽃과 잎새마저 떠나보”(‘사랑은’)내고, “그대와 나 사이”에서 피어나는 “그리움의 꽃들”에 주목한다. 바위 틈새에 자란 소나무보다 그 틈을 내어준 “견고한 돌덩이들”에 더 관심을 갖는 나이. 이제 “사랑을 포기하는 날, 우리의 삶은 끝나는 것”(‘한랭전선 속에서’)임을 아는 시인은 “틈새 사이에서 뿌리내리고 열매 맺는 사랑”을 거두려 한다. “갈라지고 부서지는” 아픔과 고통 “사이를 흐르는 맑은 여울” 같은 시(詩)를.
벽을 뚫겠다던 의지도 녹슬어
이제는 버려지지 않으려 애쓰는…
관념 속을 비집고 들어가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말을 꿈꾸지도 않고
시간의 겹들을 꿰뚫는 영원함도
믿지 않고
피 흘리며 녹슬어가는
가슴 속 대못 하나
- ‘시(詩)’ 전문
◇반달과 길을 가다=서정학. 북인. 144쪽/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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