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임정 百주년](57) '미스터 션샤인'으로 부활한 황기환

2019. 3. 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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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때 도미 미군으로 1차대전 참전..유럽에 남아 독립운동 전개
파리위원부 서기장으로 '고군분투'.."독립 아니면 죽음을 달라"
마흔에 요절, 96년째 뉴욕서 쓸쓸히 잠들어..11년 전 묘지 발견

(뉴욕=연합뉴스) 이귀원 특파원 =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 유진 초이(Eugene Choi·이병헌 분)는 허구의 인물이 아니다. 그와 같이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실존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돼 조선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애국지사 황기환(출생연도 미상∼1923) 선생이 그 주인공이다.

독립운동가 황기환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가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군으로 참전하는 등 특이한 이력의 황기환은 유럽과 미국에서 대한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치다 마흔의 나이에 요절했다.

황기환은 평남 순천 출생으로 10대 후반이던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지원병으로 입대, 유럽 전선에서 중상자 구호를 담당했다.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황기환은 김규식의 제안을 받고 1919년 6월 초 프랑스 파리로 이동,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부에 합류했다.

파리강화회의 대한민국위원 겸 대한민국 파리주재 한국대표부 대표위원이었던 김규식 등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호소했지만 파리강화회의는 1919년 6월 28일 폐회 때까지 한국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후 한국대표부는 파리위원부로 개편됐고 황기환은 파리위원부 서기장에 임명됐다.

같은 해 8월 김규식이 미국으로 떠난 후 황기환은 파리위원부의 실질적 책임자로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강대국들을 상대로 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한편 홍보 활동 등을 전개했다.

1920년 1월 열린 프랑스 지리학회에 참석, 서툰 불어로 "우리는 독립을 이룰 때까지 일본에 맞서 싸우겠다"고 밝혔다. 당시 파리에서 활동하던 베트남 독립투사 호찌민(베트남 국가주석)도 참석했지만, 발언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일본이 발표한 한국 통치방침에 대해 프랑스 신문 '라 프티 르프브리크'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이 요구하는 것은 일본이 주장하는 자치나 개혁이 아니라 "일본이 강탈한 권한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이양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1920년 10월에는 런던에서 열린 '대영제국 한국친우회'에 참석해서는 "종교의 자유도 양심의 자유도 어떠한 자유도 없는 한국인 황기환이 런던에 온 이유는 민주주의의 원천이며 세계의 고통받는 민족들의 등대이기에, 그리고 1883년 한영조약 체결 이후 좋은 친구였으니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1921년 6월 프랑스의 '한국친우회' 결성식에서는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짤막한 연설을 하기도 했다.

'자유한국'(La Coree Libre)이라는 잡지를 프랑스어와 영어로 발간해 유럽의 각 언론기관과 정부, 저명인사들에게 보냈다. 당시 자유한국 서문에서 "우리의 목적은 우리 조국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라고 발간 목적을 밝혔다. '구주의 우리사업'이라는 간행물도 발간했다.

황기환은 1919년 러시아와 북해를 거쳐 영국까지 흘러들어온 한인 노동자들이 일본으로 송환될 뻔한 것을 영국 정부를 설득, 이들 가운데 35명을 프랑스로 이주시키는 데 성공했다.

재불 한인동포 1세대가 된 이들은 3·1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 1일 프랑스 소도시 쉬프에 모여 '대한독립 만세' 삼창을 하며 독립을 외쳤다. 또 '재법한국민회'를 조직해 모금한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2년여간 파리위원부와 런던사무소의 실질적 책임자였던 황기환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강화회의에서 미해결된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열린 '워싱턴회의'를 준비 중이던 이승만의 부름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황기환은 이후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외교 홍보 활동을 계속하다 1923년 미국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황기환은 뉴욕에서 대한인 국민회 부회장으로서 회장인 염세우와 함께 뉴욕한인교회를 무대로 독립자금을 모금해 상해임시정부로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황기환은 이 같은 활동으로 독립운동가이자 외교관, 언론인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정부는 1995년 황기환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뉴욕 마운트 올리베 공동묘지의 황기한 선생 묘소 (뉴욕=연합뉴스) 이귀원 특파원 = 독립운동가 황기환 선생은 뉴욕 퀸스 플러싱의 마운트 올리베 공동묘지에 96년째 초라한 모습으로 쓸쓸히 잠들어 있다.

황기환은 뉴욕 퀸스 플러싱의 마운트 올리베 공동묘지에서 96년째 쓸쓸히 잠들어 있다.

묘소가 발견된 것은 불과 11년 전인 2008년이다.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아주 오랜 기간 잊혀 있었다는 얘기다. 결혼하지 않아 유족이 없는 것도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뉴욕한인교회 담임목사였던 장철우(80) 목사의 집요한 노력 덕분이었다.

장 목사는 '뉴욕한인교회 70년사'에서 초창기 뉴욕으로 이주한 한국인 노동자들이 마운트 올리베 묘지에 묻혔다는 기록을 본 뒤 교회 청년들과 무명의 한인 묘지 찾기에 나섰고, 극적으로 '70년사'에 이름이 올라있던 황기환 묘소를 찾아낸 것이다.

이나마 묘역 가장 서쪽 '웨스트론'(West Lawn)에서도 끝자락에 자리 잡은 묘소에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황기환은 뉴욕 일대에서 독립운동의 산실 역할을 한 뉴욕한인교회의 교인이었다.

높이 50㎝도 안 되는 작은 비석에는 난초 모양의 그림과 함께 '대한인' '황긔환지묘' '민국오년사월십팔일영면'이라는 세로 글귀가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차례대로 새겨져 있다.

바로 아래에는 'EARL K. WHANG'이라는 영문 이름과 'BORN IN KOREA', 'DIED APRIL 18, 1923'라는 문구가 가로로 기록돼 있다.

이름 중간 글자인 '기'는 당시 표기에 따라 '긔'로 표기한 것이다.

비석에 '대한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기준으로 산정한 '민국오년'이라는 연도를 표기한 것은 황기환의 대한인으로서의 자긍심과 강렬했던 독립 염원을 당시 동포들이 담은 것으로 풀이된다.

장 목사는 이후 매년 설날이나 추석, 부활절에 묘소를 찾아 참배를 해왔다.

특히 3·1운동 100주년인 지난 1일에는 장 목사를 포함해 뉴욕한인교회와 뉴욕우리교회 관계자, 주뉴욕 한국총영사관 우성규 부총영사 등 50명에 가까운 동포들이 묘소를 찾아 추모행사를 가졌다. 역대 최대 규모다.

3·1운동 100주년 맞아 황기환 선생 묘소에서 열린 추모행사 (뉴욕=연합뉴스) 이귀원 특파원 = 3·1운동 100주년인 지난 1일뉴욕한인교회와 뉴욕우리교회 관계자 등 50명에 가까운 동포들이 황기환 선생의 묘소를 찾아 추모행사를 가졌다.

이날은 영하의 날씨에 눈까지 내려 묘소는 더 쓸쓸해 보였다.

이날 추모식에서 뉴욕우리교회 조원태 목사는 추모사를 통해 "황기환 선생은 국권을 상실한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해외에서 세계에 알린 '민족의 스피커'였다"면서 "당신이 나라잃은 설움에 북받쳐 얼마나 설움의 눈물을 흘렸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당신이 흘린 눈물로 오늘날 우리가 대한의 아들딸로 자유를 누리며 어엿하게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고 말했다.

뉴욕 일원에서 오래 살아온 동포들도 황기환이 누구인지, 무덤이 어디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그를 모델로 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계기로 황기환은 뉴욕 동포사회에서 부활했다.

그러나 국내로의 유해 봉환을 놓고 교포 사회에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애국지사의 유해를 정부가 국내로 모셔가는 것이 당연하며 유해 봉환 후 현재의 묘지는 '성역화 작업'을 통해 기념하면 된다는 주장과 유해 봉환을 하지 않은 채로 현재의 묘소를 성역화하자는 주장이 맞서고 있는 것이다.

유해 봉환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한미디아스포라재단(가칭) 설립을 추진 중이며 이 재단을 통해 묘소 성역화와 관련 사업을 해 나가겠다는 입장이다.

국가보훈처는 연합뉴스에 "2016년 뉴욕한인교회 측과 현지에서 접촉해 황기환 지사 유해 봉환과 관련한 의사를 확인했으나 봉환을 거절했다"면서 "뉴욕한인교회에서 유해봉환을 요청할 경우 관련 절차를 통해 봉환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3·1운동 100주년 맞아 황기환 선생 묘소에서 열린 추모행사 (뉴욕=연합뉴스) 이귀원 특파원 = 3·1운동 100주년인 지난 1일뉴욕한인교회와 뉴욕우리교회 관계자 등 50명에 가까운 동포들이 황기환 선생의 묘소를 찾아 추모행사를 가졌다.

lkw77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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