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탕은 카페, 남탕은 옷가게..장안동 목욕탕의 폼나는 변신

김은영 기자 2019. 3. 21. 10: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장안동에 이상한 목욕탕이 나타났다
35년 된 주택가 목욕탕 개조한 ‘듀펠센터’, 입소문 타고 쇼핑명소로
반짝 핫플레이스보다 오래 가는 웜플레이스 될 것

서울 장안동에서 35년간 영업해 온 목욕탕 청호탕을 개조해 만든 듀펠센터./김은영 기자

서울 지하철5호선 장한평역에서 버스로 4정거장, 걸어서는 20분 거리. 스마트폰 지도앱은 횟집과 고깃집, 비즈니스 호텔을 거쳐 후미진 주택가로 기자를 안내했다. 설마 이곳에 쇼핑센터가 있다고? 의문이 들 무렵, 독특한 외관의 건물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쇼핑센터 ‘듀펠센터 (DUFFEL CENTRE)’다.

◇ 옛 목욕탕의 흔적이 묻어나는 쇼핑센터

지난 8일 문을 연 이곳은 발 빠른 인스타그래머들에 의해 새로운 명소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35년 간 대중목욕탕으로 쓰던 건물을 개조해 쇼핑센터로 만들었다. 정면에서 보면 유럽 어느 골목의 카페같지만, 측면으로 돌면 빨간 벽돌로 만든 벽과 목욕탕 굴뚝이 옛 정취를 풍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카페와 서점, 식당이 보였다. 평일 오후 시간대임에도 카페 안 벤치에는 빈자리 없이 사람들로 들어찼다. 개장한지 10일 남짓됐지만, 공간에선 몇 년 묵은 온기가 느껴진다. 마감처리를 하지 않은 벽과 바닥, 기념품으로 판매하는 세숫대야와 타월, 목욕의자 덕분일까.

이곳은 여탕으로 쓰이던 공간이다. 한 쪽에는 북미 바리스타 챔피언이자 타르틴 베이커리의 디렉터 데빈 채프먼의 카페 ‘파운틴’이 있다. 목욕탕에서 영감을 얻어 ‘샘’을 뜻하는 이름을 지었다. 바로 옆 ‘산,책’은 패션 저널리스트 홍석우 씨가 수집한 책을 모아 꾸린 서고로, 빈티지 서적을 전시하고 판매한다. 안쪽 명패 없는 문 앞엔 사람들이 더 몰려있다. 식당 ‘콘반’에 들어가기 위해 선 대기줄이다.

왼쪽은 옛 목욕탕, 오른쪽은 듀펠센터의 모습. 건물 안팎에 목욕탕의 흔적을 살렸다./김은영 기자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찾아주시는데, 사실 핫플레이스를 원한 건 아니예요. 제 옷을 좋아하는 고객과 저와 공감대를 갖는 분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장소를 만들었을 뿐이죠." 안태옥 듀펠Inc 대표의 말이다.

안 대표는 의류 브랜드 스펙테이터와 홈 그로운 서플라이 등을 운영하는 패션 디자이너다. 그는 이태원 경리단길에서 6년 간 매장을 운영하다 듀펠센터를 열었다. 왜 장안동일까? "번화가는 너무 비싸잖아요. 포털 사이트의 로드뷰로 이곳 저곳 눈품(?)을 팔다보니 장안동까지 왔죠. 처음부터 이 동네를 고집했다기보다 건물이 마음에 들었는데, 마침 목욕탕을 정리하려던 전 주인과 타이밍이 잘 맞았어요."

◇ 핫플레이스가 아니라 ‘웜플레이스’ 되고파

후미지고 조용한 주택가의 변신은 그렇게 시작됐다. 쇼핑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책도 보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고 하니 업체 16곳이 모였다. 안 대표 표현에 따르면 "독립적이고, 용감하고, 소박한" 친구들이다. 굳이 번화가에 매장을 내지 않아도, 애써 홍보하지 않아도 사람들을 찾게 만드는 자기 분야의 실력파들.

1층에 위치한 ‘파운틴’ 카페와 서고 ‘산,책’, 업계의 실력파들이 모여 특별함을 더했다./김은영 기자

남탕이었던 2층과 주인집이었던 3층은 실력파 브랜드들로 꾸며진 쇼핑 공간이다. 안 대표의 브랜드를 모은 ‘네버그린스토어’를 비롯해 ‘씸비트윈’, ‘에이카화이트’, ‘usdc’ 등이 들어섰다. 트럭의 폐방수천으로 가방을 만드는 ‘프라이탁’과 영국 잡지 ‘모노클’ 등 세계적인 브랜드도 입점했다. 이달 말에는 보일러실로 쓰던 지하를 개조해 이자카야를 선보일 예정이다.

요즘엔 낡고 촌스러운게 힙한 것이라더니, 드문드문 옛 목욕탕의 흔적이 묻어나는 건물을 보자니 과연 젊은이들이 좋아할만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진을 찍는 ‘인증족’들이 모여들고 있지만, 안 대표는 "듀펠센터가 취향과 안목이 있는 사람들이 편히 쉬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밝혔다.

건물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골목에 활기가 생겼다. 멀리서 찾아온 이방인과 가던 길을 멈추고 옛 목욕탕을 기웃거리는 이웃 주민들까지. "동네 주민들이 오셔서 커피를 마시는데, 너무 행복해 보였어요. 원래 목욕탕이 동네 커뮤니케이션의 중심이잖아요. 저희도 동네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핫플레이스가 아니라 웜플레이스(Warm place)로, 지역민의 자랑거리가 됐으면 좋겠어요."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