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 루트 4000km, 100년 만의 시간여행

CBS노컷뉴스 배덕훈 기자 2019. 4. 6.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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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루트 답사①] 상하이부터 충칭까지 임시정부 루트 9박 10일 여행기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고 간다(長江後浪催前浪)'는 중국의 유명한 속담이 있다. 장강(양쯔강)의 물이 바뀌듯 영원한 것은 없다는 뜻이다. 1919년 시작된 임시정부도 일제의 탄압으로 인한 고난과 역경을 딛고 현재의 대한민국의 기틀을 만들었다. 장강의 종착지인 상하이(상해)에서 시작된 임시정부는 장강의 상류인 충칭(중경)까지 27년간의 유랑생활을 이어갔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용이했던 장강은 임시정부의 주요 이동로이자 피난처였다. 임시정부 100년, 충칭에서 상하이로 흐르는 장강의 흐름을 역으로 거슬러 임시정부 27년의 역사를 되짚어 답사를 다녀왔다. [편집자 주]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시작을 알린 상하이

임시정부 27년의 역사가 시작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그 유구한 역사의 첫 시작을 알린 장소로 떠났다.

상하이에 도착하니 부슬부슬 내리는 겨울비가 일행을 맞이했다. 한국과는 다른 낯선 공기가 감싸고 있는 이곳에서 현재 대한민국의 원류가 된 역사적 장소들이 있고, 또 그 곳을 찾아가는 여정을 이제 시작한다고 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제일 먼저 찾아야 할 곳은 마당로. 바로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푸동 공항을 출발해 상하이를 가로지르는 황포강을 건너 차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은 한마디로 이채로웠다.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은 현대식 건물들과 과거 건축 양식을 보존하며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건물들이 잘 어우러져 있었다.

아편전쟁 후 개항한 상해를 찾은 임시정부 요인들도 과거의 건물과 서양 문물이 유입돼 지어진 신식 건물들의 모습을 보고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리라. 이런저런 상념을 하는 동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 외관 (사진=배덕훈 기자)
상하이시 황포구 마당로 보경리. 이곳은 임시정부가 항저우(항주)로 이동하기 전까지 6년여 간 임시정부의 청사로 사용 된 곳이다. 전문가들은 마당로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 이전에 김신부로(현 서금이로), 하비로(현 화해중로) 등에 청사가 위치해 있었다고 말하지만, 현재는 흔적조차 사라져 이곳이 상하이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다.

청사 유적지 1층에 위치한 매표소에서 티켓을 끊고 임시정부 관련 짧은 영상을 시청한 후 본격적으로 임시정부 청사에 발을 딛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는 과거의 건축 양식을 보존하고 내부를 복원해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 관광객이 상하이를 가면 꼭 들러야 할 유명 관광지로 잘 알려진 곳이어서 그런지 비가 오는 궂은 날씨임에도 전시관 내부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청사 유적지 1층과 2층에는 당시 임시정부의 집무실과 요인들의 생활 모습을 복원, 전시해 놓고 있다. 3층에서는 임시정부 수립부터 환국까지의 역사를 소개하는 자료들을 전시돼있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 안에는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김구 선생의 모습이 복원 돼 있다. (사진=김세준 기자)
집무실에 복원된 김구 선생의 젊었을 적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좁디 좁은 공간, 두 명이 오르내리기도 힘든 좁은 계단 등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실제로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청사 가옥세가 불과 30원, 고용인 월급이 20원을 넘지 않았으니 집세 문제로 집주인에게 종종 소송을 당하였다"고 회고한다.

그만큼 어려웠던 재정 상태와 일제의 억압과 탄압을 견디며 독립 의지를 불태웠던 선조들에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삐걱거리는 좁은 계단을 올라 3층에 들어섰다. 하지만 3층 입구에 상주하는 중국인 직원은 이곳으로 들어서는 관광객들의 접근을 제지하며 통제하고 있었다.

의아한 마음을 품고 직원에게 이유를 물었다. 직원은 "비가 오는 날씨라 신발에 묻은 진흙이나 물기로 인해 전시 자료가 훼손될 수 있어 신발을 그대로 신고 입장 할 수 없다"고 말하며 신발을 감싸는 비닐봉지를 건넸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는 도심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인근에는 신천지(新天地) 등 대형 쇼핑몰이 있고, 사람들이 늘 붐비고 지하철역 또한 가깝다. 그만큼 땅값도 비싸고 개발에 대한 욕심도 있을 텐데, 자국의 역사도 아닌 타국의 역사 유적지를 보호 문화재로 지정하고 이렇듯 세심하게 관리 해주는 중국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3층에 전시된 임시정부의 역사에 대한 자료를 하나하나 확인한 뒤 이곳을 떠났다.

신천지 인근에는 '중공 1차 전국대표대회 구지'가 있다. 이곳은 중국 공산당이 최초로 생긴 곳이다. 정치적 이념을 떠나 신천지(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곳)라는 지명 인근에 한중 정부가 수립된 근원지가 이웃하고 있어 상당히 이채로웠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에 걸어서 5분여를 이동하면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의 숙소였던 영경방이 있다. 영경방은 김구 선생이 상하이에서 유일하게 가족과 단란한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부인 최준례 여사가 크게 다치고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김구 선생은 일제의 감시 등으로 문병과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 속 사실의 장소를 직접 확인 할 수는 없었다. 건물 내부가 보존되지 못하고 개조돼 음식점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다음 목적지로 떠났다.

상하이 도심 외곽에 위치한 루쉰 공원. 그 아래 홍커우 공원이라는 옛 명칭 또한 적혀있다. (사진=배덕훈 기자)
상하이 도심 외곽에 위치한 루쉰(노신) 공원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 속 상당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과거 훙커우(홍구) 공원으로 불렸고, 이곳에서 윤봉길 의사는 일본 군부와 정관계 수뇌부 7명을 처단하는 의거를 일으킨다.

"100만 인민이 하지 못했던 일을 조선 청년 1명이 해냈다" 당시 국민당 수반 장개석(장제스)의 말처럼 윤봉길 의사 의거 후 당시 중국 국민당은 임시정부의 활동에 놀라워했고 항일에 대한 의지를 담아 임시정부에 지지를 이어간다.

루쉰 공원은 우리나라의 여느 공원과 마찬가지로 산책하고 운동하는 주변 현지인들로 붐볐다. 그리고 그 공원 중심에는 윤봉길 의사 생애 사적 전시관이 있다.

루쉰 공원 안에 위치한 윤봉길 의사 생애 사적 전시관 (사진=배덕훈 기자)
윤봉길 의사의 호를 따 '매헌(梅軒)'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진 윤봉길 의사 생애 사적 전시관은 '매원(梅園)'이라는 화원 안에 위치해있다. 과거에는 이곳 매헌을 매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매화꽃이 꽃을 틔운 매원에는 윤봉길 의거 현장 표지석을 찾아 볼 수 있고, 매헌에 들어서면 윤봉길 의사의 의거와 관련한 일화와 수통 폭탄 등 재현된 자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와 마찬가지로 이곳 또한 중국 정부의 세심한 관리가 곳곳에 눈에 띄었다.

루쉰 공원 입구에서부터 매원까지 쉽게 찾아올 수 있는 한글 이정표, 매헌에서 재생되는 윤봉길 의사 의거 관련 영상과 한글 자료들, 문이 닫혀 있긴 했지만 매원 안에 위치한 한글로 된 기념품 판매점까지.. 중국 정부가 항일 투쟁에 대한 윤봉길 의사의 의기를 높이 사서 그런 것일까?

다시금 윤봉길 의사의 위대한 업적에 감사를 드리며 매헌 정중앙에 위치한 윤봉길 의사 흉상에 짧은 목례를 한 뒤 이곳을 떠났다.

이번에 찾은 곳은 임시정부와 관련한 유적지가 아니다. 중국 근현대사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했던 여인. 바로 송경령(쑹칭링)이 묻힌 무덤이다.

송경령이 누굴까? 송경령은 손문(쑨원)의 부인이며 장제스의 부인인 송미령(쑹메이링)의 언니다. 남편인 손문의 사후 송경령은 공산당 쪽에 섰고 공산당 정권 수립 후 부주석을 맡게 된다.

송경령은 자신이 죽게 되면 부모님이 묻혀있는 상해 조계지에 있는 '만국공묘'에 묻어달라고 했다.

송경령이 '만국공묘'에 묻힌 뒤 이곳은 송경령능원으로 개칭되고 기념관이 지어졌다.

지금 찾아가는 곳은 송경령능원,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만국공묘'다. 그곳에 우리 임시정부 요인들의 흔적이 있다.

임시정부 27년의 역사를 거치며 요인들도 함께 늙어갔다. 급작스런 피난생활과 환국 등 급박한 상황 속에서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이 이곳에 묻혔다.

김인전 선생과 노백린 선생 묘지 (사진=배덕훈 기자)
김인전, 노백린, 신규식, 박은식, 연병환 선생 등이 묻혀있다. 다행인 것은 90년대 이후 이분들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특히 8일 김태연 지사의 유해도 100년만에 한국 땅으로 돌아온다.

해방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아야 했던 순국 선열들께 목례를 올리고 자리를 떴다.

이외에도 상하이에는 인성학교터, 모이당, 삼일당 등 임시정부 관련 활동처가 많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곳 들에서는 현재 임시정부와 관련된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 거세진 일제의 탄압, 고난의 이동 시작된 임시정부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일제의 탄압은 거세졌다. 임시정부가 충칭에 도착해 정착할 때까지 8년 간 고난과 역경의 유랑생활이 시작 된 것이다.

임시정부가 다음으로 찾은 곳은 바로 항저우(항주)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 등을 피하기 위해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주요 요인들은 자싱(가흥)에 피신 할 수 밖에 없었다.

항저우로 가기 전 먼저 김구 선생의 피난 생활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자싱의 매만가. 이곳은 화려하고 복잡한 상하이와는 다르게 전통 양식의 가옥이 줄지어 늘어선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호젓한 길을 지나 찾아간 곳은 매만가 76호, 김구 선생 피난처다.

자싱 매만가 76호. 김구 선생 피난처 (사진=배덕훈 기자)
자싱의 김구 선생 피난처 또한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보수를 거쳐 일반인에게 개방됐다.

미국인 목사 피치와 절강성장을 지낸 중국인 저보성의 도움으로 상하이를 무사히 빠져나간 김구 선생은 이곳에서 피난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여느 중국 가옥과 비슷한 구조인 이곳에서는 특별한 곳을 찾아 볼 수 있다. 김구 선생 침실 한 켠에 숨겨진 비상 탈출구가 그곳이다.

김구 선생 침실 한켠에 숨겨진 비상통로 (사진=배덕훈 기자)
2층 김구 선생의 침실 구석 바닥에는 엉성하게 짜여진 나무 판자가 있다. 이것을 들어내면 1층으로 바로 내려갈 수 있는데, 김구 선생은 비상시에 이곳을 통해 집 뒤편 호숫가로 이동, 매여진 나룻배를 타고 피신했을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이 비상 탈출구가 침대 밑에 있어 찾기가 어려웠는데,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해 침대의 위치를 옮겨놨다고 한다.

잔잔한 호수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일제의 눈을 피해 비상 탈출구 까지 설치, 이용해야 했던 김구 선생의 긴박했던 피난 생활이 얼마나 고됐을지 어림짐작 할 수 있었다.

특히나 가족과 헤어지고 외롭고 고단한 생활 속에서도 독립 의지를 불태웠을 김구 선생의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 한켠이 아련해졌다.

김구 선생 피난처 인근에는 이동녕, 박찬익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의 숙소인 일휘교 17호도 찾아 볼 수 있다. 이 곳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김구 선생의 피난을 도운 저보성의 큰아들 저봉장의 가족과 생활을 했다.

김구 선생은 일제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하이옌(해염)으로 이동했다. 저보성의 맏며느리인 주가예의 보호를 받으며 피신했는데 재청별장이 바로 그곳이다.

재청별장 (사진=배덕훈 기자)
당시 주가예의 친정이 소유했던 재청별장 또한 현재 중국 정부의 지원 아래 보호 유적지로 잘 보존, 복원 돼 있다.

하이옌의 외곽에 위치한 이곳은 남북호(南北湖)로 둘러싸여 풍광이 운치가 있고 호젓한 곳이다. 김구 선생은 이곳에서 탁트인 호수를 바라보며 그간 답답했을 피난 생활을 조금이나마 위로 했을지도 모른다.

재청별장 뒤편에는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 장군이 세운 기념비가 있다. 이 비석에는 '음수사원 한중우의(飮水思源 韓中友誼)'라는 글귀가 적혀있는데 '물을 마실때 그 근원을 생각하듯 한국과 중국의 우정을 생각하자'는 뜻이다. 김구 선생의 피난을 도운 중국인에 대한 고마움이 담겨있다.

정말로 저보성과 그의 가족들이 없었다면, 임시정부가 유지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다시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김구 선생도 백범일지에 주가예와 재청별장에 이르렀을 때의 일화를 소개하며 감사를 표했다.

"저 씨 부인(주가예)은 굽 높은 신을 신고 7~8월 불볕더위에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산 고개를 넘었다. 저 씨 부인의 친정 여자하인 하나가 내가 먹을 식료·육류품을 들고 우리를 수행하였다. 나는 우리 일행이 이렇게 산을 넘어가는 모습을 활동사진기로 생생하게 담아 영구 기념품으로 제작하여 만대 자손에게 전해줄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활동 사진기가 없는 당시 형편에서 어찌할 수 있으랴. 우리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우리 자손이나 동포 누가 저부인의 용감성과 친절을 흠모하고 존경치 않으리오. 활동사진은 찍어두지 못하나 문자로나마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이 글을 쓴다"

김구 선생은 이 재청별장에서 반년 간의 피난 생활을 이어가다 다시 자싱으로 이동하게 된다.

자싱에 도착한 김구 선생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선상생활을 했다. 김구 선생은 당시의 고된 피난생활을 읊조리듯 백범일지에 "오늘은 남문 호수에서 자고 내일은 북문 강변에서 자고 낮에는 땅 위에서 행보나 할 뿐이었다"며 회고했다.

이 당시 외로웠을 김구 선생을 옆에서 지켜준 조력자가 있다.

선상생활을 함께 했던 여성 뱃사공 주애보가 그 주인공이다. 김구 선생은 이곳 자싱에서 외롭디 외로웠을 피난 생활을 그녀와 함께 버텨냈을 것이다.

항저우(항주)에는 현재 임시정부 청사 사적지 2곳과 임시정부 요인 거주지 등의 유적지가 남아있다.

당시 임시정부 청사는 항저우에 있었지만 임시의정원 회의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자싱이나 난징(남경) 등지에서 개최됐다.

항저우에 도착한 임시정부가 가장 먼저 청사로 사용한 것은 청태 제2여사였다. 이후 국민당의 도움으로 장생로 호변촌 23호에 청사를 마련했는데, 이곳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항저우 임시정부 청사 구지(옛 지역)다.

항저우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 (사진=배덕훈 기자)
이곳 또한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전시관으로 개보수 돼 일반인에 개방돼 있으며, 임시정부 역사와 관련 자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조선족 해설가의 한글 설명 속 전시관을 둘러보면 우리나라의 여느 기념관과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먼 타국에서 우리나라 역사 속 위인에 대한 설명을 현지인에게 들으니 남다른 감동이 느껴졌다.

1935년 11월 임시정부는 전장(진강)으로 근거를 옮겼다.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난징과 좀더 가까운 곳으로 이동해 수월하게 교섭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현재는 회족(이슬람계 소수민족)이 다수 살고 있는 전장에서의 임시정부 유적지는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다만, 김구 선생이 '항일에 대한 내용'으로 강연을 한 것으로 알려진 목원소학교 부지에 전장에서의 임시정부 사료를 모아, 전시해 놓은 임시정부 사료 진열관이 위치해 있다.

중국에서 찾기 힘든 또 다른 이국적인 형태의 가옥들 안에서 찾은 임시정부의 흔적은 새로운 느낌이었다.

구불구불 소로를 따라 찾아 간 전장 임시정부 사료 진열관은 단층짜리 소박한 느낌의 건물이다. 전장에서 거의 유일하게 임시정부 자료가 전시돼 있는 곳이기도 하고, 임시정부의 흔적을 따라 가는 현재의 답사를 가는 중 잊혀 질지 모르는 전장 임시정부 2년여 기간의 내용이 남겨져 있는 곳이라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전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료 진열관 정문. 우측에 보이는 단층짜리 건물이 바로 그곳이다. (사진=배덕훈 기자)
임시정부 사료 진열관에 들어서자 김구 선생 흉상과 함께 이곳에서의 임시정부 활동이 세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전장에 이어 찾은 난징은 임시정부 유적지는 없지만 독립운동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김구 선생은 자싱에서의 선상생활을 마치고 난징으로 이동한 후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위장 부부 생활을 한다. 이때 부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 앞서 언급했던 주애보다.

김구 선생은 난징에 있는 회청교에서 고물상 행세를 하며 일제의 눈을 피했다. 다시금 찾아 본 회청교에는 그 때의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회청교를 둘러보며 고물상으로 위장한 김구 선생의 모습을 가슴에 담았다.

이어 김구 선생이 한인청년들을 모집하여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교시킬 목적으로 교육을 실시했던 한인 학생훈련소 사무소가 있던 곳인 동관두를 찾았지만, 이곳 역시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난징시 외곽에도 독립운동에 대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황룡산 중턱 건물들 사이에 난 오솔길을 따라 산 속을 오르다 보면 천녕사를 찾을 수 있다.

천녕사라 씌여진 표지 (사진=자료사진)
안내표지도 없고 길 또한 험해 찾기 어려운 곳이지만 이곳에서 조선 청년들은 독립 의지를 굳건히 다졌다.

이역만리 타국의 깊은 산속, 자주 독립을 열망하며 피와 땀을 흘렸을 선조들의 모습이 떠오르자 괜시리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은 듯 이 곳은 폐가나 다름없는 건물들이 방치된 상태로 남아있다. 폐가처럼 남아 있는 이 건물이 과거 조선 청년들이 훈련하고 생활했던 터전은 아니라고 한다.

과거 중국 정부가 천녕사 터를 다른 목적으로 복원했고 현재는 그 건물조차 폐허가 돼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건물은 사라졌지만 천녕사 터 입구에 남아있는 두 그루의 아름드리 나무는 이곳에서 훈련을 받으며 피와 땀을 흘린 조선 청년들의 기상을 알리듯 굳건히 서 있었다.

폐허가 된 곳을 둘러보니 이곳을 찾은 한국인이 놓고 간 듯 놓여진 무궁화 꽃이 보였다. 이 꽃이 피와 땀을 흘리며 독립을 염원했던 선조들의 넋을 조금이나마 달래줬을 것이다.

◇ 중일 전쟁 발발, 그리고 임시정부 그 피난의 길

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요인들도 곧장 난징을 탈출하게 되는데 이후 자리잡은 곳이 창사(장사)다.

난징을 탈출한 임시정부가 창사부터 종착지인 충칭에 도착하기까지 머물렀던 도시는 4곳(창사->광저우(광주)->류저우(유주)->치장(기강))인데 머문 기간은 채 3년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짧게 머무를 수 밖에 없었던 창사에서도 임시정부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임시정부 청사가 있던 곳으로 알려진 서원북리에서도 정확한 청사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곳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임시정부의 활동 장소로 알려졌고, 김구 선생이 피격 당했던 남목청 역시 그 흔적을 찾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찾아가는 길 곳곳 건물들이 개발을 위해 허물어져 있었고, 안내 표지 또한 찾기가 어려웠다.

문이 굳게 닫혀 있는 남목청 (사진=배덕훈 기자)
어렵사리 찾은 남목청은 현재 아쉽게도 내부 보수 중이라며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주위를 둘러 살펴보니 아직 개발의 손이 닿지는 않은 듯 주변은 옛날 모습 그대로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다행히 남목청은 내부 보수를 한 뒤 다시 개방한다고 한다.

남목청 이후에 찾은 곳은 상아의원이다. 김구 선생이 피격을 당한 뒤 이송 된 곳으로 알려져있는 곳이다.

당시 의사들이 김구 선생이 죽을 것이라 여겨 치료를 하지 않았지만 서너시간 후에도 살아 있자 뒤늦게 희망을 갖고 치료해 살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현재 상아의원은 중남대학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돼 있는데 이곳 역시 내부 보수중이라 관계자가 진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였던 김구 선생의 목숨을 살린 상아의원 밖에서 고마운 마음을 담아 사의를 표하고 장사를 떠났다.

◇ 광저우에서 만난 조선인의 기개

창사에 이어 찾은 곳은 광저우다. 광저우 또한 임시정부 유적지가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광저우 임시정부 청사로 확인된 동산백원 (사진=배덕훈 기자)
백범일지에 언급된 '동산백원'이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됐는데, 멸실된 것으로 알려진 이 유적지가 최근에야 남아있는 곳으로 확인됐다. 광저우시 휼고원로(恤孤院路) 12호에 위치해 있는 건물이 바로 그곳이다.

이곳은 지금도 현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기우뚱 서 있는 나무와 오래된 건축 양식의 건물을 보면 그 긴 세월을 느낄 수 있다.

휼고원로 지명과 관련 현지 관계자는 "과거에 외국인 신부들이 고아들을 모아 생활했던 고아원이 있던 곳"이라면서 "이후 외국인들의 투자가 많이 이어져 발전한 광주 대표적인 부촌"이라고 설명했다.

상하이 만큼 발전한 도시인 광저우, 그리고 그 광저우 안 부촌이라고 알려진 이곳에 아직까지 과거 건축물로 남아있는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를 보니 이색적이었다.

동산백원과 멀지 않은 곳에 중국 공산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 구지가 있다. 당시 이곳에서 공산당은 국민당과의 '국공합작'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상하이에서와 마찬가지로 광저우에서도 우리나라 임시정부 이웃에 중국 근현대사 속 역사적 사건이 겹쳐 있었다.

광저우를 가로지르는 주강 안 황포섬에 위치한 황포군관학교는 중국 최초의 현대식 군관학교다. 이곳은 현재 해군부대가 주둔해 있고, 강 위에는 군함이 정박해 있어 현재까지도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황포군관학교는 1924년 국공합작 이후 소련의 지원 속에 국민당과 공산당이 같이 참여해 지어졌는데, 당시 조선 청년들의 입교도 허락됐다.

이곳에서도 자주독립의 열망을 품은 수 많은 조선 청년들이 피와 땀을 흘렸다. 항일 투쟁의 선봉에 서지 못하고 중국의 내전에 희생됐던 청년들도 있었다.

황포군관학교 인근에 위치한 동정진망열사묘는 광저우 군벌인 진형명의 난을 제압하기 위해 벌인 전투에서 사망한 황포군관학교 재학생들의 시신을 안치한 묘지다.

이곳 가장 안쪽에 두명의 조선 청년이 잠들어있다. 황포군관학교 6기생 동기인 김근제와 안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전투에서 사망한 황포군관학교 재학생 및 예비 입학생들이 묻힌 무덤. 이곳에 조선 청년인 김근제와 안태가 있다. (사진=연합뉴스)
학생들의 묘비가 세워진 곳에 함께 위치한 이 두 명의 조선 청년 묘비에는 한국인임을 알리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외에 이 두 청년의 자세한 내력은 찾기 어려웠지만, 조국 독립의 열망을 품고 이역만리 타국에서 드높인 조선인의 기개는 선명하게 남아있는 듯 보였다.

이곳 동정진망열사묘 구석 한켠에는 색바랜 비석이 하나 우뚝 서 있다. 그 비석에는 '정기장존(정의로운 기개는 길게 보존된다)'라는 문구가 써져 있다.

이 비석의 문구처럼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타국에서 스러져간 조선 청년들의 기개는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름답게 꼿꼿이 보존되어 가고 있었다.

광저우를 떠나 찾은 류저우(유주) 역시 임시정부 유적지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 중 임시정부 요인들이 유주에서 잠시 머물렀던 곳인 낙군사는 류저우에 있는 임시정부의 대표적인 흔적이다. 노란색의 독특한 서양식 건물로 건축된 이 건물은 류저우시 정부와 우리나라 독립기념관에서 '임시정부 항일투쟁 활동 진열관'으로 꾸몄다.

류저우 임시정부 항일투쟁 활동 진열관(낙군사). 아쉽게도 이곳도 내부 보수 중이라며 개방을 하지 않고 있다. (사진=배덕훈 기자)
낙군사 외벽 안내판에는 이곳의 내력과 함께 흥미로운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1943년 당시 베트남 독립운동을 준비했던 호치민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한국과 베트남의 요인들이 이곳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머물렀다는 점이 이채로웠다.

류저우에서는 또 한국광복진선청년대가 활동했다. 전면에 나서 전투부대로 항일투쟁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중국인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등의 활동을 통해 투쟁을 이어갔다.

이들이 중국 부상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한 공연을 펼쳤던 장소인 배신로 68호와, 임시정부를 따라 치장으로 이동하기 전에 기념사진을 찍었던 유후공원에서는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 사라져가고 있는 임시정부 역사의 흔적

답사 막바지에 이르러 도착한 치장. 이곳에 위치한 임시정부 유적지에서는 충격적인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상하이부터 류저우까지 그간 찾아본 임시정부의 유적지들은 잘 보존되거나, 혹은 아예 흔적 조차 사라진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발견한 임시정부의 흔적은 '사라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유적지였다. 조금만 더 관심과 지원이 있다면 보존될 수 있는 유적지가 현재 위태로운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치장에서의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됐던 곳은 현재 위치를 추정만 할 뿐 흔적이 남아있지 않지만 임시정부 요인들이 살았던 곳을 찾아보니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이동녕 선생이 살았던 곳이 바로 그렇다. 다른 요인들과 가족들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이미 없어졌지만, 이동녕 선생의 거처는 아직 이곳에 남아있었다.

치장 이동녕 선생 거처 터 (사진=배덕훈 기자)
양쪽에 지어진 현대식 건물들 사이에 남아있는 이동녕 선생 거처는 그야말로 스러지기 직전인 폐가 모습 그 자체였다.

그나마 집 벽에 '한국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 구거지'라는 안내판을 통해 이 곳이 임시정부 유적지임을 알아볼 뿐 언제고 철거될 지 모르는 그런 상황이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한평생 싸워나갔지만, 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이곳 기강에서 유명을 달리한 이동녕 선생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만 더 우리가, 정부가 관심을 기울이면 보존이 될 수도 있었지만 사라져가는 모습을 목도하니 안타까운 마음 또한 컸다.

이동녕 선생의 거처를 확인한 뒤 취재를 통해 이동녕 선생의 묘지로 알려진 곳을 찾았다. 현재는 유치원으로 운영이 되고 있다고 하는데, 최근까지 이곳 한편에 묘비가 남아 있어 이동녕 선생 묘지라고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동녕 선생 묘지가 있었다는 것으로 추정되는 유치원 터. 현재는 아무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 (사진=김세준 기자)
하지만 어렵사리 찾아가 본 그 곳에서는 그 묘비조차 사라져 있었다. 이동녕 선생 묘지였던 역사적 장소가 사라진 것이다. 유치원 관계자에게 묘비의 행방을 물어보니 "모른다"는 대답만 공허하게 돌아왔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종착지 충칭에 도착하다

기나긴 피난 생활을 마치고 충칭에 도착한 임시정부. 그 임시정부의 가족들은 충칭 외곽에 있는 토교에 뿌리내렸다.

재정적 어려움은 남아있었지만 국민당의 원조로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이곳에서 비교적 평범한 일상을 살게 됐다.

충칭 철강공장 안에 위치해 있는 토교 한인촌은 현재 집터만 남아있다. 이곳에는 세 채의 집이 지어진 터와 함께 '한인 거주 옛터'라고 적혀진 비석이 남아있다.

오랜 피난 생활을 끝내고 밭을 일구며 소중한 생활을 보냈을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듯 했다.

하지만 이 곳도 철강공장의 이주와 개발 등으로 인해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고 현지 관계자는 전했다. 이곳의 보존 역시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진 숙제였다.

토교 한인촌을 뒤로하고 향한 곳은 화상산 한인 묘지터다. 이곳 역시 정확한 안내표지 등은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위치를 찾기가 어려웠다.

어렵게 찾은 이곳 역시 중국에서 활동한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이 묻혔던 묘지 터라는 역사적 사실만 남아있고 그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김구 선생의 모친인 곽낙원 여사와 장남 김인도 이곳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광복 후 이들의 유해는 김신 장군이 국내로 모시고 왔다.

해방을 앞두고 머나먼 타국에 묻힌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에 짧게나마 묵념을 표하고 마지막 장소로 떠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총 4곳의 청사를 사용했다. 양유가, 석판가와 오사야항 그리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연화지가 그곳이다.

양유가와 석판가에서 사용했던 청사 건물은 일본의 폭격 등으로 인해 현재는 사라진 상태다. 오사야항 또한 최근까지는 비석으로 그 위치를 가늠했는데, 현재는 개발로 인해 그 비석조차 사라지고 공사장으로 변했다.

오사야항에서 5분여를 걸어가자 낯익은 정문이 눈에 띄었다. 임시정부 27년의 역사 동안 유일하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현판을 걸고 활동했던 연화지 38호가 그곳이다.

충칭의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 연화지 38호 (사진=배덕훈 기자)
중국 내 임시정부 청사 중 가장 큰 규모인 이곳에는 다섯동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각 건물에는 외교부, 재무부 등 정부의 각 부처별 사무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 전시실에는 그간의 임시정부의 역사와 함께 중경에서의 활동이 자세하게 적혀있다.

고난과 역경의 역사를 딛고 하나의 정부로써 임시정부 요인들이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지난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이곳을 찾으며, 충칭 임시정부 시절을 기리고 계단 앞에서 환국 환송 사진을 재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 임시정부 유적지 또한 아직 완전하게 개방된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많은 양의 자료가 보관실 안에 쌓여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충칭 임시정부 유적지에서 만난 현지 관계자는 "이 곳 임시정부의 약 60% 정도의 자료가 아직 미공개 상태"라고 설명했다.

보안 문제, 한중 양국 간 협의 문제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하루 빨리 이러한 자료들이 공개돼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임시정부의 업적을 기록하고 후세에까지 널리 전달하기 위해 확실히 보존해야 한다.

임시정부 100년을 맞아 돌아 본 임시정부 27년의 역사. 되짚어 가며 찾아 본 그 흔적은 후손들인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한민족이란 말이 무색하게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분열된 현재의 우리 사회에 임시정부 큰 어른은 과거에 이미 경종을 울린 바 있다.

기강에서 병사하신 이동녕 선생이 마지막으로 동지들에게 당부하며 남긴 말인 '대동단결(大同團結)'이 바로 그것이다.

이동녕 선생이 바랐던 것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된 마음으로 단결해 독립운동을 감행했던 순국 선열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헌신과 발자취를 기록, 보존해 후세에까지 전해야 할 것이다.

글 싣는 순서
① 임정 루트 4000km, 100년 만의 시간여행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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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배덕훈 기자] paladin703@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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