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아프리카 외딴섬 청년은 어떻게 여행 스타트업 왕자가 됐나

안영 기자 2019. 4. 6.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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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예약 1조원 돌파 '클룩' 창업 에릭 녹 파
모리셔스의 '언더독'
중국인 2%뿐인 영국령 어린시절 내내 '소수 민족' 美 시골 대학으로 유학
모건 스탠리 관두고
아이비리거 제치고 들어간 투자은행, 네팔 여행 중 느낀 바 있어 과감히 사표
포브스 선정 '젊은 기업인'
홍콩아파트 팔아 창업자금 '즉시 예약, 당일 여행' 적중 "한국 엔터에 큰 잠재력"
글로벌 여행 예약 플랫폼 ‘클룩’ 공동 창업자 에릭 녹 파의 출장 차림. 배낭 하나, 캐리어 한 개 들고 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날아간다. 이 ‘지금 바로’ 정신으로 세계적인 여행 스타트업을 일궜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너 혹시 아프리카 왕자 아냐?"

홍콩 모건스탠리에 처음 입사했을 때 동료들이 그를 보고 놀렸다. 아프리카 남동부의 외딴 섬나라 모리셔스에서 태어났다. 미국 아이비리그 명문대 출신이 버글버글한 유명 투자은행인데 미국 시골의 작은 대학 출신이다. 특별한 이력도 없었다.

"저를 키운 건 언더독(underdog·약자) 정신입니다. 인생 내내 소수자로 살았어요." '클룩(Klook)'의 창업자 에릭 녹 파(32)씨가 웃으며 말했다.

'Keep Looking(계속 찾는다)'이라는 의미를 담은 '클룩'은 최근 주목받는 글로벌 여행 예약 애플리케이션이다. 전 세계 250개 도시 8만여개 체험 여행 상품을 예약할 수 있는 플랫폼. 월 방문자는 2000여만명이다. 2014년 설립 이후 총 3억달러(약 3400억원) 투자를 유치했다. 관련 업계에서 최고 수준이다. 지난해 거래액은 1조원에 달했다. 에릭 녹 파는 2017년 포브스 선정 '30세 이하 유망 기업인'으로 선정됐다. 5월 14~15일 열리는 제10회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의 연사이기도 하다.

그를 지난 2일 서울 역삼동 한국지사에서 만났다. 얼마 전까지 공유 오피스에 있던 한국지사는 최근 역삼동의 한 고층빌딩 20층으로 옮겼다. 이날은 신사옥 오프닝 날이었다. 사무실 한쪽엔 돼지머리 케이크와 북어, 시루떡이 쌓여 있었다. "한국식으로 고사를 지냈어요. 절도 하고요. 떡 드실래요?" 그가 건네는 시루떡 한 조각을 받아들며 그의 짧지만 강렬한 인생 얘기를 들었다.

'강한 약자'로 살다

―투자 은행을 다니다가 어떻게 창업할 생각을 했나.

"나고 자란 모리셔스는 '문화의 멜팅폿(용광로)'이었다. 서양식 교회, 이슬람 모스크, 동양의 정자가 공존한다. 여기서 착안했다. 여행을 통해 전 세계가 함께하게 되는 것. 여행의 불편함을 해소해서 좀 더 서로 문화를 잘 받아들이도록 기여하는 것. 그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친구인 이썬 린(공동창업자)과 함께 네팔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언어도 안 통하고, 여행자 가격과 현지 가격이 너무 달라 애먹었다. 이런 불편함을 당장 해결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창업 의지에 스파크가 일었다."

―유명 투자은행을 관두고 스타트업을 만들었다.

"투자은행을 그만두면서 갖고 있던 홍콩의 작은 아파트를 팔았다. 그걸로 종잣돈을 마련해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전 재산을 걸고 도전하고 싶었다. 성공은 중요하지 않았다. 뭔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에 끌렸고, 돈으로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큰 기회에 베팅했다. 직장이나 학교에선 알 수 없을 '큰 배움'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투자은행 경험이 창업에 도움이 됐나.

"처음엔 아니었다. 초창기엔 투자받으러 다닐 때 매번 문전박대당했다. 투자자들 관점에서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건 모험이다. 사업을 성공시킨 경험이 있는 사람을 선호한다. 그들이 보기에 나처럼 투자은행 경험만 있는 사람은 그냥 '영업사원' 같은 거다. 파워포인트나 열심히 만들어서 스토리 하나를 끼워 파는 세일즈맨. 물론 지금은 그게 아니란 걸 증명했지만(웃음)."

―저력은 어디에서 왔나.

"모리셔스는 아프리카의 섬나라이고, 인도계가 90%를 차지한다. 2%에 불과한 중국계로서 어린 시절 내내 주류가 아니었다. 대학에 진학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모리셔스는 영국령이기 때문에 다들 영국으로 유학 가는데 나는 미국으로 갔다. 그것도 시골의 덜 알려진 작은 대학(프랭클린앤드마셜 칼리지). 2학년 때부턴 닥치는 대로 인턴을 했다."

―악전고투였을 것 같다.

"늘 '강한 약자'가 되려 했다. 끊임없이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소수자이지만 얼마든지 잘 풀릴 수 있고, 아이비리그 명문대를 나오지 않아도 투자은행에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좀 다른 배경을 가져도 충분히 잘살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밀레니얼의 '지금 바로' 정신

―여행 전문가다. 한국에서 인상적인 게 있다면.

"엔터테인먼트 분야 잠재력이 크다. 요즘 한국의 EDM 페스티벌에 관심이 많다. '월드 클럽 돔' 'EDC' 등 이번에 새로 한국에 진출하는 EDM 페스티벌이 있는데 클룩에서 독점권을 땄다. 벚꽃도 매력적이다. 보통 외국인들이 벚꽃이라고 하면 일본을 생각하는데, 한국 와보니 일본 못지않게 예쁘더라. 그래서 진해 군항제, 인천, 남이섬 벚꽃 전용 투어를 만들었다. 외국인에게 한국을 새로운 '벚꽃의 상징'으로 알리고 싶다."

―아무래도 사용자가 젊은 층이 많다.

"밀레니얼 세대는 '쉽고 빠르고 편리하게'를 중시한다. 우리 서비스도 이들을 겨냥해 'right away(지금 바로)'에 포인트를 뒀다. 즉시 예약 가능, 당일 이용 가능한 상품이 클룩의 장점이다. 기술력도 한몫했다. 예를 들어 홍콩 공항철도 AEL를 이용할 때, 클룩 QR 코드를 개찰구에 있는 리더기를 찍으면 별도 절차 없이 바로 들어갈 수 있다. 이 기술을 공항철도 회사와 공동으로 개발했다. 우리 플랫폼을 이용해 교통편부터 관광지 입장, 액티비티까지 최대한 '전용 패스트트랙으로' 빠르게 이용할 수 있게 만들고 있다.

―비슷한 여행 플랫폼들이 한국에도 있다.

"클룩은 글로벌하다. 전 세계를 발견할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한다. 20개국에 지사가 있기 때문이다. 각 지사에서 현지 업체들과 협업해 특화 상품을 만든다. 반면 로컬 회사들은 손발이 묶여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에게 외국 상품을 친절하게 소개할 순 있어도, 현지화된 외국의 문화 자체를 느끼게 하는 부분은 미흡하다. 우리는 현지 문화 고유의 개성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현지화를 특히 강조하는 것 같다.

"모리셔스는 관광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를 지녔다. 그걸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새로운 나라에 진출하면 항상 현지 경제에 어떻게 기여할지를 생각한다. 현지 업체와 상생하고, 지사에 현지인들을 고용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그래서 현지 문화가 역으로 전 세계로 더 잘 퍼질 수 있게 하고 싶다."

그에게 목표를 물었더니 함박웃음 지으며 말했다. "The sky is the limit(한계는 하늘 끝입니다)." 하늘처럼 한계가 없기에 수치화된 목표도 없단다. "우리의 사고방식은 '창업가 정신' 그 자체입니다. 이 업계의 리더이고 선두주자이기 때문에 모든 걸 개척한다는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다. 앞선 누군가를 벤치마킹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와 경쟁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나아가려고요." 밀레니얼 세대의 창업가 정신이 반짝 빛났다.

About 에릭 녹 파

2004년 프랭클린앤드마셜 칼리지 입학
2008년 홍콩 모건스탠리 입사
2014년 글로벌 여행 예약 플랫폼 ‘클룩’ 창업
2018년 총 3억달러(약 3400억원) 투자 유치, 거래액 1조원 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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