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그린 투어의 시작점-나무도 푸르고 글도 푸른 곳, 담양
지금 담양은 그냥 초록이다. 곳곳에 무리 지어 숲을 이룬 대나무 숲, 아름드리 나무가 줄줄이 늘어선 메타세쿼이아 길, 담양호에서 흘러 내려온 담양천을 따라 팽나무, 벚나무가 도열한 관방제림 등 담양군 어디로 눈을 돌리든 싱그러운 초록이 넘쳐흐른다. 초록을 따라 이곳으로 스며들어 조선의 멋진 가사 문학을 완성한 선인들의 정자와 요즘 ‘인싸’라는 담양의 카페도 함께 돌아보았다.
▶대나무와 가사문학의 고장, 담양
어린 시절 외운 것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아서 ‘담양’이란 지명을 들으면 자연스레 ‘죽 세공품의 고장’이 떠오른다. 명절에 부친 전을 담아둘 때 꺼내 드는 채반이나 피크닉 기분 낼 때 쓰는 바구니에 ‘담양’이란 단어가 붙어 있으면 제대로 된 물건이라고 믿는 것은 이 오랜 기억 때문이다. 그렇게 광주직할시의 근교로만 기억되던 대나무의 고장 담양이 요즘 트렌드 키워드인 ‘식물’ ‘숲’의 부상과 함께 숲길을 걷고 나무를 살펴보는 그린 투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담양은 조선 시대에 크게 발달한 가사 문학의 산실이어서 인문학 기행 코스로도 으뜸가는 여행지다. 가사문학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활의 흥취 또는 유교적 가치관 등을 자유로운 운율에 맞춰 운문 형식으로 지은 것으로, 송순과 정철, 허난설헌 등이 유명한데, 가장 유명하다는 ‘성산별곡’ ‘사미인곡’ ‘면앙정가’ 등이 담양에서 지어졌다. 송강 정철, 면앙정 송순, 소쇄옹 양산보 등이 하향하여 문우들과 시문을 논하며 가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던 공간으로, 십여 개의 정자가 담양 일원에 펼쳐져 있다. 담양에서는 식영정, 소쇄원, 면앙정, 명옥헌, 송강정, 독수정, 상월정, 연계정, 관어정, 남극루 등 10개의 정자를 ‘담양 10정자’로 정하고, 2000년부터 한국가사문학관을 세워 가사 문학 관련 문화유산의 전승과 보전에 힘쓰고 있다. 자연 경관이 좋은 곳에 터를 잡아 유교적 가치관에 맞춰 소박하게 집을 짓고 나무를 골라 심었기에 정자 하나하나마다 정취가 있고, 경관이 수려하다.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인 맛집 투어 역시 담양에선 걱정 없다. 대나무의 고장답게 ‘대통밥’과 ‘죽순요리’, 이젠 한 단어로 고유 명사가 된 ‘담양떡갈비’를 비롯해 관방제림을 따라 조성된 국수거리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국숫집이 즐비하다. 담양 특산물인 대나무를 이용해 세련된 디저트를 소개하는 카페도 점점 늘고 있고, 에스프레소 커피를 진하게 뽑아 주는 감성적인 창고형 카페도 대숲을 끼고 담양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최근에는 메타세쿼이아 길 인근에 ‘메타프로방스’란 이름의 유럽 스타일 테마 관광 단지가 조성되었다. 메종드프로방스, 소아르호텔 등 개성 있는 인테리어의 펜션들이 넓게 자리하고 있고 골목골목에 작은 공방과 예쁜 카페, 식당들이 운영 중이다. 수백 년간 뿌리를 내린 대숲과 나무들로 조성된 초록빛 생태계를 기반으로 인문학의 성지로 지역의 정체성을 다듬어 가는 천년 담양, 초록이 싱그러운 지금, 꼭 한번 들러 볼 만한 곳이다.
죽녹원은 2003년에 조성해 대숲과 시가문화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대한 대숲이 만드는 푸르고도 심오한 이미지가 독특해서 각종 영화와 광고 촬영지로 먼저 유명해졌다. 2009년 KBS ‘1박2일’팀이 다녀간 이래로는 연간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국내 최고의 관광 명소가 되었다. 시가문화촌 안에 만든 명옥헌 연못은 ‘이승기 연못’이란 별칭을 얻었고, 담양 사람들 사이에서는 ‘죽녹원 언덕이 꺼질지도 모른다’는 루머가 떠돌 정도로 매일같이 관광버스가 줄을 이어 사람들을 태워 왔다고.
죽녹원에 들어서면 대숲을 걷는 8개의 관람 코스가 있다. 대숲 사이를 걸으면 운이 트인다 해서 ‘운수대통길’, 연인이 함께 걸으면 좋다는 ‘사랑이 변치 않는 길’, 깊은 생각에 빠지며 걸을 수 있는 ‘철학의 길’과 ‘사색의 길’, 담양의 선비 문화를 새겨볼 수 있는 ‘선비의 길’ 등이 있다. 쭉쭉 끝도 없이 하늘로 치솟은 대나무들 사이로 걷다 보면 짙고 푸른 초록에 눈이 시원해지고, 사각사각 바람결에 댓잎이 나풀거리는 소리에 머릿속이 맑아진다. 대숲을 다 지나면 가사 문학의 산실인 식영정, 면앙정 등 담양 정자들을 재현해 놓은 시가문화촌이 나온다. 죽로차 체험장과 한옥 체험장, 한옥 카페 등이 있고, 담양 출신의 유명한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작가가 대나무를 주제로 영상화한 작품과 기존의 미디어 아트 작품을 모아 놓은 이이남 아트센터도 볼 수 있다.
1970년대에 대한민국에는 전국적으로 나무 심기 캠페인이 벌어지며 지역마다 수종을 정해 가로수를 심었다. 이때 담양에 지정된 나무는 메타세쿼이아. 이름도 낯선 데다가 예쁜 꽃도 없이 위로만 쭉쭉 뻗어 올라가는 나무라 초기에는 그저 그런 가로수였지만 10년이 넘어 가면서 단정한 삼각형 모양의 나무들이 큰 키로 몇 km씩 도열한 메타세쿼이아 길은 멀리서 봐도 멋있게 변해 갔다. 어느새 50여 년이 흘러 높이 10m 이상 자란 메타세쿼이아 사이를 차로 달리거나 걸어서 지나면 이국적인 풍취를 느낄수 있어 명실공히 담양의 명물이 되었다. 처음엔 24번 국도의 가로수로 심었던 지라 차를 타고 가다가 메타세쿼이아 터널에 반해 차를 세우고 구경하거나 사진 찍는 이들이 많아졌다. 마침 그 옆에 새로 국도가 뚫려 이 길은 아예 ‘메타세쿼이아 랜드’라 해서 걷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4월 말부터 새잎이 나면서 길 위의 하늘은 점점 초록색 잎으로 덮여 가고, 초여름이면 아예 가로수 터널이 되어 버린다. 초록 잎 사이사이로 햇살이 반짝반짝 비치는 광경을 보며 걸으면 그 자체가 힐링이다. 메타세쿼이아 길에 이어 담양의 새로운 명소로 부상한 길이 바로 관방제림이다. 관방제림은 조선 철종 때인 1648년에 담양 군수로 부임한 성이성(『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의 실제 인물)이 해마다 장마철이면 담양천이 넘쳐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보고 제방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심은 것이 시작이다. 푸조나무, 팽나무, 벚나무 등 비바람에 강한 토종 나무를 심어 제방을 튼튼하게 했다. 당시에 심은 나무 185그루가 천연기념물 제366호로 지정되었고, 그 외에 2km의 제방에 400여 그루의 굵직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이 관방제림과 담양천이 정비되면서 곳곳에 돌로 만든 징검다리와 산책로가 조성되었다. 주말이면 나무 그늘에서 담양천의 시원한 바람을 즐기는 가족 단위 관광객과 4인 자전거를 타거나 오리배를 타는 젊은 남녀로 북적거린다.
한동안 소쇄원에 가기 위해 담양에 가는 이들이 많았다. 소쇄원은 자연 지형을 살려 조성한 우리나라 최고의 원림으로, 광풍각과 제월당, 애양단과 오곡문 등에 성리학의 이론을 적용해 지었다 하여 건축과 조경 전문가들은 꼭 가봐야 할 곳으로 꼽는다. 우리 것을 우리가 더 몰라서 궁이나 왕릉, 정자 같은 우리네 문화 유적에 가면 전문 해설가의 설명을 꼭 들어야 한다. 이상적 왕도 정치를 펼쳐 보려다 좌절한 조선의 사림들이 하향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충의를 지키며 살던 곳,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가꾼 삶의 터를 돌아보는 일은 여행의 깊이를 더해 준다.
담양에는 소쇄원 외에도 이렇게 하향해서 충의를 지키며 살았던 선비들이 세운 수십 개의 정자가 있다. 면앙정 송순은 추월산과 삼인산이 멀리 보이고 영산강의 지류가 바로 아래에 흐르는 면앙정에서 이황과 김인후 등과 학문을 논하며 후학을 길러 내고 ‘면앙정가’를 짓기도 했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관직에서 물러난 송강 정철은 이곳 담양으로 내려와 송강정과 식영정을 오가며 선조 임금에 대한 충정을 이별한 남편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마음에 빗대어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식영정이 있는 성산의 자연 풍경을 노래한 ‘성산별곡’까지 조선 가사 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작품들을 지었다. 식영정 툇마루에 앉으면 멀리 무등산 줄기와 바로 앞의 광주호 그리고 그 앞에 도열한 굵직한 소나무들이 만드는 근사한 풍경에 누구라도 시 한 수 읊고 싶게 만든다. 송강정 역시 영산강 물줄기가 도도히 흐르고, 끝간 데 없이 너른 평야가 마음을 다스리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은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우선 한국가사문학관에서 조선의 가사 문학에 대한 영상과 전시물을 살펴보고, 독수정,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송강정, 면앙정으로 길을 잡아 담양읍으로 돌아오는 코스가 편리하다.
담양에서 나는 것들로 차린 식탁
▶착한 담양떡갈비의 성지, 덕인관
-주소 전남 담양군 담양읍 죽향대로 1121
-영업시간 매일 오전 11시~오후 9시
-주요 메뉴 덕인떡갈비(1인분 200g, 2인 이상 주문) 2만9000원, 대통밥 1만1000원, 죽순추어탕 8000원
▶국수거리 첫 집, 진우네집국수
-주소 전남 담양군 담양읍 객사3길 32
-영업시간 매일 오전 9시~오후 8시
-주요 메뉴 멸치국물국수 4000원, 비빔국수 5000원, 삶은 달걀(2개) 1000원
▶국수의 3대천왕, 옛날진미국수
국수만큼 푸짐한 양의 오동통한 콩나물이 들어간 멸치국물국수와 푹 삭힌 열무 넣고 전라도 특산 고추장으로 비벼 낸 열무비빔국수. 열무비빔국수에는 멸치 장국이 따라 나오니 어느 것을 시켜도 아쉽지 않다. 이집의 별미는 파전. 바삭한 반죽에 파와 당근 등 야채와 오징어가 푸짐하게 들어가 양념장 찍어 동동주 한 잔과 함께 먹으면 더욱 맛있다.
-주소 전남 담양군 담양읍 객사3길 26
-영업시간 오전 10시 30분~오후 7시
-주요 메뉴 멸치국물국수 4000원, 열무비빔국수 5000원, 파전 8000원
▶담양 대표 디저트 카페, 담양제과
-주소 전남 담양군 담양읍 객사4길 37-1
-영업시간 오후 12시~오후 6:30(월~수 휴무)
-주요 메뉴 대나무우유 5500원, 대나무케이크(티라미수) 1만1500원, 담양 백향과 파운드 3800원
▶빈티지 트렌드의 인싸 스팟, 쌍교다방
-주소 전남 담양군 봉산면 송강정로 211
-영업시간 오전 11시~오후 8시(목요일 휴무)
-주요 메뉴 쌍교다방커피 2800원, 달달구리커피 1900원, 와우리 생딸기라테 아이스 5500원
▶창고형 카페, 서플라이
-주소 전남 담양군 담양읍 객사2길 14
-영업시간 오전 11시~오후 10시
-주요 메뉴 더치 아메리카노 4900원, 더치 라테 5900원, 다쿠아즈 3400원
▶명옥헌 앞 야외 카페, 오팔
외국에서 오랫동안 전문 바텐더로 일하다가 고향에 돌아와 세련된 공간을 만든 주인장은 이제 현란한 칵테일 믹솔로지는 숨기고, 솜씨 좋게 에스프레소 머신을 다룬다. 블랙 앤 화이트 그리고 민트 색의 야외용 스트링 체어에 앉으면 담양을 감싸 안은 나지막한 능선을 넘어온 초록 바람의 시원함을 맛볼 수 있다.
-주소 전남 담양군 고서면 후산길 64
-영업시간 오전 9시~오후 10시
-주요 메뉴 아메리카노 4500원, 콜드브루 4500원, 수제 레모네이드 5500원
[글과 사진 신혜연(헤이컴 대표, 콘텐츠 기획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78호 (19.05.14)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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