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벚꽃은 잎보다 꽃이 먼저 피잖아.. 그것도 성격 탓이지, 성격

이기호·소설가 2019. 3. 30. 03: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연애소설] 벚꽃과 그녀의 성격
일러스트= 박상훈

벚꽃이라면 여의도 윤중로도 좋고, 쌍계사 꽃그늘 터널 또한 빠지지 않지만, 그래도 그에게 있어 언제나 첫 번째는 전남 보성군 대원사 가는 길에 늘어선 왕벚나무들이다. 그는 육 년 전 이맘때, 밤마다 그 꽃나무 둥치를 내려다보며 두 시간씩 혼자 걷곤 했는데, 그러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보면 운동화 끈 사이사이에 누군가 흘린 식빵 부스러기 같은 꽃잎들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이틀에 한 번씩 탁탁, 사납게 운동화를 문턱에 대고 털어냈다.

당시 그는 서른여섯 살이었고, 사 년 동안 버티고 애쓰던 IT 회사를 최종적으로 말아먹은 처지였으며, 지지부진하던 연애는 이미 육 개월 전에 끝나버린 상태였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연금 대신 퇴직금을 받아 아들의 사업에 몽땅 밀어 넣었던 그의 아버지는 공공 근로를 다니는 노인이 되어 있었고, 퇴행성관절염을 앓고 있던 그의 어머니는 치료 시기를 놓쳐 보행기 없이는 한 발짝도 걸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수중에 남은 것이라곤 은행 빚 1억7000만원뿐. 살고 있던 원룸 보증금 2000만원을 은행으로 보내는 대신 아버지의 계좌로 송금한 뒤 그가 찾은 곳이 바로 대원사였다. 거기 공부방이 따로 있거든. 그냥 한두 달 머리나 식히고 와. 시주는 내가 따로 해놓을 테니까. 그가 사업을 벌이기 전, 함께 직장 생활을 했던 동료 K가 찾아와 그렇게 말해주었다. K는 그가 창업하는 것을 끝까지 말린 유일한 사람이었다. 사업 초창기 지자체 혁신 기업으로 선정돼 장려금을 받았을 때, 그는 K를 만나서 왜 그렇게 사업 시작을 말렸는지 웃으면서 따져 물은 적이 있었다. '그냥, 자네 성격 때문에.' '내 성격이 뭐?' '쉽게 상처받잖아. 그걸 잘 감추지도 못하고.' '내가? 에이, 그건 자네가 날 몰라서 하는 얘기야.' '지금 나 만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그런 거 때문 아닌가?'

K는 머리를 식히고 오라고 했지만, 그는 애초에 그럴 마음이 없었다. 머리를 식히다니, 그건 너무 가진 자의 말이 아닌가? 역시나 K는 나를 잘 모르는군. 그는 해가 떠 있는 동안엔 대웅전에서 멀찍이 떨어진 별채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신 밤이 깊어지면 컵라면 하나를 끓여 먹고 절 밖으로 걸어 나왔다. 대원사 주차장에서부터 구불구불한 이차선 도로를 한 시간 가까이 걸어 나가보면 남해까지 이어진 18번 국도가 나왔다. 그 국도에 닿기 전 작은 절벽 아래 있는 굵은 왕벚나무에서 끝내 버려야지. 그는 험악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벚꽃이 하나둘 터지기 시작한 3월 말이었다. 작은 꽃망울을 볼 때마다 그는 자주 아버지·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만 없으면, 나만 사라지면, 그나마 그편이 일을 조금이라도 단순하게 마무리하는 게 아닐까. 그는 매일 밤, 그 생각을 하면서 걸었다.

그녀가 대원사로 찾아온 것은 4월 둘째 주 월요일이었다. 육 개월 전에 헤어진 그의 애인 성희정. 방에서 담배를 피우려고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는데, 벌컥 방문이 열리면서 그녀가 들어왔다.

"뭐야, 코스닥으로 간다고 큰소리치더니, 이젠 스님이 되려는 거야?"

그녀는 마치 엊그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방 한가운데 주저앉아 생수를 페트병째 들고 마셨다. 야아, 역시 절에서 마시니까 삼다수도 달다, 달아.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선 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로부터 딱 나흘 동안만 그곳에서 머물다가 떠났다. 대원사 주차장 바로 앞에 있는 민박집이 그녀의 거처였는데, 식사 때마다 그를 불러냈다. 야, 여기 식당은 혼자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없어. 어떻게 된 게 죄다 전골뿐이야. 그녀는 식당 탁자 앞에 앉은 그를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는 그녀가 처음 나타났을 때 저도 모르게 반갑고 가슴 한편이 일렁인 것도 사실이지만, 이내 다시 침울해졌고 그러다가 까닭 없이 그녀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물어보지 않아도 그녀를 이곳까지 보낸 사람은 K가 맞을 테니까. 그녀와는 3년을 연애했고 결혼까지 생각했지만, 정작 먼저 이별을 고한 쪽은 그 자신이었다.

나흘 내내 그는 밤마다 그녀와 함께 벚꽃길을 걸었다. 벚꽃은 이제 거의 다 떨어졌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꽃잎과 가지에 남아 있던 꽃잎이 서로 경계 없이 한곳에서 흩날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 서면 흩날리는 벚꽃잎은 마치 반딧불이처럼 어둠 속에서 반짝였는데, 그때마다 어쩐지 이 세상 풍경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 풍경 아래에서 그는 속으로 계속 그녀에게 화를 냈고, 그녀는 말없이 걷기만 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내기라도 하면 바로 함부로 꺾인 나뭇가지처럼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는데, 그녀는 말없이 걷기만 했다. 흠음음음. 낮게 허밍으로 알 수 없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게 전부였다.

떠나기 전날, 또 같이 앉아서 버섯 전골을 먹는데, 그녀가 국자로 국물을 떠주면서 말했다.

"성격이라는 거 말이야. 누구한테 들은 건데, 그게 다 생존 본능으로 만들어진 거래."

그는 못 들은 척했다.

"포악한 아버지 밑에서 살아남으려면 거기에 맞는 성격이 필요한 거고, 형제 많은 틈바구니에서 자라나려면 또 거기에 맞는 성격이 있는 거고, 이상한 선생님을 만나면 거기에 따라서 성격을 맞춰야 하는 거고…. 그게 다 살기 위해서 그렇게 만들어진 거래."

"그 얘기를 나한테 왜 하는 건데?"

그가 쌀쌀맞게 물었다.

"그냥, 벚꽃도 다 그런 거 같아서. 쟤네들은 잎보다 꽃이 먼저 피잖아. 그것도 다 성격 때문이지, 뭐. 불쌍한 성격."

그녀의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떠날 때도 올 때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손까지 흔들어주면서 버스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는데, 그런 그녀 위로 이제는 꽃잎보다 잎이 더 많아진 왕벚나무가 길게 길게 서로에게 가지를 뻗으면서 서 있는 게 보였다. 꽃잎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던 가지들이었다. 그는 하마터면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가지 말라고, 며칠만 더 있어 달라고, 소리칠 뻔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버스가 도착했고, 그녀의 모습은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대원사에서 짐을 챙겨 다시 서울로 상경한 것은 그로부터 다시 사흘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는 그 사흘 동안 줄곧 잎보다 먼저 피는 꽃의 성격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아울러 헤어진 애인을 위해 대원사까지 내려온 그녀의 성격에 대해서도. 그 생각이 그로 하여금 다시 짐을 싸게 만들어 주었다.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