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리포트]지금까지 이런 주기율표는 없었다

신용수 기자 2019. 4. 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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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주기율표 만든다
화학을 배울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인 ′주기율표′. 원소 외에도 동물 이름, 지명 등을 이용해 새로운 주기율표를 만들 수 있다. 사진 이한철

“지금부터 주기율표 만들기를 시작할게요!”

교사의 말이 떨어지자 2학년 6반 학생들이 분주해졌다. 한쪽에서는 주기율표의 정렬 기준을 정하는 열띤 토론이 벌어졌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진을 오려 붙였다. 마치 150년 전 처음 주기율표를 만들었던 멘델레예프에 ‘빙의’한 듯, 학생들은 뜨거운 열정을 뿜어내며 주기율표를 만들었다. 3월 11일 경기 시흥시 매화고 과학실에서 세상에 없던 새로운 주기율표 7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일상생활에서 규칙성 찾기

주기율표는 중·고등학교에서 화학을 배울 때 반드시 거쳐야 할 중요한 관문이다. 신호 체계를 배우지 않고 운전을 할 수 없듯이 물질을 이루는 원소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정리한 주기율을 배우지 않고 화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주기율표를 가르치는 건 화학교사의 입장에서는 매우 골치 아픈 일이다. 가장 큰 문제는 학생들이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원소 이름부터 원소 기호, 원자 번호, 원자량까지 외워야 할 정보만 산더미다. 주기라는 규칙에 익숙하지도 않다. 낯선 데다가 외우기까지 해야 하니 학생들이 주기율표에 쉽게 흥미를 갖기 어렵다. 

이 때문에 교육과정에서는 원소와 주기율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여러 탐구 활동을 권유한다. 고등학교 통합과학과 화학Ι 교육과정을 살펴보면 주기율표 관련 탐구 주제 및 활동 예시로 ‘나만의 주기율표 만들기’가 있다. 

이날 나만의 주기율표 만들기 수업을 진행한 강선화 매화고 화학교사는 “주기율표를 알면 화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처음부터 원소 수십 개를 주기성에 맞춰 외우라고 하면 학생들이 쉽게 흥미를 잃어버린다”며 “체험 활동을 통해 먼저 주기율표와 친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강 교사는 “주기율표와 친해지려면 먼저 주기라는 개념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말하는 주기란 규칙이다. 원소들 사이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고, 그 규칙이 반복된다. 학생들이 원소를 익히고 주기율표를 만들기에 앞서 먼저 이 개념과 친해지는 게 좋다.

강 교사는 “주기율표를 가르치기 전 학생들에게 일상생활에서 주기성을 가진 사례를 찾게 한다”며 “이를 통해 원소의 주기성도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유도한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이전 수업에서 슈퍼마켓 물건 분류, 도서관 책 분류 등의 기준을 만들면서 규칙성을 찾고 대상을 분류하며 주기성을 이해했다. 

국기 그려보고, 마인드맵 만들고

매화고 학생들이 주기율표를 제작하고 있다. 학생들은 2시간 동안 주기율표를 제작했다. 신용수 기자

학생들은 이날 4명씩 한 조를 이뤄 2시간 동안 주기율표를 제작했다. 한정된 시간에 주기율표를 완성하는 건 혼자 힘으로는 쉽지 않다. 강 교사는 “혼자서도 주기율표를 만들 수는 있지만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제작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며 “함께 토론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를 가능성이 큰 만큼 가능하면 친구들과 함께 만들어 보길 추천한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저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주기율표를 만들기 시작했다. 조마다 풍경은 제각각이었다. 웅성웅성 서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조율하며 토론의 장을 펼치는 조가 있는가 하면, 이미 수업 전에 사전 논의를 끝내고 재료를 미리 준비한 ‘준비된 조’도 있었다. 

‘준비된 조’인 2조의 김세영 양은 “우리 조는 수업 전에 여러 차례 모여 주기율표를 어떻게 만들지 5시간가량 토의했다”며 “음식을 이용해 한눈에 구분하기 쉬운 주기율표를 제작하기로 의견을 모았고, 미리 음식 사진들을 출력해왔다”고 말했다. 

사전 토의가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2조는 7개 조 가운데 유일하게 1번부터 118번까지 모든 원소가 들어간 주기율표를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강 교사는 “하나의 통일된 기준이 필요한 작업인 만큼, 함께 주기율표를 만들 때는 제작에 앞서 충분히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조율한 뒤 작업에 임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길고도 짧은 2시간에 걸친 주기율표 제작이 끝나고 학생들은 조별로 만든 주기율표를 발표했다. 4조는 원소마다 일일이 국기를 그려 넣어 정성을 가득 담았다. 나세원 양은 “100개가 넘는 원소를 표현할 방법을 찾다가 국기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며 “구리(Cu)는 쿠바(Cuba), 네온(Ne)은 네덜란드(Netherland) 등의 방식으로, 원소 기호와 비슷한 국가 이름을 짝지어 주기율표에 나타냈다”고 말했다. 

표라는 형태를 탈피한 주기율표도 있었다. 3조는 마인드맵 형태의 주기율표를 만들었다. 정우진 군은 “비슷한 성질을 가진 원소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주기 대신 족을 기준으로 묶은 마인드맵 주기율표를 만들었다”며 “몇 주기인지 쉽게 알아보기 위해 무지개의 일곱 가지 색을 이용해 원소 이름을 적었다”고 설명했다. 3조는 원소 이름 옆에 원소를 발견한 사람과 발견 연도를 함께 넣어 주기율표에 역사적인 의미도 더했다.

이외에도 원소를 동물 이름과 짝지은 주기율표, 우리나라 지명을 이용한 주기율표, 원소의 이름과 기호를 이용해 분류한 주기율표 등 총 7개의 주기율표가 탄생했다.

학생들이 나만의 주기율표를 구상할 때 공통적으로 어렵게 느낀 부분은 바로 기존 주기율표의 존재였다. 이미 모범 답안이 나와 있는 상황에서 이를 벗어나 새로운 발상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강 교사는 “주기율표는 15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학계에서 검증된 과학적 산물인 만큼 학생들이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며 “정답이 있기 때문에 그 틀을 벗어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고 설명했다. 

강 교사는 나만의 주기율표 그리기에 도움이 될 ‘꿀팁’을 하나 공개했다. 자신만의 분류 기준을 확실히 세우라는 것이다. 이때 굳이 주기율표에 들어있는 118개 원소를 모두 담으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강 교사는 “말 그대로 나만의 기준으로 원소를 분류하는 활동인 만큼 모든 원소가 들어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며 “타당한 기준을 세워 분류할 수 있다면 필요한 원소만 취사 선택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라고 조언했다. 

실제로 3조는 주기율표를 제작하던 중 계획을 바꿔 전이원소가 포함된 3~12족을 과감하게 제외했다. 이종현 군은 “전이원소끼리는 족이 달라도 서로 성질이 비슷해 주기성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며 “성질이 비슷한 족끼리 묶어 주기성을 한눈에 보여주겠다는 원래 의도를 부각하기 위해 전이원소를 주기율표에서 생략했다”고 설명했다. 

강 교사는 “시간이 모자라 생각한 것을 모두 표현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경우가 많다”며 “주기율표를 만들기 전 충분한 여유를 두고 고민한다면, 누구나 자신만의 멋진 아이디어를 담은 나만의 주기율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곽소희 양은 “주기율표를 직접 만드니 자연스럽게 원소와 그 성질을 익힐 수 있었다”며 “특히 기존에 알고 있던 원소뿐만 아니라 평소에 잘 외워지지 않았던 다른 원소들도 쉽게 머릿속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신용수 기자 credi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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