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한정식집, 한달 한개씩 사라진다
지난 9일 점심 시간 서울 종로구에 있는 인사동길. 골목길마다 출입문에 '임대 문의'라는 안내 글을 크게 써 붙인 빈 식당들이 눈에 띄었다.

인사동길은 30~40년 동안 대를 이어온 노포(老鋪)가 밀집한 곳. 수년 전만 해도 점심 시간엔 골목을 지나려면 옆 사람과 어깨가 부딪힐 정도였다. 하지만 이날 골목길엔 적막감이 돌았다.
인사동에서 32년간 한정식집 '다미'를 운영해 오던 안정숙(63)씨는 15일 마지막 영업을 했다. 안씨는 "최근 2~3년 사이 손님은 절반 이상 줄어들었는데 인건비는 크게 올라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고 했다.
식당을 인수할 사람을 찾지 못한 채 폐업을 하는 상황이다. 이곳은 당분간 빈집으로 방치될 처지다. 바로 옆 골목의 '태화'도 이달 말 문을 닫는다. '태화' 역시 인수자가 없다. 한정식집 자리는 주택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서울 도심의 대표 상권이던 인사동길이 불황의 위기에 휘청이고 있다. 특히 한정식집이 많은 인사사거리 북동쪽 블록에는 무려 7곳의 식당이 폐업을 한 채 방치된 상태다. 이 구역에서만 조만간 인수자가 없는 상태로 문을 닫을 예정인 한정식집이 3곳에 달했다. 이곳 한정식집·전통 찻집은 70여 곳 정도다. 폐업한 식당의 입구에는 인근 화랑에서 여는 전시회나 각종 강연회를 알리는 포스터만 덕지덕지 붙었다. 이날 영업 중인 한 곳을 지켜봤지만, 점심 시간 내내 손님은 2~3팀에 불과했다.
◇공무원은 세종시 내려가고 외국인 관광객은 줄고 인사동길에 전국 각지 향토 음식을 내세운 한정식집이 모여든 것은 1970년대다. 'ㅁ'자(字) 한옥집에서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차려놓는 한정식 문화가 자리 잡았고,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외국인 관광객이 한국 문화를 맛보기 위해 꼭 한 번 들러야 할 관광지로 부상했다.
인사동의 위기 배경에는 정부청사의 세종시 이동과 부정청탁금지법(김영란법·2016년) 시행, 최저임금 인상이 있다. 51년 역사의 한정식집 '선천'도 손님이 줄자 11명이던 직원을 최근 2년 사이 6명으로 줄였다.

박영규(89) 사장은 "김영란법 이후 저녁에 이곳을 찾던 단체 손님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했다. 그래도 자기 건물에서 영업을 하는 박 사장은 사정이 낫다. 인사동이 관광지로 뜨면서 임차료가 올랐고, 한옥을 임차해 영업하는 한정식집의 임차료 부담도 커졌다. 한 식당 주인은 벽면에 빼곡한 유명인들의 사인을 가리키며 "예전엔 정치인, 기업인, 공무원 등 단골손님이 많았는데 통 볼 수가 없다"고 했다.
이곳에서 한국 전통 요리를 맛보던 일본인 관광객이 급감한 것도 원인으로 꼽힌다. 2012년 352만명으로 정점을 찍은 방한 일본인 관광객 수는 지난해 295만명으로 줄었다. 실제 한 카드사가 인사동길 한식당 활동 가맹점 수를 분석한 결과, 2015년 1분기를 100으로 봤을 때, 김영란법 시행 직후인 2017년 1분기 92, 올해 1분기는 90까지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손 많이 가는 한정식, 최저임금 인상의 직격탄 맞아 설상가상(雪上加霜) 최저임금이 연거푸 큰 폭으로 올랐다. 한정식집은 지출에서 식재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손이 많이 가는 업종이다. 28년째 한정식집 '하연'을 운영하고 있는 강정아(61)씨도 "인건비·재료비 부담은 계속 늘어나는데 음식값은 제대로 못 받는 게 한정식"이라며 "한정식집을 접고 주점을 열까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주변에 있던 한정식집 '두대문'은 작년에 식당을 접고 올 초 그 자리에 전통 찻집을 열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급여를 올려줘도 구인난을 겪는 경우도 많다. 한 식당의 사장은 "한정식은 근무시간이 길고 일이 고되 요즘엔 한국 사람뿐 아니라, 조선족(중국 동포)도 꺼린다"며 "최저임금이 오르니 편한 일자리, 자신이 일하고 싶을 때만 일하는 자리 등을 찾아 떠나는 이들이 많아 우리는 더 사람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에서 최근 뉴스에 나오는 거의 모든 뉴스가 우리에게는 악재였다"며 "유일하게 영향을 안 준 건 '사드 보복'으로 중국인 관광객이 감소한 것뿐"이라고 했다. 중국인 단체객은 원래 이 일대 한정식집을 즐겨 찾지 않는 편이었다고 한다.

◇소비자 입맛은 변하는데… 구식 취급받는 한정식 19년간 '장자의 나비'를 운영해 온 장준선(63)씨도 올해 상반기에 문을 닫을 예정이다. 장씨는 "지금은 세대교체기인 셈"이라고 했다. '장자의 나비'의 단골들은 대체로 60대 이상이 많다고 했다. 은퇴 후 주머니 사정이 나빠진 단골들은 고급 한정식집에 오기 부담스러워지는데 그렇다고 젊은 단골이 생기는 것도 아니라는 설명이다.
최근 인사동길에서 불과 300m 거리에 익선동 한옥거리가 젊은 층의 인기를 얻은 것도 인사동 상권을 위축시키고 있다. 인사동과 익선동 사이 낙원상가 인근에서 노점을 하는 김모(59)씨는 "수십 년간 성업했던 인사동 한정식집은 매달 한 곳씩 사라지는 반면, 익선동에선 매달 새로운 SNS(소셜미디어) 맛집이 생겨난다"고 했다.
한정식집 '옥정'의 김민지(57) 사장은 "내 딸도 SNS에 우리 식당이 아니라 익선동 맛집 사진을 올린다"며 멋쩍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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